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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모신 가정 (엡 05: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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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 ‘주님을 모신 가정’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해서 가정을 이루고 삽니다. 사람이 모여서 사는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축복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그를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짓기로 하시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데려 올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하며 아담이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여기 연합한다는 것은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기본적인 피조물의 일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보여주신 내적 표현의 일부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이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우자를 찾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러기에 인류의 통계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여자와 남자의 수가 같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남자가 군에 나가 생명을 잃어 그 수가 줄어들면 다음 세대에는 남자 아이가 많이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인구가 다시 균형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남녀가 결합해서 한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입니다.

제가 듣는 대로 우리 교회 안에도 결혼 연령이 되었는데도 적당한 배우자를 찾지 못해서 은근히 고민하고 계신 분이 적지 않으신 모양인데 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셔야 합니다.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 기도는 정욕으로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가 부족할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처럼,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세상에 태어난 우리가 배우자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지 아니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초조해 하며 고민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부부를 향해서 성경은 자세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가정을 향한 권면에서 성경은 먼저 아내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했습니다.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복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어떤 권위나 힘에 대해서 겸허하고 슬기롭게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통치에 복종합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여성 중에는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게 지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가”합니다. 그렇습니다.

얼른 들을 때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저 옛날 봉건제도 하에서 있던 말이지, 2천년 전에 사용되던 사상이지, 오늘에 와서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다 완전하게 만드십니다. 남자는 100이고 여자는 80이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남자도 100이고 여자도 100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이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남자를 머리로, 여자를 몸으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질서가 깨질 때 혼란이 생기고 참 행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기 어떤 부인이 불평을 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평생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하나 내가 남편보다 무엇이 부족해서 그렇게 살아야 해 나도 아무개 부인처럼 남편을 손에 쥐고 흔들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나는 무엇 때문에 집에 있으면서 밥이나 짓고, 빨래나 하고, 집안 청소나 하며 살아야 돼 남편이나 애들의 시중들고 살아야 해 나도 나가서 사업해서 돈 벌고, 이 사람 저 사람하고 교제하고, 우리 남편이 집안에서 집안 살림 맡아 하면 될 것 아니야” 정말 그러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시기 전에 그렇게 사시는 부인이 있으시면 그 부인 찾아가서 한번 알아보시고 결단을 내리세요.

“부인께서는 남편을 손에 쥐고 흔들며 사시니까 정말 행복하세요” 한번 물어 보세요. 그 부인은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행복이요 행복이 다 뭡니까 나도 내 남편이 제 구실해서 남들처럼 가정이나 지키고 애를 돌보고 남편 시중들게 되면 한이 없겠어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를 차별이 아니라 구별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합니다. 이 구분이 되지 않을 때 혼란이 생기고 행복이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아예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남자가 아무리 높은 소리를 내도 여자 같을 수가 없고,여자가 아무리 낮은 목소리를 내도 남자의 목소리 같을 수는 없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으로 복종하며 살 때 여기에 참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편에 대한 권면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했습니다.

우리가 가정을 이룬 남자에게 “당신은 아내를 사랑합니까”라고 물으면 “아무럼요. 물론 사랑하죠”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그 정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사랑은 자기 희생의 사랑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했을 때 사용한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씀했는데 그것은 분명히 ‘희생을 각오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남편의 아내나 자녀에 대한 권위는 인간의 육적인 권위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희생에 뿌리를 박고 있는 거룩하고 신령한 권위’인 것입니다.

남편은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남자는 강인하고 튼튼한 어깨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남자는 어떠한 압력에도 견딜 수 있는 정신적인 위대한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마음은 쉽게 낙심하고 쉽게 굴복합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많은 가정이 있지만 주님을 모신 가정은 다른 데가 있어야 합니다. 집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정신적인 기초가 다르기 때문에, 그 가정의 의미가 다르고 정신이 다르기 때문에 자연히 보고 느끼는 분위기도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교훈하는 대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처럼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영위될 때 그 가정은 행복한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행복한 안식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흐뭇한 생활의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정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돌아가는 곳, 그곳은 나의 집이요, 내 가정입니다.

아침에 집을 나와서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도 저녁이 되면 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일터에서 온종일 직무에 시달리다가도 저녁이 되면 누구나 제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가정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아늑한 사랑의 안식처입니다. 세상에서 돌아가야 할 집이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집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homeless people'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뿌리 없는 풀과 같습니다.

태초에 가정이 있었습니다. 가정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집단이요 기본적인 생활 공동체입니다.

인간의 액체 중에서 가장 짙고 강한 것이 피입니다.그러므로 핏줄로 얽힌 인간관계, 형제와 자매 사이는 아무리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것을 천륜(天倫)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이 정해 준 인륜(人倫)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이나 부부의 관계는 사랑이 있을 때이지 사랑이 식어 버리면 헤어지고, 남남이 되고, 아니 원수처럼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애정이 변해서 증오가 되고 사랑이 원수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 형제 자매의 동지간은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핏줄로 얽혔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직장을 선택하고 배필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제 아버지와 제 어머니를 선택하고 제 아들과 제 딸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제 형과 제 아우, 제 누님과 제 동생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선택 이전에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것입니다.

