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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입다 (삿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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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는 서자(庶子)이다. 그는 가정에서 쫓겨나 먹고살기 위하여 산적이 되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암몬으로 인하여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 오려고 돕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
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길
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
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
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
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여호와는 우
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반드시 행하리이다.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
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삿 11:4-11)”
여기에 지금 입다를 모셔가는 길르앗 주민들과 장로들이 입다와 주고받는 대화 속에 우리를 혼동시키는 칭호가 나오는데 여호와의 이름이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 여호와의 이름이 자주 등장함으로 우리는 이들이 믿음이 좋은 사람들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이다.
입다가 어떤 사람인가 서자이며 또 산적이다. 성경에서 서자는 정당한 사람으로 등장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암몬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을 때 그들이 찾아간 것이 서자이며 산적인 입다를 찾아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영적수준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다. 어려움을 당해 하나님을 찾아가지 않았더라도 다른 신, 즉 초월자를 찾아갔다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란 사람들이 고작 총잡이 산적을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증인이시니이다’이다. 하나님이 이 장면을 보고 계신다면 아마 ‘놀고 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싸우는데 그는 이런 약속을 하고 싸우러 나간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
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
라(삿 11:30-31)”
이게 무슨 말인가 입다가 얼마나 무지한 사람인가를 나타내 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인 약속의 땅에 들어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와같은 무지몽매한 산적을 주인삼고 있다는 것이다. 입다를 쓰신 하나님, 하필 이런 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은 암몬을 치시는데 있어서는 드보라를 들어서도 할 수 있다는 동일한 원리로 입다를 들어 쓰시는 것이다. ‘서자요 깡패인 자를 들어서도 내가 암몬을 쫓을 수 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느니 차라리 입다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입다를 사사로 불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데 쓰시기보다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가진 자신의 분노를 나타내시는데 사용하신다. 12장에 가면 그것이 잘 나타난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
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하지 아니 하였느냐 우
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고로 내가 너희의 구원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생명
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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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붙이셨거늘 너희가 오늘날 내게 올라와서 나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
고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
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 앞서 요단 나루턱을 잡아
지키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컨대 나로 건너게 하라 하
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
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
더라 그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명이었더라(삿 12:1-6)”
지방에 따라 발음을 못하는단어가 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십볼렛을 발음하지 못했다. 입다는 십볼렛을 발음하지 못하는 에브라임 사람을 사만이천명이나 죽였다. 도대체 하니님은 입다를 들어서 암몬을 치는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치는 것인가
입다의 승리를 승리로만 추적하기에는 하나님의 지적은 훨씬 깊은 곳에 있다. 여기에는 단 하나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입다로 쓰이는 사람도 자기가 쓰이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신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언제나 입다이다. 왜냐하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상식과 신앙을 혼동하지 말라. 교회가 여태껏 가졌던 실수를 안하는 것으로 맘놓고 있지 말라.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가나안에 마당히 살아야할 사람들이 가나안에 산다는 사실을 거절했을 때 쓰이는 사람들은 정착해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죽은 영혼들을 두둘겨 깨우는 기상나팔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국가가 강력해지고 하나님의 통치권이 구석구석에 펼쳐지는 그런 사회와 인생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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