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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을 이기는 길 (약 01:1-12)

첨부 1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 동안 부족한 사람이 담낭에 염증이 생겨서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셔서 수술이 아주 잘 되었고 회복도 비교적 빨리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에 대하여 그저 감사 할 것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내려오는 말 중에 사람이 좀 변변치 못하게 굴면 “쓸개 빠진 놈 같다”는 말을 합니다. 제가 바로 그 쓸개 빠진 놈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뭐 좀 잘못하는 것 있으면 “쓸개가 없으니까 저러지.”하고 널리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서 1장을 읽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야고보서를 계속 읽어 내려가면서 야고보서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이 편지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유대인들에게 쓴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유대인이라 하지 않고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쓴 것입니다.
‘흩어진다’는 말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흩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사랑하고 교제하며 예루살렘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세계로 흩어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흩으셨습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보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했습니다.
그러나 흩어져 있는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여기 ‘흩어진다’라는 헬라어 Diaspora의 뜻은 ‘흩어진 씨’라는 개념이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흩어지는 것은 흩어져서 씨를 뿌려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싹이 나고 열매 맺어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쓴 편지를 보면 편지마다 그 목적이 다릅니다. 가령 로마에서는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를 몹시 원했는데 그가 방문하기 전에 신앙의 교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영적으로 제일 문제가 많던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신앙을 교정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그러면 야고보서는 왜 썼습니까
한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자마자 주께서 먼저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인격적의 성숙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로 인해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복잡한 문제들에 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야고보서에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말 중에 하나가 ‘온전’이란 말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말하자면 어린아이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지를 못합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혀를 절제하지 못합니다. 싸움과 시기가 많습니다. 물질적입니다.
오늘 야고보서 1장에서 시험을 만나거든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가 하는데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말할 수 없는 박해와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서 ‘여기라’는 말은 시험을 기쁨으로 환영하는 태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은 시험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 와 대조적인 말이 아닙니까 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시험을 만나거든 피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이 없어지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기쁘게 맞이하고 직면하라고 했습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시련과 환난과 곤고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기도하고 기대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도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온갖 시련과 고통이 똑같이 찾아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해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면서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환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평안은 조건과 상황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절대적인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약속은 환난을 제거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의 승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환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이 받는 이 환난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계속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이 환난이 우리를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고, 연단하며,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영광스러운 주님의 형상을 닮은 모습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십니까

1. 우리가 시험을 만나면 자신의 실력을 점검하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하고 약한 면을 시험을 치는 동안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될 것과 보다 철저한 교육과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험이 끝나고 나면 나 자신이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향상된 자신의 실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시험이 갈수록 어려워져 갑니다. 그의 생애에서 절정을 이루는 시험, 다시 말하면 100세에 얻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의 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 후에” 혹은 “이 모든 것 후에”, 이 표현은 아브라함이 전에 경험했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시련을 통과한 후에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이 어떻습니까
국민학교 2학년 학생에게 고등학생에게 내는 시험문제를 내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그 수준에 맞는 시험을 줍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도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또 전진했습니다. 그래서 종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2. 시험을 만나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삶 속에서 역사하실 때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성취하는 무대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우리를 훈련시키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가운데 주어지는 시험은 우리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주신 말씀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이라고 했는데 여기 ‘여러 가지’라는 말이 아주 의미가 깊습니다. 시험을 한두 가지의 모습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여러 가지 색깔입니다. 이 말은 앞으로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만들어 낼 작품이 더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들이 엮어져서 더 영광스럽고 더 아름답고 더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우리를 통하여 만들어 질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많은 재료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재료가 곧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이 여러 가지 재료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우리 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뜻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을 때 체념해 버리는 것은 위대한 작품을 만들려고 일에 착수했던 사람이 중도에 그 일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아직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바울의 생애를 생각할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바울은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앞만 향해 계속 전진하는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망각이란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뜻은 과거에 의해 현재가 영향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얼머나 많은 그리스도인을 죽였습니까 그가 과거를 생각하면 도저히 앞을 향해 나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순간 그의 모든 죄가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옮겨졌습니다.
