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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식 사랑이 뭐길래 (창 27:1-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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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있는 가정치고 시끄럽지 않은 가정이 없습니다. 때로는 아이들이 장난하면서 시끄럽게 하고 때로는 아이의 행동 때문에 부모가 큰 소리 치느라 시끄럽습니다. 오늘 아침 자녀로 인해서 큰 소리 치지는 않았습니까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자녀 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들면 이런 말이 생겼겠습니까 그래서 신세대 부부들 중에는 부모의 자리를 거부하는 통크족이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통크족(tonk)이란 “two only no kid”의 첫 자를 딴 신조어로 부부만 함께 살고 아이를 두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잠14:4)

소로 인해서 구유가 지저분해지고 냄새 나는 곳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를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소가 있음으로 해서 얻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없으면 집안이 조용하겠지만 아이로 인하여 얻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첫 아기를 가지게 되었을 때 얼떨떨함도 있었지만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스럽게 대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부모야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아이만큼은 귀족의 자제처럼 애지중지하며 길렀습니다. 옷을 사도 가장 좋은 옷을 사려 했고, 장난감을 사도 그랬습니다. 다른 데 지출하는 것에는 인색했지만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만큼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기한 일이었지요.

얼러 주면 까르르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하루에도 수십 차례 얼러 주면서 덩달아 웃곤 했습니다. 자연히 아이로 인하여 집안에 웃음이 많아졌었습니다.

아이가 새로운 행동을 하나 할 때마다 얼마나 대견스러워했습니까! 도리도리 하며 짝자꿍을 하면 남편이든 이웃이든 붙잡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귀여웠던 아이가 요즘은 왜 그렇게 우리 생활의 안정을 깨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까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며 장사의 수중에 있는 화살 같아서 자식이 많은 자는 복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시127:3-5) 자식이 그렇게 되기는커녕 왜 갈수록 “원수”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은 소리 지름으로 혈압이 오르는 정도이지만 이대로 방치해 두면 훗날 자식 문제로 큰 충격을 받고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겪는 부모가 이 시대에 한두 명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삭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식한테 속았다는 것을 알고 크게 격분했습니다. 분을 이기지 못하여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화병으로 몸져 누웠을지도 모릅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33절)

이게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 집안의 내막을 살펴보면 자식 탓만 하고 그칠 일이 아닙니다. 문제 자식 뒤에 문제 부모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식을 탓하기에 앞서 부모가 반성해야 합니다.

이삭과 리브가 부부는 결혼하기 전부터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훌륭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 위에서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아버지를 밀치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맡길 정도로 순종했습니다. 아내를 맞이하는 면에 있어서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하는 대로 얼굴도 모른 채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는 남편으로서도 훌륭했습니다. 그는 한 아내만을 사랑했습니다. 창세기 26장 8절에는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았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밤 시간에 잠자리에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장면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왕궁의 창문을 통해서 보았으므로 낮 시간에 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이처럼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할 줄도 알았던 좋은 남편이었습니다. 아내가 19년 동안이나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구박하는 대신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신세대 남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훌륭한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낯선 나그네를 위하여 힘들게 길어온 물항아리를 내려서 물을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약대들을 위하여도 자진해서 물을 길어서 주었습니다. 그녀는 아담과 하와, 노아와 그의 가족의 뒤를 잇는 동물애호자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좇으려는 유혹을 가장 많이 받을 나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먼 길을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일급 주부였습니다.

이처럼 이들은 결혼한 후에도 서로에게 좋은 남편, 좋은 아내였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였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부모란 자식과의 관계에서 불려지는 이름인데 그들의 자식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쌍둥이 두 아들은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고 그들의 행실 또한 지극히 실망스런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들 가정의 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이들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몇 가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부는 중요한 자녀교육 원리 몇 가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들도 지나치기 쉬운 것이므로 우리가 이것들을 바로 이해하고 주의하면 우리의 자녀를 어릴 때부터 올바르게 키울 수 있을 것이며 이삭 가정의 비극이 우리 가정에서는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첫째, 부모가 자식을 편애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삭은 자신의 나이도 많고 눈도 어두워 장래를 기약할 수 없음을 알고 큰 아들 에서를 조용히 불러 그를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이 자리에 작은 아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이삭이 에서를 편애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장남을 최고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들은 쌍둥이였기 때문에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에서를 편애한 것은 장남이라는 이유보다도 그가 잡아온 사냥감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25:28)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부모가 자녀를 의도적으로 편애해서는 안됩니다. 부모의 편애는 자녀 교육의 큰 걸림돌입니다. 소외당하는 아이는 마음 속에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키워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것은 부모에게 충격을 주는 행동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얌전한 줄만 알았던 야곱이 비열하게 아버지를 속인 것 같이 말입니다. 부모가 똑같이 한 자식을 편애한다면 결과는 더 나빠질 것입니다.

