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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출애굽 사건, 그 다섯번째 (신 08: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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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바라는 것보다 더욱 간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는 광야를 걷게 하시고 우리에게도 어려움을 만나게 하신다. 왜일까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16절을 보면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광야를 하심이었느니라’ 말씀하셨다. 여기서 시험하신다는 말씀은 TEST 하신다는 것이다. 참과 거짓을, 옳고 그름을 분별하시기 위함이다. 여기에는 합격과 불합격이 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
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라
(롬 7:6)”
율법과 복음, 행위와 믿음은 무엇인가 구원의 문제에 있어 어떤 행위, 곧 일을 하는 것을 성경은 ‘행위’라고 하거나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원인이 있고 누구에게 결과가 있느냐 하는 방법론적 차원에서 성경이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키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오늘은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설명함으로 광야 40년 생활이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를 낮추시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율법은 ‘왜 필요했는냐, 은혜가 온 다음에도 율법은 그 가치가 있느냐’를 살펴보자. 예레미야 31:31-34을 읽어보자. 31절에 새 언약이라는 말이 나온다. 새 언약은 분명히 은혜를 일컫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 은혜를 일컫고 있다. 예레미야 31:31 이하에 비교가 어떻게 되고 있는가 하면 새 언약으로 줄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은헤 등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진리는 율법과 어느 부분에서 다른가 하면 율법을 집어 치우고 대신 나온 것으로 과거의 것과 다르지 않다. 새 언약은 무엇과 비교해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할 뿐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
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 31:32)”
남편이 되어 이끌만큼 강력하게 하셨어도 그들이 거절했기에 더 큰 힘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
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예전의 방법은 옛 언약은 손을 잡고 남편이 된 방법인데 그것으로 안되어서 이번에는 마음 속에다 내 법을 주고 내 말을 기록하는 방법을 쓰겠다는 것이다. 방법이 변하지 언약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마음 속을 바꾸어 놓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동원해야 하는 방법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
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
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느니라(롬 7:7)”
여기에서 율법의 기능이 나온다. 율법은 ’구원얻기 위한 방법‘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자들을 이제 ’훈련시키는 도구‘로써 율법이 어떻게 쓰이는가가 나오는 것이다. 졸리면 졸음이 쏟아지는 것처럼 죄는 우리에게는 본능이다. 그것을 지적해 주지 않았던들 우리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롬 7:14-25을 보자. 율법은 선하다. 율법은 우리에게 제시할 것은 다 제시하고 있는데 율법이 제시한 것이 우리가 율법을 좇아서 하는데도 불구하고 율법이 요


구하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율법이 잘못되어서 율법이 잘못 제시해서 우리를 잘못된 곳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약도이다. 율법은 선하다. 율법은 분명히 정확한 것이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도록 되어 왔다. 그런데도 우리가 소경되었기에 율법대로 가지 못한다. 율법을 지킬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광야 길을 걷게 하고, 만나를 먹이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고, 홍해를 건너게 하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끌고, 아말렉과 싸울 때에 손만 들면 이기게 하고, 그렇게 해서 이제는 ‘나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보아서 따라오면 합격, 안 따라오면 불합격이라는 차원이 아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딴전만 피우는 우리가 한심한 족속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속에 거닐었지만 그들은 늘 하나님께 원망만 퍼부어댔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이 장소는 가장 놀라운 곳이다. ‘광야’라는 장소이다. 돌아온 자만이 율법이 우리를 어떻게 찌르고 있는가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율법을 만난 것이 아니다. 죽은 자리에서 산 자가 되어 생명의 감각이 있는 자리에 왔을 뿐이다. 우리가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첫 과정의 방법을, 우리가 율법을 좇음으로서 구원을 얻게 하는 방법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안으로부터 고쳐서 쓰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편도 어쨌든 바깥 사람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 법을 우리 안에 두고 말씀을 우리 안에 새겨야 된다. 눈을 뜨게 할 수 밖에 없다. 비로소 눈뜬 자에게 이제 당장 필요한 것이 약도이다. 눈을 떴기 때문에 우리 앞에는 하나님이 제시하고 계시는 약도로서의 율법이 드디어 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율법은 맨 처음 우리가 장님이었다는 것부터 지적하고 나온다.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비례해서 하나님을 안다.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만큼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생각하기로 남에게 대접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자존심이란 ‘자기가 자기에게 요구하는 수준을 자존심’이라고 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동정해 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시집도 못가는구나. 내가 결혼해 주자.’ 이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뜻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는 창조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혜와 긍휼로 대접하시는 그의 자녀이다. 말도 안되는 사이이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가 사용하신다. 우리를 사랑으로 늘 인도하시며 제대로 밟아 올라가서 우리가 우리를 키워 하나님 앞에 정말 내 마음으로부터 항복을 꺼내 달라고 이렇게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신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너무나 필요한 조건이다. 성경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나는 너희를 사랑했다. 너희도 나를 사랑해달라.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나를 사랑해 달라’ 하신다. 참 놀라운 요구이다. 무릎 꿇으란 요구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송한 요구인가 이렇게 초청하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이 요구에 날마다 응답하며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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