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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돈, 십일조, 헌금 (신 08:7-20, 마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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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인간의 삶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받침을 하고 있는 돈 문제와 우리 예배생활에 있어서도 또한 중요한 헌금에 대한 신앙적인 가르침을 함께 묵상하려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싶이 헌금은 설교나 기도나 찬송과 나란히 예배중에 포함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한 요소입니다.

요즈음은 교회가 많이 제도화되어서 헌금은 곧 교회예산으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헌금은 교회예산이란 재정의 틀로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배의 한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요소로써 기도나 찬송이나 설교를 통해 말씀이 선포되는 것과 같은 비중을 가지고 우리가 헌금을 드린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헌금을 왜 하느냐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가장 신앙적인 대답을 든다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라는 개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여기에는 생각의 착오가 있습니다. 헌금을 하나님의 몫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나머지 것은 자기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십일조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기 전에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십일조는 무엇이냐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는 구약의 여러곳에서 나오는데 간단히 열거해 보면

-창세기 14:20: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자인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고 거기에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고 했고

-창세기 28:22:야곱이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루스벌판을 헤멜 때 거기서도 자기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한 일이 있고

-신명기14:22-29:예배자가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려 사제인 레위인과 더불어 성전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축하하는 잔치를 드리라고 하였고

-신명기 26:12:십일조를 드려서 사제인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등 이 땅에서 재산이 없는 사람들을 도우라고 했고

-레위기 27:30:십일조는 하나님의 몫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므로 자기의 것으로 돌릴 수 없고

-느혜미야 10:33:성전관리, 예배, 성전행사를 위해 일정한 금액을 내도록 했고

-느혜미야 10:38:백성들이 거두는 소출의 십분의 일은 목회자인 레위인의 몫으로 이미 확정해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와 지파별로 땅을 분배할 때 레위인을 전적으로 성전일만 하도록 하였으므로 땅을 분배하지 않았고 레위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과 만나게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다른 사람이 책임지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십일조는 첫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둘째는 고아와 과부등 없는 자들을 위해 쓰이고 셋째는 교회의 운영과 교회를 위해 일하는 목회자의 생활을 위해 쓰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몫이라고 한 것은 독특하게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정한 하나의 규정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십일조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예배를 드리는 일을 하는 성전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었읍니다.

가끔 헌금은 선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차원에서 크게는 다 선교이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성전의 운영, 가난한 자의 구제 그리고 이 일로서만 세상을 살도록 부름받은 목회자의 생활 이 세가지가 헌금의 쓰임세라 할 수 있고 이 세 가지가 다 선교에 해당합니다.

자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십일조만이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자기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되 십일조는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전담한 성전을 위해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도 서서히 십일조를 내기 않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3:9 에서 예언자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고 있는 백성들에게 최소한의 하나님의 것도 내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우선은 자기의 쓸 것이 십일조를 냄으로 말미암아 적어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결코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신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구약에서의 십일조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제도입니다. 특별히 전 국민이 100% 유대교신자인 이스라엘백성에게 부과된 하나의 종교적 의무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정신은 십일조만이 하나님의 것이고 그것을 안바치면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다는 어떤 주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고 성전이 하나님이 존재의 상징적인 곳이고 또 예배와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섬기며 산다는 만남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표시로서 우리가 행하여야 하며 성전의 운영과 교회의 선교는 성도의 의무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더우기 십일조를 축복의 도구로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이방종교적 생각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된다며는 헌금은 거기에 대한 마땅한 표시이며 헌신이기 때문에 그 정신에 의한 헌금이 십일조라는 수치적인 기준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 헌금을 의무보다 정신의 차원에서 드려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 당시에 와서는 훨씬 더 강조되기 시작했읍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는 없던 정신을 예수님이 다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그 의미가 희석되어 있던 것을 예수님이 다시 강조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이 신명기에 나와 있고 이 정신을 예수님이 아주 극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헌금의 정신은 수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의 문제입니다.

먼저 신명기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너희 하나님 야훼를 잊어 버리지 않도록 하여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살게 되고 소떼 양떼가 불어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너희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행여나 교만한 생각으로 너희 하나님 야훼를 잊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나님께서 너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 주시지 않았느냐 하는 말씀이 있고 17절에 내려가면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너희 하나님 야훼를 생각하여라 하나님께서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당신의 계약을 이행하셔서 오늘 이처럼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이 잘 살게 되면 모든 것이 자기가 일해서 자기가 번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있게 해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데 사실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원초적인 터전을 마련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오늘 목숨을 거두어 가시면 모든 것은 거기에서 중단이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에는 잘살게 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사건에 대해 경고를 한 다음에 19절에 너희가 야훼 하나님을 잊고 다른 신을 따라 가 섬기고 예배한다고 경고를 하고 있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이 신이 바로 다름아닌 재물이란 신이라고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하신 말씀에서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 정도로 상승될 수 있다는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기독교인이 재물에 대해 가져야 할 생각을 정리해 주었읍니다. 이 원칙을 제네바시민에게 가르치고 각자 삶에 적용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칼빈이 정리한 것을 보면 재물은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위해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8:7에 "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는 이제 너희를 기름지고 넓은 땅,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솟아 샘이 되고 냇물이 흐르는 땅으로 이끌여 들이려 하신다. 그 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여는 땅이요, 올리브나무 기름과 꿀이 나는 땅이다. 굶주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땅, 아쉬운 것 하나 없는 땅이다.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너희는 배불리 먹으며 하나님을 기리게 될 것이다" 란 말씀에서 우리의 재물은 우리의 삶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말합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우리가 번 월급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란 것입니다.