1988년 3월 23일자 신문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었습니다.
부산남부경찰서는 23일 아버지를 흉기로 위협, 금품을 강취한 김모군을 특수강도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군은 용돈 마련을 위해 지난 15일 오전 1시쯤 안방으로 가 잠자고 있던 아버지를 깨워 흉기로 위협, 장농 속에 있던 현금 3백만원을 강취해 달아났다는 것이다. 김군은 또 지난 22일 자신의 잘못을 꾸짖은 아버지의 옆구리, 가슴을 때려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히기도 했다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 자식은 오래 전부터 부모로부터 소외감을 느껴왔지 않겠습니까

이삭의 가정은 아버지가 큰 아들을, 어머니가 작은 아들을 편애했습니다. 가정에서 이처럼 아이들을 놓고 편 가르기를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너는 누가 좋니 아빠가 좋니, 엄마가 좋니” 식의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냥 재미로 할 말이 못 됩니다. 아이들 마음 속에 부모 중 어느 한 편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나는 요즘 엄마만 좋아하는 것 같은 아이들에게 무기력하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어머니만 좋고 아버지는 좋지 않니”

아버지의 경우 아무래도 어머니에 비해서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이 적다 보니 돈으로 아이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장난감을 사 주고 용돈을 많이 주고 하는 것입니다. 맞벌이 부부도 아이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을 돈으로 보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결코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쁜 중에서도 틈틈이 아이들과 함께 하며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나누어야 아이들이 정서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결코 돈으로 보상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무조건 해 달란다고 해서 다 해 주는 부모를 훗날 고맙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가 성인이 된 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것이 아니므로 숱한 좌절을 맛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경우에는 편애라는 말이 안 어울릴지 모르지만 지나친 사랑을 쏟아 부으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버릇 없는 아이들,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교육현장에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삭이 처음부터 두 자식에게 골고루 복을 나누어주겠다는 생각을 가졌더라면 에서는 상당한 복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편애로 에서에게 몽땅 주려다가 가로채이자 에서에게 줄 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에서는 이 일로 동생을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려는 결심을 하는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삭의 잘못된 자식 사랑이 그 자식을 망쳐 놓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편애는 이와 똑같은 형태로는 아닐지라도 자식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 부모가 아이의 성향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모가 사랑만 가지고 자식을 바르게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건강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고 지혜롭게 키우기 위해서는 지혜를 배워야 하며 의롭게 키우기 위해서는 도덕과 법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아이를 양육하라고 가르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성경은 이삭이 지나쳤던 중요한 자녀교육 원리 하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25:27)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였지만 타고난 성향이 달랐습니다. 에서는 활동적이고 모험을 좋아했지만 야곱은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쌍둥이도 세대 차가 난다”는 말은 어제 오늘 생긴 말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그와 같은 뜻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이의 성향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한 아이가 다른 아이와 꼭 같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이 차가 없는 쌍둥이도 이처럼 성향이 서로 다른데 나이 차가 나는 두 아이가 같아지기를 기대한다면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는 왜 형처럼 못하니 너는 왜 동생처럼 못하니 너는 왜 아무처처럼 못하니” 하고 말합니다.

