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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출애굽 사건 그 네번째 (삼상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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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구원얻는 즉시 그의 신분이 고정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더 이상 보완할 것도 없는 운명이 된다. 그러나 수준의 문제는 다르다. 살아있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훈련되면서 동시에 나의 훈련이 하나님께서 제 삼자에게 보이고 싶으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은혜스러우심의 간증이요, 증거요, 살아있는 메세지이다.
분명히 출애굽하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의도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는 광야가 필수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출 17:14-17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했다. 여기서 아말렉은 한 종족의 이름으로 등장을 하면서 동시에 영적인 의미에서 사탄을 의미하고 있다. 이 전쟁은, 이 전투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간 그 대장인 여호수아에게 그 전쟁의 승부가 걸려 있지 않고 누구의 손에 걸려 있는가 모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아론과 훌이 팔을 들어 올려 이긴 것으로 나타나는 이 전쟁은 힘과 전략으로 이길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 영에 관한 싸움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진다.
출애굽을 해서 홍해를 건넜더니 그들을 맞이한 것은 가나안이 아니요 여호와의 군대장관도 아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나타났다. 출애굽을 했을 때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육신이더라’는 것이다. 출애굽을 하지 않았으면 아말렉과의 싸움도 필요 없다. 왜냐하면 아말렉은 신광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애굽의 종이 되어 있는 한 아말렉과의 전투는 필요없다. 출애굽을 하자마자 싸우는 것이 아말렉과의 싸움이다. 지금껏 우리가 죄 안에서 살 때에는 나와 나의 본성이 사탄과 도무지 충돌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자리와 원리를 바꾸었을 때 충돌이 일어난다. 예수 영접 후 맨 처음 부디치는 현실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갈등과 회의이다. 출애굽기 15장에서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을 때 이스라엘은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했다. 이 찬송은 합창이었으며 세상 유사 이래로 가장 위대한 합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7장에서 아말렉과 싸움이 벌어진다. 우리의 신앙현실도 이와 똑같다. 분명히 홍해를 건넜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내 자신이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이다. 맨 처음 우리가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이와 같은 것들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기로 약속되어 있는데 내 앞에 둘이 메고 올 포도송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말렉이 기다리고 있다’라는 사실에 혼비백산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뀐 생을 살기로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본성 안에서 튀어 나오는 죄 때문에 놀라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구워이란 넓은 의미로 일회적이지 않다. 시간에 걸친 완성이다. 우리는 모든 죄가 밖에서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다.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죄의 구속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들어갔다’라는 뜻이다. 심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랑과 구원의 차원에서 우리를 붙잡으셨다.
죄는 습관이 붙는다. 나쁜 일을 반복하면 양심이 점점 무디어 진다. 왜 성경이 ‘경건을 연습할’고 했는가 하면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이 내적 원리 이상으로 습관되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습관이 될만큼 생활에 배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거룩해져 있는 것일까 몹시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순간에 완벽하려는 습관이 있다. 실수는 있다. 그 실수를 한번으로 그치려는 생각 속에 어제의 잘못을 오늘로 연결시키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필요한 것이다.
삼상 15:1-3을 보면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으시고 첫번째로 주신 계명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3절에 “아말렉을 치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이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까


지 죽이라” 하신다. 이것은 육체에 관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짐승을 취하고 왕과 일족을 살려 두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 육체를 이겨낼 싸움이 우리에게 주어진 신자의 삶에서의 유일한 싸움이다. 우리의 눈에는 제법 쓸만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다’ 말씀하시며 몰아내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사울의 실수는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삼하 1:1-10을 보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10절을 보자. “저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음을 내가 알고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 왔나이다”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지 못하자 아말렉이 사울의 면류과을 빼앗아 갔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쫓아내지 못하고 육체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 육체가 우리를 거꾸로 정복할 것이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몰아내야 할 싸움, 곧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원리들, 죄의 습성들을 몰아내는데 참으로 심각하게 싸우지 않으면 거꾸로 면류관을 빼앗기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믿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 세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 구원은 취소되지는 않지만 부끄러운 구원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성령을 좇지 않으면 육체를 좇을 수 밖에 없다.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아직도 내 안에 너무나 많이 있다. 그것을 몰아내기 위해 훈련을 해야한다. 마태복음 7장에 반석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비유 속에는 집이 같다는데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기초가 틀린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인격과 인격으로 부딪혀야 되는 그 풍성한 생명의 깊음들을 나누지 못하고 법조문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의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시는 그 손길을 통한 감격을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 광야는 살기 힘든 곳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함이 있고, 마나가 있고,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샘이 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곳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변하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음미하려고 애써야 한다. ‘하나님의 간섭하심, 하나님은 이 사건을 지금 어떻게 보실 것인가’ 하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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