한 지붕 밑에서 한 솥의 밥을 먹으면서 일생 동안 아버지라고 부르고, 딸이라고, 언니라고 부르고, 동생이라고 부르고, 누이라 부르고, 오빠라 부르는 관계야말로 정말 귀한 관계입니다.

우리는 이 관계를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로 생각하고 깊은 감사와 축복 속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제가(齊家)를 인생의 근본의 하나로 삼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닙니다. ‘제가’라는 말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가정 건설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창조하는 것이요,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가꾸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건설하는 것은 인생의 기본 의무요, 첫째가는 책임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흐뭇한 말은 형이라는 말이요 동생이라는 말입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정다운 말은 나의 집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가고 오는 것입니다. 말이 오고 가고, 미소가 오고 가고, 인사가 오고 가고, 정이 오고 가고, 물건이 오고 가는 곳이 가정입니다.

오고 가는데 행복이 있고 보람이 있고 사는 맛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고 가지 아니할 때 불행이 있습니다. 고독이 있고 슬픔이 있고 비극이 있습니다.

대화가 오고 가지 않는 부부, 사랑이 오고 가지 않는 연인, 미소가 오고 가지 않는 친구, 그것은 고독하고 불행합니다. 행복한 인간 관계는 말이 오가지 않고, 미소가 오가지 않고, 정이 오가지 않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가화만사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는 치국의 근본이라 했고 인지대본이라고 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만가지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집을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간이 됩니다. 제가는 인생의 근본입니다. 옛사람들의 이러한 말은 인생의 오랜 경험과 밝은 지혜에서 나온 말입니다.가정이 화목할 때 인생의 만가지 일이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잠언 17장 1절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했습니다. 화목하지 않고는 불행한 것은 말할 것 없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가족이 화목한 것처럼 아름답고 행복하고 좋은게 어디 있었습니까 시편 133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근본은 성격이요. 성격은 우리의 인생을 지배합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성격이 어디서 형성됩니까 그것은 가정입니다. 가정은 인간 성격 형성의 도장입니다. 어려서 가정에서 성장할 때의 인간 관계는 그 사람의 성격의 방향과 유형을 결정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자녀는 이 다음에 원만하고 건전한 인간이 됩니다.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자란 어린이는 나중에 냉정하고 원만하지 못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형제 자매 사이에 우애가 두터웠던 어린이는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남편이나 아내와의 관계가 화목하고 원만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가정은 인간이 성장하는 생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격 형성의 결정적인 장소입니다.

이처럼 가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고 자라느냐 하는데 따라서 우리의 신체가 좌우되듯이 가정에서 어떤 정신적 양식을 먹고 자라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성격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인생의 학교와 같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여러 가지 것을 배웁니다. 부모의 말에 복종하면서 권위를 배웁니다. 규율과 질서를 배웁니다. 또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애정을 배우고, 희생을 배우고, 용서를 배우고, 양보를 배우고, 이해심을 배웁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익힙니다. 가정에서 인간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늘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자라나는 식물은 생기가 없고 시들해집니다. 그러나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나는 식물은 따뜻한 햇빛을 많이 받아 식물은 생기가 약동하고 꽃은 향기가 강합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동물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랑을 못 먹으면 인간은 시들해집니다. 사랑을 많이 먹으면 인간은 발랄해집니다. 사랑은 인간의 정신적인 양식 중에 으뜸가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랑의 태양이 가득 차야 합니다.

가정은 사랑의 저수지요, 사랑의 공급처입니다.가정에서 사랑의 요소를 제거해 버려 사랑이 없으면 가정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서로 따뜻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서로 깊은 이해심을 갖는 것입니다. 서로가 두터운 책임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해 주고 서로 칭찬하는 곳입니다. 서로 돕고 아끼는 곳이 가정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사랑이 많은 가정이요, 불행한 가정은 사랑이 적은 가정입니다. 사랑은 행복의 척도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가정을 행복하게 만듭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가 정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주님은 한 손에 생명의 열쇠를 갖고 있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의 열쇠를 갖고 있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십니다.

주님을 모신 가정은 창조력이 움트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더러 우리에게 창조력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주어졌을 때 주님을 모신 가정은 그것을 창조의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염려와 근신, 고민과 번뇌, 불평과 불만 대신에 어떤 문제라도 창조적으로 해결하려고 힘쓸 때 주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삶의 감격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모신 가정은 창조의 샘이 됩니다. 이 말은 가정이 어린애들의 창조 능력을 키워 주는 장소라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주님을 모신 가정은 아내의 창조 능력을 키워 주는 장소가 될 수도 있고 남편의 창조 능력을 키워 주는 곳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자라면 부모에게 새로운 창조 능력을 개발하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식구들은 모두가 창조적인 가정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주부입니까 가정이란 창조체의 주인이십니다. 직장 생활하는 평사원이시라구요 가정이란 창조체를 이끌어 나가는 아버지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닥칠 때 온 가족이 이 문제를 창조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폭풍의 날에 우리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곳은 가정뿐입니다. 우리 마음에 상처가 생겼을 때도 가정을 통해서 위로해 주십니다. 주님을 모신 가정은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과 이해로 감싸주는 곳입니다.

주님을 모신 가정은 고난의 시절에 피난처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을 모심으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온 가족이 화목함으로 행복한 가정, 창조적인 가정, 안식처가 되고 피난처가 되는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994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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