중세이전까지는 요사이도 어떤 금욕적인 신앙인들은 물질이 악하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신명기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은혜이므로 악할수도 없고 쓸모없는 것일 수 없읍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특별히 물질이 하나님위로 그 가치가 올라갈 경우 그것은 인간의 참다운 삶을 저해하는 세력으로 화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되는 경우를 신명기는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너희가 부유하게 된 이후에도 하나님을 잊어 버리지 않고 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물질은 우리를 항상 시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부유한 가운데도 하나님을 공경하는가 즉 우리의 모든 것이 자기의 노동력으로 생긴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먼저 신앙적인 문제, 둘째는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우리가 율법과 예언의 강령, 즉 하나님의 말씀의 두 주요 지침이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인데 재물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기의 노동의 댓가로 보면 이 두 강령이 전혀 실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재물은 하나님이 모든 세상의 당신의 백성을 위해 공동으로 주신 은혜이므로 누구는 많이 차지하여 주체를 못하고 누구는 절대필요치 조차도 갖지 못하는 상태가 있게 되면 이것은 곧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질서를 깨트리는 것이 됩니다.

말하자면 가난한 자의 것을 착취하여 부자가 되거나 가난한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재조정을 하지 않는 경제적 불의는 예언과 율법의 대강령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부의 유통이란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바르게 운용되도록 하는 우리의 책임이며 이 부는 유통은 재분배를 통해 이루어 져야 하고 그 유통의 방향은 부를 소유한 사람에게서 가난한 자에게로 이루어 져야 하고 이것은 자기의 것을 베푸는 선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함께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칼빈은 역설했습니다.

그래서 이 돈의 올바른 유통과 재분배도 교회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해야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제네바시민들을 훈련하였습니다.그는 실제 당시 박봉이던 노동자와 교사들의 봉급을 올리기 위해 수차례 시의회를 찾아가 설득하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는 노동자의 급료를 안주거나 또는 정당하게 주지 않거나 깍아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가로채는 것이라고 하고 이에 대한 노동자의 항거를 정당한 것으로 하여 격렬하게 투쟁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오늘로 보면 칼빈은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신앙적 차원에서 인정한 사람인데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많은 한국장로교회는 이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고 지식은 커녕 오히려 권력층에 붙어서 노동운동을 반대하는 비 복음적인 일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의 이런 투쟁은 단순히 노동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좀 더 하나님의 복음대로 이 사회가 조직되어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신앙을 공허하고 추상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차원에서 실천하고 신앙대로 살려는 지극히 경건한 신앙의 발로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재물의 얼마를 하나님께 혹은 성전관리와 목회자의 봉급을 위하여 바치라는 말씀보다도 훨씬 더 뛰어넘는 하나님앞에 신앙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칼빈은 우리의 예배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했는데 그는 가르치기를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이것은 하나님에게 예물을 드린다거나 하나님의 것을 갖다 바치는 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재물 (Mammon) 이란 神을 하나님에게 굴복시키는 순서라고 했습니다.

재물이란 것이 인간에게 神이 되고 싶어하고 인간은 재물을 신으로 섬기려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재물을 神이 되려는데서 하나님앞에 굴복시킴으로서 그 악령적 권세에서 해방시켜 하나님과 그의 선하신 뜻을 섬기는 종이 되게 하는 것이 헌금순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그대로 예배속에 구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우리의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림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 재물까지도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그것이 그 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데 쓰여져야 한다는 정신이 중요한 것이며 이런 정신을 갖는다면 헌금을 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쓴다는 지극히 신앙적이고 건전하고 우리 모두가 복된 결과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헌금할 것이냐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 나타난 바울이 이런 예수님의 정신과 헌금의 정신을 살려 아주 신앙적인 헌금의 기준을 주었는데 헌금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하고 아까와 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했고 "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이라면 가진 것에서 얼마를 바치든지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신다."(8:12)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일률적인 헌금의 기준을 주지 않았습니다.
각자가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하라고 하고 그 동기와 그 의미를 깨닫고 하라고 했읍니다. 또 형편에 맞게 해야 하고 마음에 근거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형식적인 십일조를 책망하시고 과부의 마음이 담긴 그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더 많이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형편이 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드린 헌금은 그 액수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면한 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금"은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십일조의 규정을 능가하는 정도로 넘치도록 나왔다고 간증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헌금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촛점이 헌금이 아니고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은 자기의 재산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게 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십일조, 헌금 그것이 촛점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고 그가 하시는 일에 대한 동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사실상 십일조와 같은 헌금의 기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일조에 대해 단 한번 언급하셨는데 마태복음 23:23에 형식적인 십일조를 드리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너희는 박하과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되지 않겠느냐이 눈 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를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십일조는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지키는 것이다.

분명하실 줄 압니다.
우리는 헌금을 할 때 헌금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통하여 함께 한다는 차원에서 드리는 것이 중요하며 더욱이 우리의 재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역사를 위해 쓰이게 한다는 의미에서 헌금을 드림으로서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헌금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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