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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 하나님 (신 3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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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본래 어머니 주일입니다. 본래 미국의 풍습이던 것을 우리 한국 교회가 받아드리면서 어버이주일로 바꾸어었습니다. 또 우리 한국교회에 서는 5월 첫주간을 가정주간으로 정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금년에는 특 히 유엔이 "국제 가정의 해"로 선포하고 그 주제를 "가정:변화하는 세 계속에서의 자원과 책임"으로 설정하여 더욱 뜻이 깊습니다.

 오늘 이 뜻깊은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부모님 되신 교우들께 하느님의 위로와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교우들에게 축하의 뜻을 표합니다. 오늘 가정의 축복, 현대 사회에서 가정의 의미와 중요성, 그리고 어버이의 사랑과 헌신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기회 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어버이에 대한 자녀들의 효도 의무나 가 정의 중요성의 문제를 성서적 신앙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고 이에 대해 우 리가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한 가지 실화를 소개하겠습니다. 강남의 어느 큰 교회 장로교회에 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남자 장로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오 면서 그의 아내를 보고 "재수없게 아침부터 여자가 지껼였다"고 말했습니 다. 매일 새벽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이날 아침은 예상밖에 여전도사가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 장로는 기분을 잡쳐 그 기분을 그대로 내 뱉었다 는 것입니다.1) 이와 같은 이야기는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들을수 있어 모두 익숙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 안에 있는 남녀 차 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히 남.녀차별 의 이야기만이 아닌 더 큰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기 독교 안에 있는 남.녀차별의 관행이 기초하고 있는 기독교의 자부장적인 신앙구조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남성적 존재라고 당 연히, 의심없이 여겨오고 있는 데에서 원인이 있고 우리 기독교 안에 남.

 녀 차별의 관행과 사고방식이 모두 이것과 직접 관련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여셩해방 신학자들은 오늘의 교회에 개우쳐 주었습니다. 그 들은 성서적인 관점에서 '하느님 아버지' 보다 '하느님 어머니'가 더 적 절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많은 곳에 나타난 하느님 본성에 관 한 표현들이 여성적이고 모성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고 있 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들은 신명기 본문은 출애굽의 해방 지도 자인 모세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 가운데 하느님은 어미 독수리의 모습으 로 묘사되어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 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 내려 와 날개를 펼쳐 받 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 야훼 홀로 그를 인도해 주실때 어느 다 른 신이 그와 함께 하였더냐"(32:11-12)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독수리가 새끼를 키우고 나는 것을 가르치는 방 법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새끼 독수리가 어느 정도 자라면 어미 독수리 는 나르고 독립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데 위의 묘사는 바로 그것을 말해주 고 있습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들의 집인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새끼들 을 모두 보급자리 밖으로 밀쳐냅니다. 그러면 날지 못하는 새끼들이 땅을 향해 곤두박질을 하면서 떨어지는데, 그냥 땅바닦에 그냥 떨어져 목이 불 어져 죽게 됩니다. 그때 어미 독수리는 밑으로 급강하를 하여 그냥 떨어 지는 새끼들을 떠받아 날도록 도와준다고 합니다. 위의 묘사는 바로 이러 한 독수리의 새끼를 날게 훈련시키고 돌봐주는 것이 비교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권위주의적이고 엄격하고 무서운 분 이나 명령이나 명령이나 하고 벌이나 주는 그런 남성적 아버지적 존재로 보다는 자식을 낳고 키우고 사랑하는 모성적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 실입니다. 우리 인간을 "낳은"분, 인간을 "낳느라 고생한 하느님"(32:18) 이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만, 성서를 자세히 관찰해 볼 때 하느님이 여성적, 모성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이곳 신명기 외에도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아 같은 예언서에 도 하느님을 모성적인 특성을 가진 하느님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호 11:1-4, 사 46:3-4, 램 31:15-22). 해산하는 수고를 경험하는 어머니(이사야 42장), 또 아기에게 젖을 빨리는 어머니 로 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서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은 아기 에게 젖 빨리는 어머니의 그것 보다 더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인이 자 기 가슴에서 젖 빨리는 아기를 어찌 잊을수 있으랴 그러나 어미가 아기 를 잊어버릴 수는 있어도 하느님은 그가 낳으시고 사랑하는 민족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 49:15, 참조. 욥 38:8, 28-29)

