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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새로운 세상 (사 65:17-25, 고전 15:19-26, 요 20:1-18)

첨부 1


‘밤 안개’로 유명한 대중가요 가수 ‘현 미’씨가, 북한의 여동생을 48년만에 만나는 장면을, TV를 통하여 볼 수가 있었습니다.
현미 씨의 언니 한 분은 남한에 사는데, 그분은, 동생을 만나게 된다는 소식에, 그 동안 얼마나 울었던지, 위아래 눈꺼풀이 퉁퉁 부어서 눈을 뜰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그토록 많이 울게 된 것은, 동생을 48년만에 만나게 된 기쁨보다, 그 동안 원치 않게 헤어져 살아야만 했던 ‘통한(痛恨)의 눈물’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번에는, 북한에 있는 두 여동생 중, 한 사람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상봉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목놓아 울었습니다. 북한에서 온 여동생과 남한에서 간 가족들은 서로 부등켜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24 시간 후에는 다시 헤어져야만 했기에, 더욱 가슴아파서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환난과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래서, 눈물도 많이 흘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바는, 늘 기쁘게 사는 것이지만, 오히려 우리 인생은 기쁨보다는 슬픈 일을 더 많이 겪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우리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겪는 아픔은, 대부분 내가 지은 죄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아픔을 겪고, 다른 사람이 행하는 악행으로 인하여, 내가 또한 아픔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 사는 사회가 더욱 복잡한 것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아주 너그러운 반면에, 다른 사람이 행한 잘못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심판하거나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픔과 슬픔은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많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 인간을 죄의 굴레에서 구원하시고자, 예수께서 겪으신 죽음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짓고서도, 그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기를 잘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잘못을 해서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지은 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 ‘다른 사람’속에는, 우리도 포함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은 자도 살리던 사람이, 어째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하는 비아냥거림과 조롱까지 받으면서도, 주님은 십자가를 달게 지셨습니다.
우리가 볼 때, 예수님은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 잘못도 없건만, ‘왜, 그냥 억울하게 죽으셨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의(義)를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를 믿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시는 일이었기에, 그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가 옳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증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거짓된 의(義)’를 내세우기 위하여, 예수께 억울한 누명을 씌워,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억울한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낮춘, 예수님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올바른 인간상(人間像)’의 회복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을 때에, 인간은, 희생과 헌신을 알았고, 사랑하며 용서할 줄 아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은, 평화와 기쁨이 충만하고, 행복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활’입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께서, 우리가 본받고 따라가야 할, 인간 본래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를 본받아서 새로운 모습으로 살면 부활의 생명을 얻고, 옛 모습 그대로 살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부활의 삶이란, 교만함과 이기심을 극복하고, 타인의 허물까지도 내 잘못으로 여겨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만과 이기심’이라고 하는, ‘죽음의 세력’ 때문에 모든 불행이 발생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서 ‘환난과 고통’의 죽음을 당합니다. 반면에,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면, 인간성이 회복되어, 부활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변화되어,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이사야가 말하기를, 『주님의 날에는, 환난과 고통이 사라지고,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새 세상을 만들어가게 될 것(65:17-18)』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세상에서는 『헛수고만 하거나 고생만 하는 일이 전혀 없으며, 하늘의 복을 받은 백성들이 슬픔을 모르고 살아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그런데, 바로 우리가, 이런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이 ‘부활의 삶’을 살아갈 때에, 이런 세상은 반드시 오리라 믿습니다.
물론, 이런 부활의 삶을 살아가려면,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도 받아들이고, 또한 그 의미도 깊이 받아들여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세상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부활의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는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세상 사람들처럼,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며 시기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1.‘허무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님과 그 교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닙니다. 혹여, MBC의 보도가 100% 거짓말일지라도,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런 자세로 대응해서는 안되리라 믿습니다.
