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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산적으로 사는 길 (약 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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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동안 야고보서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1장에서는 시련과 유혹에서 승리 할 수 있어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참 믿음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생각하게 되는 3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기독교는 이론의 종교가 아니라 실천의 종교입니다. 사랑도 말이 아니라 행위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실제 우리 생활에서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행동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면 행함이 없는 사람일수록 말을 많이 하고 생각하는 것이 불순합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혀를 지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상을 이야기 하고, 평범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고, 협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흔히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 하기가 쉽고 칭찬하는 말보다는 험담하기가 쉽습니다. 또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좋은 말 할 때는 별로 흥미 없이 듣고 있다가도 험담을 하게 되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신바람이 납니다.
정말 다루기 힘든 것이 우리의 혀입니다.
이미 생각한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1장 26절에도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면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2장 12절에서는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님이 되지 말라” 했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의 열망 중에 하나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 지도자를 대단히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랍비가 되는 것이 유대교도들의 선망이었고 지도자들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유대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유대교인으로 있을 때 그 지도자를 존경한 것처럼 교회의 지도자를 존경했습니다. 존경심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초대교회 안에 많은 갈등과 문제를 빚어내게 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거룩해야 할 교회 안에서 세력 다툼과 자리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은 어떻습니까 아니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지도자가 얼마나 귀한 자리입니까 그런데 이 자리를 차지 하려고 교회 안에 얼마나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제 가을이 되면 각 교단마다 총회 혹은 연회가 모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성총회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연구하고 의논하고 토론하고 결정해서 선교전략을 모색하고 추진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도와주고 신앙의 바른 노선을 걷기 위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위해 모이는 총회가 본연의 의무는 잊어버리고 지도자 선거에 최대의 관심사가 집중됩니다. 그래서 이 선거를 위해서 요사이 국회의원 선거 때도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회가 정신차려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각성해야 할 때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미국 프린스턴에서 공부할 때 들은 이야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총장 일을 보시던 매카이 박사가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임으로 그 당시 학감으로 계시던 홈릭하우젠 박사를 모시려 했더니 자기는 나이가 50이 넘었으니 총장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사양하면서 총장은 적어도 40대에 취임해서 10년은 학교에 대해서 익혀야 하고 10년은 일해야 하고 나머지 10년은 정리 결산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추천된 분이 맥카이 박사의 사위, 세계적인 신약학 교수 메찌거 박사였는데 그분은 “나는 학자 생활이 좋지 총장이 되면 학자 생활 할 수 없다”고 사양했습니다. 그 다음이 한국에 와서 선교사로 오래 계시며 신학교에서 교수하시던 사무엘 마펫 박사가 추천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어서 수락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펫 박사님이 상처를 하고 재혼했었는데 그 부인더러 “미안해요. 내가 전 부인하고 이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봉사하겠다고 서약한 것이 있는데 이제 어떻게 천국에 가서 그 서약을 해약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결국 마펫 박사도 사양했습니다.
나중에 저 미국 남쪽 오스틴에서 40대 초반의 학자, 프린스턴 출신이 아닌 맥코드 박사를 모시게 되었고 그가 30년 가까이 학교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많은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생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커지는 것이고 책임이 크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심판도 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되는 것은 특권입니다. 위대한 교회는 선생이 책임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배하려는 사람. 얼굴 나타내려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훌륭한 교회가 아니라 겸허한 자세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훌륭한 교회입니다. 제 기도의 제목은 우리 갈보리 교회가 이런 훌륭한 교회, 이런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지도자들이 말에 실수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말을 많이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다 보면 그 만큼 말에 실수를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말의 실수는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생애 속에서도 치명적인 말의 실수를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말에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사람은 그 만큼 성숙된 인격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온몸을 굴레씌운다고 했습니다. 이 굴레는 재갈과 함께 말을 통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길들지 않은 야생마라고 하더라도 재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우면 맥을 못쓰고 길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생마에게 재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울 때까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3절에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을 먹여 온몸을 어거한다”고 했습니다.