차라리 2천년 전의 옛날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은 하느님을 모성적인 분 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현대 기독교인들이 아주 무 지하고 무감각하고 또 무관심하지만,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가부장적이 고 권위주의적이며 남.녀 차별이 심했던 시대라고 알고 있는 2천년전에 살았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오늘 우리보다 훨씬 유식했고 성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성서에 여성적, 모성적 하느님에 대한 성서 의 내용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교회 역사의 문헌을 통해 서 알게 됩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 아닙니까 당시 신학자나 설교자들 은 하느님을 어머니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후 2세 기 때의 한 교부(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페다고고스"(Paidagogos) 란 책에서 모성적 하느님에 관하여 한 장 전체를 할애하여 서술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느님을 "젖 빨리는 하느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동정심과 사랑을 하는 하느님의 본성은 어머니라고 보았습니다.

 밀란의 성 암브로스(St.Ambros) 역시 하느님의 모성을 말했는데, 그는 "아버지(하느님)의 자궁"이라는 표현까지 했습니다. 또 하느님은 동시에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고, 남자라고 여자라고도 했습니다. 6세기때 리비아 (Lybya)프토레메스(Ptolemais)감독은 기독교의 하느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당신은 아버지, 당신은 어머니, 당신은 남자, 그리고 당신 은 여자입니다."2)

12세기의 수도원의 저술들에서 보면, 하느님을 아주 친근하고 접근하기 쉬운 모성적 이미지를 가진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가슴 에서 인간을 젖먹이고, 눈물을 닦아주고, 잘못에 대해서는 벌하고, 고뇌 와 고통 가운데서 아기를 출산하는 여인으로서의 하느님이라고 이해했습 니다.3)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의 이미지가 1세기 때의 책인 에스드라후서(2 Esdras)에 나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전능하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위해 기도하듯이, 어머니가 그 딸들을 위해 기도하 듯이 너희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느냐 유모가 그 아기를 위해서 기독 하듯이, 너희는 나의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도록 기도하지 않 았는가"(1:28-29)

이들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모성적 존재로 보았을 뿐 아 니라 예수 역시 여성으로, 모성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밀란의 성 암브로스는 "젖빨리는 그리스도의 젖가슴"을 말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신학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 (예을 들면, 오리겐, 이레니우스 등), 그리고 12세기 켄터베리의 베네딧 틴 수도사 안셀름(Anselm)은 "어머니 예수"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 는 또 "말씀(그리스도)은 그의 어린 자들에게 모든 것이다. 아버지고 어 머니이다...."고 했습니다. 3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베드 로의 행적"이라는 외경에는 하느님을 여성적 이미지로 묘사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당신은 나에게 아버지이시고, 나의 어머니이시다"4)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세기(347-407)에 살았던 성 요한 크리소스톰이란 분은 "성 마태목음에 대한 설교(학)"에서 그리스도의 모성을 말했습니다:"여인이 그 자식을 자신의 피와 젖으로 키우는 것과 곡 같이 그리스도 역시 그 자신의 피로 서 그가 낳은 사람들을 양육한다."5)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모성적 이미지와 신적 여성상을 연구한 버지니 아 매미 몰렌코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하느님의 남성적 이미지로 지나 치게 강조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말할때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것을 강조하 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여성적 이미지를 긍정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인 간성(humanity), 우리의 육체성, 우리의 감성(sensuality)을 긍정하는 것 이다."6)