주께서 그 모든 것을 기억도 안하시고 용서하시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바울은 바울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부르심의 상급을 위해 계속 전진한 것입니다. 그가 고령이 되어 인생의 황혼기에 서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내 속사람는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신앙 중심이 인격에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인격을 형성하느냐에 모든 가치를 두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인생 행복의 가치관을 안락한 생활과 명예, 지위를 얻는 것에 둔다면 우리가 당하는 시험들은 불행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가치관을 물질적인 것이나 외향적인 삶의 조건이나 환경에 두지 않고 주님 앞에 아름다운 인격으로 서는 것이라고 하면 시험은 저주가 아니라 나를 인격자로 만들어 가기 위한 도전이란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험이 올 때 두 팔을 벌리고 기쁨으로 환영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복음성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습니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린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라’는 말은 ‘평가한다’는 말입니다. 굉장한 가치를 지닌 놀라운 것으로 평가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큰 시험이 찾아올 때 어떤 자세로 시험을 평가하십니까 욥은 시험을 당할 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했습니다.
욥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난의 현장에서 한 말입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을 비웃고 놀려대는 친구들에게 “너희들은 몰라 하나님만이 나를 아셔, 그분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나는 정금같이 되어 나올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그가 당하는 환난과 시련에 그의 인격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빛나고 아름다운 정금처럼 되어 주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욥이었기 때문에 용기 있는 자세로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이 시험을 통해서 저를 어떻게 만드시기를 원하십니까”
이런 자세로 시험을 만나는 사람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시험은 오히려 위대한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험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습니까 시험에 대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했습니다.
이 믿음이 시련은 반드시 인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인내의 아름다운 덕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3절 이하에도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환난이 가져다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유익은 인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인내는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한 부분입니다.
이 인내라는 것은 단순히 주어진 상황을 감수하는 수동적인 적응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란 우리 삶의 능동적 태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 뭐랬어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 혼자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간의 책임있는 응답을 통해서 신앙생활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이 주권적인 사역에 대한 응답의 책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이 과제를 이루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부르심과 역사하심 앞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라는 인간의 책임도 강조되어야만 합니다.
이 문제를 빌립보서에서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 받은 후의 삶의 차원, 다시 말하면 성화의 차원에서 본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종류의 사람으로 되어져 가느냐로 보는 것이 성화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말씀하면서 빌립보서 2장 13절에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심으로 인간에게만 책임을 부여하신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 책임을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지우고 기대하셨다면 도저히 우리는 감당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14절 이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인간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온전한 인격으로 자신을 성숙시킬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룬다고 말했지만 인내를 통해서 몇 가지 이루는 것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기 온전하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 말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뜻을 가진 말은 성숙이란 말입니다. 인내함으로 우리의 인격과 신앙이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는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비하여’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어떤 제물을 드릴 때 그 제물에 상처가 없고 자질이 우수하여 잘 구비되었다고 말할 때 사용한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에 흠이 없고 합당한 제물로 구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셔서 인내의 덕목을 갖도록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 할 수 있는 인격을 말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시련과 인내를 허락하십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사역하시는 것은 성화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 내시는 사건이 바로 봉사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고 영광받으시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들을 주시기 전에 25년간 아브라함을 훈련시키고 연단시키셨습니다. 요셉을 애굽의 통치자로 쓰시기 위해서 13년 동안 온갖 시험을 통해 훈련시키셨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쓰임 받기 위해서 80년 동안 시련과 연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인격으로 세워 영광스러운 그분의 뜻과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삶에 시련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시련과 역경을 만날 때 어떻게 합니까 그 대답이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합니까
많은 사람이 시험을 만나면 “이 시험을 물리쳐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런 때 지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 지혜란 말은 지식과 다릅니다. 어떤 이는 “지식은 분석이고 지혜는 종합이다”라고 했습니다. 지식은 분석해서 알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것을 모아 전체적으로 어떻게 삶 가운데 적용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고민은, 지식은 많지만 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지혜란 지식을 활용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 전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부딪치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승리의 삶을 영위할 것인가를 위해 중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이 지혜를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후히 주신다”는 말은 넉넉히 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주저하지 말고 귀찮게 생각지 아니하시고 주신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졸라대도 귀찮다 아니하시고 오히려 구하려고 격려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사랑에 감격스럽습니다.
믿음으로 구합시다. 넘치는 것으로 우리에게 안겨 주어 우리에게 임한 시험이 오히려 큰 축복의 기회가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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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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