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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식은 (시 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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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식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머리에 지금도 바닷바람 일고 / 걸음은 아직 후들거렸습니다/ 겪고 난 무서움과 첫길 떠나던 젊은 기쁨에… 내 팔에 안겨 / 움직이지 않는 이 자식은 아득한 딴 세상에 / 꽃피고 자라서 / 내 것인데 아득히 멀기만 하였습니다 / … 저 유명한 게오르게(Stefan George)의 ‘내 자식 집으로 돌아오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나타내신 저 유명한 탕자 비유를 보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직 상거가 먼데 / 아버지가 저를 보고 / 측은히 여겨 / 달려가 / 목을 안고 / 입을 맞추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5:20).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 /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 발에 신을 신기라 /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 저희가 즐거워 하더라’(눅 15:22-24)고 하였습니다.

돌아온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어쩔 수 없는 감격의 폭발을 나타낸 장면입니다.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어쩔 수 없는 용서와 사랑과 축복과 회복을 나타내는 뜨거운 장면입니다.

자식이란 실존은 부모에게 정말 매력적인 존재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론적 실존입니다. 그래서 소포클레스는 ‘자식은 부모 생애의 닻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영감의 시편에도 자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Ⅰ.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27편 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중대하고 중대한 말씀입니다. ‘자식’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산물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라고 하였습니다(마 19:4). 말라기 2장 10절에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말라기 2장 15절에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한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 다음에 또 말하기를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은 유여하다고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은 부족하지 않고 여유가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창조하실 수도 있지만 오직 하나만 지으셨다, 곧 일남 일녀만 지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사람을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가 남자 아담이었습니다(창 2:7). 그 후에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해서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서 취해낸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창 2;21-22). 그리고 친히 그를 아담에게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이때 아담은 그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하였습니다(창 2:23).

그 후에 저 남녀는 합하여 하나가 되고, 자녀를 생산하는 하나님의 창조수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유여하지만, 한 남자와 한 여자만 지어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고(창 2:24, 마 19:4-6), 그들의 부부관계를 통하여 자손을 번성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짝지어 하나(부부)로 만든 것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은 인류를 번성케 하는 하나님의 창조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질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남녀의 이성(異性)이 결합하여 성(性)관계를 갖는 것은 육체적 쾌락만을 위함이 아니라, 그것은 경건한 자손을 생산하기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계획이요 수단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주신 수십억 개의 유전자(DNA)는 남녀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통하여 생명의 형질이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여자의 난자와 남자의 정자는 성행위라고 이름하는 관계를 통하여 만남을 이루고, 그것이 생명체의 형질로 구성되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나타난 무서운 복제인간 예프는 난자와 정자의 만남이 필요없이 인간의 신체 일부에서 떼어낸 체세포 곧 세포의 핵을 난자 속에 집어넣는 방법입니다. 난자 속에 들어있는 유전자 핵을 제거하고 복제하고 싶은 인간 신체의 일부에서 떼어낸 세포의 핵을 난자 속에 옮겨 복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른바 생명공학의 시도는 더 발전해서 여자의 자궁내의 이식이 필요없이 특수제작한 관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동물복제나 인간복제를 가능케 해버렸습니다.

이러한 인간복제의 산물을 ‘여호와의 주신 자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순리가 아닌 역리의 산물인 복제인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것을 여호와께서 주신 경건한 자손이라고 할 것인가 돈을 주고 원하는 인간형을 주문해서 키우는 아이를 내 혈통을 타고난 자식이라고 하겠는가 복제인간은 영통으로도 하나님의 산물, 곧 한 아버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혈통으로도 부모가 없습니다. 그것을 과연 내 자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거기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적인 사랑의 애착이 갈 것인가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기 창조 행위의 산물을 가리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우리가 받은 자식은 복제된 인간일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서의 산물입니다.

특별히 여기 ‘기업’이란 유산을 상속받을 ‘아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모에게 주신 자식의 존엄성과 고귀성과 존귀성과 축복성과 사랑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Ⅱ. 자식은 태의 열매로서 그의 상급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127편 3절이 또 말하기를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다시 말하기를 ‘자식’은 ‘태의 열매’라고 표현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태(胎)’는 뱃속의 아이를 담고 있는 난막, 곧 태반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이 말은 탯줄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시에 여인에게 ‘태(胎)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형질을 이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코 여러 류의 시험관이 아니었습니다. 그 탯속에 생명을 수태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수태의 고통이 따랐습니다. 그 탯속에서 10개월이라는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 동안 자라게 하였습니다. 자식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태에 자리를 잡고, 태에서 자라서 세상에 오게 하였습니다. 그 태는 수태할 때, 성장할 때, 해산할 때 모두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태의 열매는 부모에게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상급’()이란 말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의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은 아브람의 방패요 상급 곧 ‘갚아 줌’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복이라고 하였습니다(창 15:1, 역대하 15:7).

다시 말하면 자식은 하나님께서 그 충실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축복의 선물이란 말입니다. 바로 창세기 17장 16절의 경우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곧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라는 말을 연발하고 있습니다.

 Ⅲ.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127편 4절에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젊어서 낳은 자식은 그 부모된 자들이 늙기 전에 장성하며 크게 되어, 부모를 섬기고 보호하는 힘이 된다는 뜻입니다.

