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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출애굽 사건, 그 세째 (롬 03: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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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사건에서 우리는 구원의 두가지 측면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된 구원에 대한 확인과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구원이 바로 그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에 대해서 롬 3:19-28을 가지고 풀어서 구약의 출애굽 사건이 다루어 있는 것이 어떤 내용을 사실상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자.
행위로 구원얻지 않고 믿음으로 얻기 때문에 성경은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자랑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은혜라고 한다. 구원은 삯이 아니요 은혜이다.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구원을 얻거나 못 얻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삯이다.
믿음의 주체가 무엇인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면 믿음이라는 이 단어가 명사인지 동사인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행위가 아니다. 행위 개념에서 행위를 이해시키기 위한 단어로 성경이 등장시키는 것이 ‘자랑과 삯’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과율이라고 한다. 성겨은 이것을 행위라고 한다. 내가 한 것이변 ‘삯’이고 내가 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가 있으면 ‘선물’이다. 믿음이란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생긴 것이다.미듬은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원인 없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롬 3:24)”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가에 대한 설명의 말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 생각하기를 지렁이가 메니큐어 생각하듯 한다.” 생각을 안하는데 구원의 조건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에게서 구원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신다. 그럼으로 능력이고 지혜이다.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만들고 결과는 우리에게 다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원인은 나에게 있지 않고 몽땅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도 예수, 살아도 예수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혼동을 일으킬 수 없다. 우리는 분명히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다. 구원 얻지 않은 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마저 갖지 않는다. 구원얻은 자만이 죄와 하나님에 대해서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백성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겠다’ 말씀하신다. 내 백성이기에 꺼내는 것이지 꺼내 놓고 내 백성을 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의 경험 속에서 예수를 알지 못할 그때에 이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되게 하셨다.은혜란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호의이다. 우리는 얼마나 뿌리 깊이 우리의 구원을 얻는데 대해서 믿음이라는 것을 조건으로, 자랑으로 갖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
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6-18)”
여기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두번 나온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우리가 보통 쓰는 믿음은 하나님이 원인이 되셔서 우리에게 결과로 말미암아 뜨게 해준 눈을 말한다. 지금부터는 우리에게 무슨 요구가 하나님 앞에서부터 내렸는가 하면 두번째 믿음이 떨어진다.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는 책망을 제자들이 자주 듣는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 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설득한 것을 말한다. 너무나 확실히 설득당한 일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만지게 하시고, 보이신 사실들이다. 내가 그 안에 설득당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
찌니라(신12:8)”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한 유언이다. 여기는 광야이고, 거기는 가나안이다. 지금 성겨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두가지 비유 중에 그 첫 비유인 구원의 즉각성, 곧 우리가 구원을 얻으면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소유 아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못한 바보같은 신앙생활을 광야생활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10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반석에서 나는 생수를 마셨고, 성령을 상징한 만나도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결단코 기쁘지 않다는 것으로 그 심각성이 나타난다. 광야생활을 애굽과 비교하면 오히려 애굽이 더 재미있었다. 여호수아 5장 13절로 15절을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를 막아선다. 그곳이 가나안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주인노릇하러 오신 것이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거룩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신을 신으면 돌아다니는 것인데 벗으라는 것은 이제 너는 꼼짝 말라는 것이다. 가나안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와서 이제부터의 모든 행로를 그가 인도하고 지시할 것이다. 그러나 광야에는 구름기둥이 있고 불기둥도 있지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들고 싸워 주지는 않는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는 싸움을 하느냐 안하느냐로 압축되어야 한다. 매일의 싸움은 내가 구원을 얻었느냐 못얻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오늘 하루를 하나님께 맡기느냐 안 맡기느냐의 싸움이어야 한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일을 안하고, 육체를 좇아 살면 성령의 일을 못한다. 우리에게 있는 싸움은 이 싸움이어야 한다. 매일 이 싸움이 있는 것이지 큰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호와의 군대장관 앞에 무릎을 꿇는 오늘 하루의 생애를 그가 요구하시는대로 순종하느냐 안하느냐의 싸움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구별해내는 영적 안목이 훨씬 날카로와야 하고 수준이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은 자이다. 발을 내딛어야 한다. 세상에서 우리와 부딪히고자 하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신자로서 부딪혀야 한다. 물론 실수가 대부분일 것이다. 모두가 싸우면 질 것이다. 그러나 진 싸움이어야 한다. 그것이 있어야 다시는 그것을 안하는 것이다. 싸우면 지고 실패할 때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빨리 실수하고 실패하여 더 이상은 실수하거나 실패할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끝에 남는 것은 승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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