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 52:13-53:12)

첨부 1


기독교인들은 왜 그렇게 자주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언급하는가 다른 이야기들도 많이 있는데 왜 유쾌하지도 않은 고통과 죽음 이야기를 하는가 간청을 뿌리칠 수 없어 어렵사리 교회에 나왔는데 예배시간에 부르는 찬송도 그런 내용 일색이지 않는가

불신자들이 교인들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이유들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찬송가를 뒤적이다 보면 그런 내용이 쉽게 눈에 뜨입니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등등. 여러분들은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 성도 중에서도 불신자들의 불만에 대해서 공감하는 분은 안 계신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관련된 사항을 다루고 있는데 이와 같은 불만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의 죄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과정에서 겪으신 수모와 폭행을 포함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겪으신 모든 것을 수난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분의 수난은 그분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처럼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할 어떠한 행동도 하시지 않았고 어떠한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의 권력 암투에 의해서 희생된 희생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수난이 그 시대의 대중의 무지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53장 4,5절을 보아 주십시오.
이 구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질고(griefs) 때문에 수난당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슬픔(sorrows)을 떠맡으시기 위하여 수난당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가시면류관에 찔리시고 창에 찔리신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채찍에 살점이 뜯기며 터지는 고난을 당한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분의 수난은 나의 허물과 죄 때문이며 당신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이로 인해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과 질병과 형벌을 우리 대신에 받으신 것입니다.

이 시간 당신에게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이 이야기를 또 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수난이 당신과 관계된 것이며 당신이 알아야 할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서는 안될 것을 하는 것이며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6절에서는 양이 목자가 이끄는 길로 가지 아니하고 곁길로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생명의 길을 버리고 우리의 고집을 따라 우리 좋은 대로 곁길로 나간 것입니다. 우리 중 어느 한 사람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같거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 수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절)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질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도 있게 되고 경제적인 안정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좋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자꾸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하나님의 공의와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본디 선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죄의 성품(죄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낸 것이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십자가 형이라는 형벌을 고안해낼 수 있겠습니까

나찌가 수 많은 사람들을 독가스로 살해했습니다.
북한군이 비무장지대에서 유엔군을 도끼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과거 지존파의 행동을 흉내내던 사람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는 한 여인을 납치하여 생매장하기도 했습니다.
이것들이 소름끼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십자가 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손목과 발목에 박힌 못에 온 몸의 체중을 두며 숨이 끊어지기까지 고통을 받게 하는 십자가 형은 인류가 생각해낸 그 어느 고문보다도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율법에 흠이 없이 행한 사람을 이처럼 가장 잔인하고 악독한 형벌에 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수난은 인간의 죄성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응징도 보여줍니다.

죄는 반드시 응징됩니다. 창조주이시며 천지의 주재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고 의로운 성품 때문에 죄를 결코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로마서 6장 23절에 선언되어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히브리서 9장 27절에 선언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그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신 이상 하나님의 형벌을 피하실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육체를 쥐어짜는 고통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그것을 훨씬 더 능가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정신적인 고통을 맛보며 절규해야 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죄가 발견될 때 이처럼 단호히 심판하셨습니다. 사실이 이러한데 과연 누가 죄 짓는 것을 가볍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죄 짓는 것이 두려운 일인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다.

10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다른 면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생각과 계획은 이미 창세 전부터 가지셨다고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벧전1:20)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함을 찬양하십시오.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죄로부터 구원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죄를 처리하는 방법을 일찍부터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된 소식 즉 복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죄에 대한 응징 수단으로 사람의 죄를 죄 없는 동물에 전가시키고 그 동물을 대신 죽이는 것을 그분의 은혜로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생에 걸쳐 죄를 많이 짓고 있기 때문에 한 두 마리의 동물 희생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동물이 사람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합니다. 누가 값 비싼 물건을 값 싼 것과 바꾸려고 하겠습니까

죄 있는 사람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죄 없는 사람이 나서야 할 것입니다. 죄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의 죄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값까지 치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 없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죄인임을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사람의 죄를 심판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죄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우신 계획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자 하나님께서 완전한 사람이 되어 죄 없는 생애를 사시고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산품이 아무리 비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만들어내는 기계설비보다 귀중하지는 않습니다. 기계설비가 아무리 귀중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설계하고 만들어낸 사람보다 기중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존귀하다 하더라도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십자가 수난에 로마 총독 빌라도가 동원되었고 유대인 제사장들이 동원되었고 유대인들과 로마군인들이 동원되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되어졌을 뿐입니다.

오순절에 한 베드로의 설교에 이 진리가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2:23)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같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27,28)

본문의 12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셨음을 가르쳐줍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떠맡으시고 자기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버리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죄가 두려운 것임을 다시 한번 절감합시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게 해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신 고난을 묵상하며 그분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사랑으로 짊어집시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마냥 감격합시다.

스펄젼 목사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어느 날 스펄젼 목사님이 울고 있는 것을 사모님이 보시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어요"
목사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오늘은 말이야, 내가 십자가를 생각해도 감동이 없어. 슬프게도 말이야."
신앙의 최대 위기는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