「장사의 수중의 화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시 127:5). 고대의 용장들이 자기 허리 앞뒤에 화살을 꽂고 있는 그 늠름한 모습을 그 부모를 둘러 있는 축복 받은 자손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 부모는 온갖 생존경쟁의 마당에서 수치를 당치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한 말입니다(시 127:5). 장사의 수중에 꽂힌 화살 같은 자식은 바로 축복 받은 자식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그런 복을 받겠습니까

1. 여호와가 저들 복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127편 1절과 2절은 그 확실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곧 ① 하나님이 집을 세우고, ② 하나님이 성을 지키고, ③ 하나님이 경제 행위 곧 수고의 떡에 축복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과 그 개인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가정과 한 나라(성)를 창조하고, 통치하고, 섭리하고, 복을 주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의 자손을 수천 대에 이르도록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장 5-6절 중에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큰 축복을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① 그 자식들에게 여호와 경외의 신앙을 계승합니다. 그래서 그 자손들은 어릴 때부터 여호와의 율례 곧 계명을 좇아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 생활과 기도와 감사와 찬송과 선행생활에 익숙해져 버립니다.

② 그 자식들을 향하여 뜨거운 기도와 사랑과 축복의 훈계를 계속합니다.

③ 하나님이 그 자식들에게 주신 달란트 계발에 힘을 써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적적 삶을 정립시켜 줍니다. 그 결과 저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부모의 앞과 뒤에 둘러서게 되고, 그때 그 부모는 마치 용맹스러운 장사(장군)와 같은 위풍을 갖추게 됩니다. 그 결과 모든 생존경쟁의 마당(재판석)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 자식들은 위로 하늘의 하나님께 뿌리를 박고, 아래 땅에서 믿는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축복을 계승받게 된 결과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와서 위로 세 아들과 아래 한 딸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전도사 생활 때 일찍이 자녀를 받았습니다. 저들은 모두 부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대구와 또 부산에서와 여기 서울에서 100% 주의 은혜로 성장하였습니다.

저는 자식을 키우면서 참으로 예측치 못한 뜨거운 경험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큰 한 경험이 있습니다. 세 아들을 모두 이별하던 순간입니다.

막둥이 아들(기신)은 대학초기에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둘째 아들(기성)은 군복무로 떠났습니다. 첫 아들(기현)은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1개월 후 미국에 살고 있던 처녀와 결혼한 아들을 어느 날 함께 미국으로 떠나보내게 되었습니다. 공항에서 저들을 보내고 해가 저버린 저녁에 당시 사택이었던 여의도 삼익아파트 B동 12층 4호로 돌아왔습니다.

아파트 문을 열면 바로 왼편에 있는 조그마한 방이 우리 아들 셋이 자라던 공간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저는 서슴지 않고 그 방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익숙한 버릇이었습니다.

그 좁고 좁던 방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저와 아내는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밤 한 시나 두 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들던 나는 그날 저녁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고, 불을 껐습니다. 아내도 일찍이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돌아누워 몇 시간을 뒤척이고 있었습니다. 정말 잠은 오지 않고 생각에 생각이 줄을 잇던 밤이었습니다. 고생일관으로 키웠던 이 일, 저 일들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소리없이 흐르던 눈물은 마침내 흐느끼는 소리를 내고야 말았습니다.

나와 등을 돌리고 잠자는 줄 알았던 아내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나의 흐느낌 소리에 아내도 그만 흐느낌 소리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울었습니다. 정말 어떤 시험에 빠진 듯한 눈물과도 같았습니다.

그 시간 하나님은 저에게 이상한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석 목사야! 그만 울어. 지금 너는 너의 아들 기현이도 부모를 생각해서 그렇게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저들은 지금 미국 가는 북해도 상공에서 부모도 잊은 채 얼마나 즐거운 웃음을 나누고 있는데…”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생각을 정돈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때 번개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 내가 장가들어 내 아내가 된 최윤선을 따라가며 어머니를 떠날 때, 내 어머니가 나 때문에 이렇게 울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벌떡 일어나 앉아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일으켜 주면서 제 생각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아내는 진해 시어머니에게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첫 버스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전날 밤에 서울에서 되어진 일을 다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아들이 그때 어머니가 울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울으셨느냐고 물어보았답니다.

그때 어머니가 또 우시면서 하는 대답입니다. “울고 말고. 이별 중에 자식 이별만큼 슬픈 이별은 하늘 아래 다시없다.”고 하였답니다. 참으로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들 때문에 숱한 종류의 이별로 한이 맺힌 자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자식들을 뺏기는 이별, 6.25 동란 때 자식들을 죽음의 전쟁터에 내보낸 뼈아픈 이별이 저들의 가슴에 한을 맺게 하였습니다. 그때 아내는 몇 일을 머물면서 시어머니를 위로하고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것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 아끼는 마음, 잘 되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별이 못내 아쉬운 슬픔의 마음들입니다.

과연 돈주고 주문해서 기른 복제 아들, 복제 딸에게도 이러한 부모의 뜨거운 사랑이 전달될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마 7:9-11).

자식은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축복의 기업입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태의 열매, 곧 축복의 상급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둘러 섬기고 보호하는 빛나는 전통의 화살입니다. 그렇기에 부모는 그 자식을 사랑하고 축복하고 자랑합니다.

바로 부모의 허리에 둘러 서 있는 전통의 화살 같은 자식! 이것이야말로 별들의 전쟁에 승리할 축복의 징조가 아닌가 어린이 날, 어린이 주일을 맞는 우리 모든 부모들에게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가 되는 축복 있기를 축원합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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