저 자신도, 그런 상황에 처했을 경우, 믿음의 사람으로서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줄 만한, 그런 ‘성숙한 신앙의 인격자’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금란교회가 지금 취하고 있는 태도는, 부활을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억울하면, 주께서 겪으신 것보다 더 억울할까요 상처를 입었다면, 주님보다 더 큰 고통을 당했을까요 많은 돈을 들여서 신문 광고를 내고, 교인들이 방송국에 몰려가서 데모를 하는 것은, 결코 신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더 많이 가리고 있습니다.
주께서 힘을 사용하셨다면,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권위를 내세웠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다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힘과 권위를 사용치 않았습니다. 바보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①우리는 지금, ‘죽음의 세력’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죽음은 ‘인간성 상실’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성을 빼앗아 가는 것이, 바로 ‘교만한 마음’입니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다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가인이 동생한테 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만 그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한없이 낮아지는 겸손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예수를 끌어올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다가, 그만 인간성을 잃고 있습니다. 한없이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함이, 바로 ‘죽음의 세력’입니다. 이 죽음의 세력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까닭에, 우리는 환난과 고통을 당하며, 허무와 좌절을 겪고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뒤떨어질 수 없다고는 생각과, 억울하게 당하고만 살 수 없다는 교만함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합니다. 금란교회 교인들이 방송국에 쳐들어간 것은, 세계 감리교회에서 제일 큰 교회인 금란교회가 어찌 당하고만 있을 수 있느냐고 하는, 지극히 세상적인 생각 때문에, 저지른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좌절과 더 큰 고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전에, 인간이 먼저 앞서갈 경우, 당연히 맛보게 되는 아픔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많은 손해와 아픔을 안겨줍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것은, ‘십자가 후에 부활’이 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주께서는 『내가 죽은 다음에 반드시 다시 살아나리라(마20:1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그들은 부끄러운 행동을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②정말 부끄럽고도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철저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때로는 부활 신앙을 망각한 나머지, 부끄러운 행동을 취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조차,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주께로부터 그 ‘능력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실수를 했으니, 오늘 우리처럼 미약한 인간이 어찌 부끄러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큰소리 칠 자격이 없습니다. 무슨 자랑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자랑을 할라치면, 상대방은 아주 재빠르게 우리의 허물을 찾아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랑도 버리고 교만함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자랑하려는 마음과 교만한 마음은, 우리를 비참한 지경으로 빠뜨리는, 지상 최대의 원수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 아닌,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 최후의 승리를 차지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죽음의 길을 택합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사는,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2.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송명희 시인이 쓴 시(詩)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주님이 맞으신 채찍의 수는 내 병든 숫자이며, 주님이 쓰셨던 가시관의 가시 하나 하나는 내 허물 그 자체였습니다.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정죄(定罪)는, 나에게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무게는 내 죄의 무거움이었고,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의 크기는 내 모든 죄였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아픔은 내가 당할 고통이며, 주님이 담당하신 죽음은 나의 죽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누구며, 내가 받을 징벌이 무엇인지를, 나는 십자가의 진리로써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미워하였지만, 주님은 삼일만에 나를 안아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송명희 시인처럼, 그런 마음과 태도를 갖고 산다면,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를 지켜 살아야 합니다.
①예수의 부활을 믿고, 그 기쁨에 동참해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부활의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을 믿고서, 나를 괴롭히는 이웃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때에 맛보는 기쁨은, 상대를 굴복시킨 것보다 몇 갑절 더 크다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겪게 되는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많이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②부활의 소망을 갖고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진실하게 나를 섬기는 사람’을 보고, 나는 기뻐할 것이다(사65:19).』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행복을 가득 채워주겠다(18)』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통곡하며 부르짖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복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부활의 소망을 믿고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이, 그런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다는 말은, 주께서 일러주신 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런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③‘허무와 죽음의 세상’을 깨뜨리고,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허무와 죽음’은,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죄의 결과입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일은, 바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히 이웃을 섬겨 살면, 살맛 나는 세상을 이뤄갈 수 있습니다. 저마다 잘났다고 서로 헐뜯으면,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새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머지않아, 그곳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부활의 참뜻을 바로 깨달아서, 그대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가득히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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