"자연, 사랑, 지혜와 지식은 모성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이 다. 자기의 아기의 필요를 알고 보는 친절하고, 사랑스런 어머니는 그의 아기를 아주 부드럽게 지켜준다(guard)... 나의 친절한 어머니, 나의 은 혜로운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의 어머니의 달콤하고 은혜로운 손들이 우리 주위에서 준비되어 있고 부지런 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모든 일에서 그의 아기의 안전을 지 키는 것밖에 모르는 친절한 간호원의 참 직책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서 가장 시급한 교회 갱신의 과제 중의 한가지는 남.녀차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해방과 자유, 사랑과 정의, 평 등과 평화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정말 오늘 현실의 기독교가 그런 종교입 니까 오늘의 교회가 해방구나 해방 공동체가 아니라 해방 되어야 할 마 지막 미해방구라는것, 어떻게 보면 가장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억압 적 공동체가 교회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는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 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기독교의 하느님은 마치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여 창조하신 하느님인 것처럼, 남자는 하느님의 형 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았으나 여자는 남자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은 것 같이 믿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남자만 해방하고 여자는 남 자의 지배를 받아야 될 존재로 가르친 것 처럼 교회의 제반 관행은 여성 차별적이고 심한 경우 여성 억압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성 기독교인 은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목사나 장로로 안수를 받을수 없다는 사상과 관례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인간사회의 모든 차별 의 장벽을 허무셨지만 여성과 남성간의 장벽은 그대로 두신 것으로 믿는 듯이 오늘의 교회는 남.녀를 당연히 차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가 사회는 특정 시대의 문화와 사상, 관습을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체로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발전과 진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사실은 가장 보 수적이어서 변화를 싫어하고 저항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회적 세력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기독교는 수세기 전의 가부장적인 사회의 관습, 전통, 사고방식, 문화를 절대시하여 오늘에도 그대로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것 이 성서의 번역, 찬송가의 개정, 의식의 개정, 신학교리의 개정, 교회제 도의 개혁 등 이런 것에 대하여 반대하고 저항하는 현실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어버이주일에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설교를 많이 들어 왔습 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어버이에게 어떻게 효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보이는 것 같이 간단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어버이주일에 부모님에게 식사대접하고 고기를 사다드리고, 옷 또는 다른 필요한 것을 선물로 사드리고 혹은 용돈을 드리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인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확실히 아름다운 풍습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 효도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났습 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효도의 전부입니까 우리는 물론 그런것을 소 홀히 해서는 안될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겠습니까 우리가 남.녀 차별을 철폐하지 않고 어머니를 효도하고 섬긴다는 말이 되겠습니까 어 머니가 여인이고 여인은 이 사회에서 열등한 존재로 무시되고 차별받는 그런 지위에 있게 해놓고서 그 어머니를 사랑하고존경하고 효도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여성을 해방하여 남자와 꼭 같은 지위를 누리게 하 기 전에는 우리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효도한다든지 사랑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기독교가 교회 안에서 남.녀를 차별하고 있는데, 그 근거가 무었 입니까 여기에 성서적 근거가 있습니가 남자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다고 인정하면서 여자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것입니까 그렇게 생 각하고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회에서 남.녀차별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성차별을 하는 한 부모 공경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부모공경을 제대로 함 이 없이 하느님을 올바로 섬긴다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 회 안에 있는 여성관은 성서적인 것과 어긋납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하느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타고 났다는 것을 창세기가 증언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성들을 차별하는 것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게 창조된 사 람들을 향하여 차별하는 것이 됩니다. 어떤 이유로도 남.녀차별이나 부부 차별의 관습은 교회안에서 정당화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기독교가 가장 훌륭한 인간관을 가지고 있고 인간해방과 평등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렇 게 자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 나라의 민족적인 종교인 동학의 인간관은 기독교의 그것 보다 더 1994년은 동학 100주년을 맞은 해로 많은 행사와 함께 우리는 동학에서 놀라운 평등사상을 발견합니다. 동학에서는 인내천 (人乃天)이 가장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동학의 창시 자이고 초대 교주인 최제우 선생이 창안한 이 사상은 놀랍기도 하지만, 그것을 실생활에서 실천하였다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서양 사람도 남.녀 평등을 말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 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거기에는 여자들, 어린이들, 유색인종들,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들 앵글로 색손들이 믿었던 개신교 등은 제외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 이 평등하다고 할 때 그 모든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어떤 남자보고 그의 며느리를 며느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질책하면서 그를 하느님으로 섬 기라고 교훈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이렇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부관계 또한 반성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여성을 존중하고 여 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해방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합니다. 또 오 늘 많은 남성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아낀다고 합니다. 어떤 남편들은 설거지도 해 주고 아기 귀저기도 갈아주고, 안아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의 전부입니까 그것은 어떻 게 보면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을 해방하여 사회적으로 여 성이나 남성이나 평등한 지위를 보장하지 않고서 아내를 도와주고 사랑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남.녀 차별이나 부부차별은 교회안에서는 정당화 될수 없습니다. 성서가 남.녀차별을 규정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성서를 자세히 관찰하고 전체적으로 본다면, 그런 말 을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성서는 남편과 아내 관계를 말하면서 아내가 남 편에게 순종하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그 다음 구절을 보면, 남편은 아내 를 사랑하라는 교훈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그의 몸을 바치고 피를 흘리신 것 같이 그렇게 사랑하라고 했습니다.(에베소 5:25) 이러한 성서의 교훈이 과연 남녀차별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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