두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저는 이삭이 처음부터 야곱을 제쳐두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작은 아들도 큰 아들처럼 활동적이고 용맹스럽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두 아들이 함께 사냥하러 나가서 사냥감을 들고 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삭은 때때로 그를 변화시키려고 “너는 사내녀석이 돼 가지고 왜 그렇게 줏대 없이 엄마 치마폭에서만 노냐 밖에 나가서 뛰기도 해야지 마냥 샌님처럼 행동하기만 하냐” 하고 책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작은 아들에 대해서 포기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의 성향이 자기가 원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 연구가가 아이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4,500 가지의 소질이 있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독특한 존재로 만드셨음을 믿는다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종의 기원을 써서 진화론을 퍼뜨리는 데 공헌한 다윈을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아이의 성향과 관련해서 부모가 그 성향을 이해하고 이끌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예로 들기 위해서 언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화론자 찰스 다윈은 어릴 적에 머리가 트이지 않은 지진아였다. 의사인 아버지는 두 살 아래의 누이와 바꿔 태어날 것을 잘못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한다. 다만 어릴 적부터 조개껍데기 우표 돌멩이 등 무엇이건 주워 모으는데만 골몰했다. 의사나 목사로 키우고 싶은 아버지는 이 수집품을 다윈이 보는 앞에서 여러 번 내다버리고 태우기도 했다.
그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이 수집 집념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얼굴에 죽은 깨가 많고 별로 예쁘지 않은 이웃 소녀 때문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수집을 도와주기도 했고 꾸지람을 듣고 울고 있으면 치마로 눈물을 닦아주던, 그를 알아준 유일한 존재요 그 작은 알아줌이 진화론의 기반이 됐다고 회고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하지 못해 자주 무력감에 빠지는 아이를 책망하며 그의 자존심을 여지 없이 짓밟지 말고 이 소녀가 했던 것 같이 그의 성향을 이해하며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잘한 것에는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아버지가 사랑을 표시하는 것도 그렇고 칭찬을 하는 것도 그렇고 어머니보다 못합니다. 만일 아버지가 칭찬하는 것에 아직 익숙하지 않다면 어머니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칭찬할 때 아버지를 곁에 있도록 하십시오. 딸에게 공부를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어머니가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신다. 그렇지요” 하면 됩니다. 아무리 무뚝뚝한 아버지라도 “그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부모가 알아주는 것은 상상 못할 정도의 영향력을 아이에게 미칠 것입니다.

셋째, 부모가 자녀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합니다.

이삭은 아내와 상의 없이 에서를 축복하려는 일을 은밀히 추진했습니다. 우연히 남편이 하는 말을 엿들은 리브가도 은밀히 그 계획을 바꿔놓으려 했습니다. 이삭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리브가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남편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남편과 대면하여 그 문제를 논의하고 두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일이 처리되도록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녀 문제는 부부가 서로 경쟁하며 어느 한 쪽의 뜻을 관철하는 방향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종종 이런 일이 부부싸움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습니까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처럼 우리 아이도 학원 교습을 받게 하자고 하고 아버지는 우리 형편에 안된다고 고집하다가 충돌합니다. 징계 문제도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하여 버릇을 고치겠다고 밤 늦게까지 잠을 재우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에게 그렇게까지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자기 하는 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참견한다고 언성을 높이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가 자녀를 훈계하고 나무라면 어머니가 훈계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못마땅하게 여기고, 어머니가 책망할 때는 그 반대로 아버지가 뭐라고 합니다. 그것도 아이들이 보고 듣는 앞에서 그렇게 합니다. 이러니 아이는 징계하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기를 부당하게 대한다고 여기며 속으로 반발심을 키워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징계할 때는 어머니가 옆에서 왈가왈가하지 말고 어머니가 징계할 때는 아버지가 왈가왈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징계하는 쪽에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부모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이에게 사과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심한 징계가 필요한 경우에는 아버지가 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체적으로 아버지가 가정에서 엄하게 행동하므로 아버지가 심하게 징계하더라도 자녀는 별로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징계라도 어머니가 한다면 훨씬 더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어머니가 해야 할 상황이라면 어머니의 따스함을 잃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아이가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알고 있는데도 아버지가 알면 혼날까봐 감추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자녀 문제는 부부가 함께 논의하며 공감대가 형성된 가운데 처리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주는 자녀의 충고

1. 제손은 아직도 작아요. 그러니 이부자리를 갤 때나 그림을 그릴 때 또는 공을 던질 때에 완전하게 해 낼 것을 기대하지는 마세요.

2. 제 눈은 엄마 아빠가 보신 것 같은 세상을 다 보지 못했어요. 불필요한 간섭 없이 제 수준에서 세상을 탐구해 볼 수 있게 해주세요.

3. 집안에는 늘 하실 일이 많으시겠지만요 제가 이렇게 꼬마로 있는 기간은 얼마 안된다구요. 그러니까 바쁘시더라도 시간을 내주셔서 제게 이 놀라운 세상에 대해 설명을 좀 해주세요.

4. 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한 선물이랍니다. 제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가르쳐 주시고, 자애로운 태도로 절 훈육시켜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대로 저를 소중히 여겨 주세요.

5. 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자유를 주세요. 실패를 허용해 주세요. 그래야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지요. 그때 저는 어른이 되면 인생이 저에게 요구하는 결단을 내릴 준비를 하게 될 거에요. 6. 제가 해 놓은 일을 엉터리 취급하지는 마세요. 그러면 저는 제 노력이 엄마, 아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힘 들다는 건 알지만 제발 저를 형이나 누나하고 비교하지 마세요.

7. 규칙적으로 저를 교회학교와 교회에 데려가시는 좋은 본을 보여주세요. 저는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것이 즐거워요.
-< 죠오지 나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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