4절에는 뭐랬어요 “또 배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다 위를 떠가는 그렇게 큰 배가 작은 키 하나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굴레는 말을 어거하며, 키는 배를 조종하듯이 혀는 우리의 전적인 행동을 다스리며 지배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온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혀를 지배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가장 큰 실패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과학이 놀랄 정도로 발달하고 있지만 인간의 혀를 지배하는 과학은 발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자기의 혀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시편 141편 3-4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 진주를 먹지 말게 하소서”했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입에 파숫군을 세워 주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켜 주세요. 필요 없는 말, 무익한 말, 남에게 손해 되는 말, 헐뜯는 말, 파괴적인 말하지 않게 해주세요.”
세상에서는 도움이 되는 것만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비행기나 기차나 자동차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빠른 교통 수단입니다. 그러나 일단 사고가 나면 얼마나 피해가 큽니까 전기가 얼마나 우리 생활에 도움을 줍니까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전기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불이 얼마나 우리 생활에 필요합니까. 그러나 잘못 다루면 불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혀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 소통으로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게 되는 것은 인가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 동물의 세계에서 볼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잠언 기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잠언 18장 21절에 보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했습니다. 우리의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죽음과 삶을 좌우합니다. 혀의 위력이 대단하므로 잘 다스리지 아니하면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파괴력을 가지고 있어요
오늘 주신 말씀 5절 이하를 보세요.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분, 공장이나 집에 불이 난 것을 보셨어요 그 파괴력은 엄청납니다. 우리의 혀가 이처럼 큰 불과 같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길이 퍼질 때 그것을 다스리기 어렵듯이 우리의 혀를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화재가 나면 비참하게 되는 것처럼 혀는 그와 같은 재앙과 상처와 비극을 초래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쟁이가 없어지면 평화가 옵니다.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불에 타는 나무를 더 놓는 것처럼 다툼을 좋아하는 자마다 시비를 일으키고 그들은 이 불처럼 무서운 파괴력을 주위에 확산시킵니다.
전에 모간 블레이크(Morgan Blake)란 사람이 미국 애틀랜타 신문에 이런 기사를 썼습니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나는 죽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한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파괴한다. 나는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닌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도 내게는 무력하며 아무리 정갈한 사람도 내게는 별게 아니다. 나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경멸한다. 나는 나를 통해 희생된 자를 전 역사와 전세계에 갖고 있다. 나는 바다의 모래보다 더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다. 내 이름은 중상 모략입니다.”
우리의 혀가 가져오는 중상 모략의 파괴력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어느 교회 성도가 그 교회 목사에 대해서 입에 담기 어려운 정도의 말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만나서 또는 전화로 헐뜯었습니다. 아무 근거도 없는 것 가지고 말하자면 중상 모략을 했습니다. 목사도 그 아무개가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퍼뜨리고 있다는 소식을 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목사가 교인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해명할 수 있습니까 그저 마음만 아파하고 있는데 그 부인이 찾아와서 목사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어요. 제가 시험에 들었었어요. 그래서 목사님의 인격에 타격을 주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때 목사님은 “그러세요, 그러면 오리 털 베갯속의 오리 털을 동리로 다니며 다 뿌리세요.” “네 알았습니다.” 그 부인은 동리로 다니면서 오리 털을 다 뿌리고 돌아왔습니다. “목사님, 오리 털을 다 뿌렸어요.” “그렇습니까 수고스러운 대로 그 오리 털을 그 베갯속에 다 모아 담으세요.” 한참 후에 돌아온 이 부인이 “목사님 오리 털이 이미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때 목사님이 “자매님, 자매님을 제가 용서하는 것은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쏟아 버린 말을 주워 담을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도둑질은 아무리 해도 다시 갖다 줄 수 있어요. 그러나 남을 중상 모략한 말은 되돌려 줄 수가 없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번 한 말은 다시 회수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신상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생애에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혀의 영향력이 이처럼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신앙생활에 승리 할 수 있습니다.
6절 말씀에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의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온갖 불의는 혀로부터 출발한다는 말입니다. 이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 인생 전체를 망가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혀로 한 사람을 쓰러지게 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혀가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13절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덤에서 썩은 냄새를 내는 것처럼 우리는 혀를 가지고 얼마나 더러운 냄새를 토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지는 않습니까 저주의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청년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주의 성전에 들어가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죄인 된 자신의 모습에서, 더구나 자기의 혀가 범죄한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이 시간이 우리도 이사야처럼 우리의 혀가 범한 죄를 발견하고 씻음 받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7절 말씀에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짐승은 어느 정도 까지는 길들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써커스에서 짐승들이 재롱을 부리는 것을 보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사나운 짐승을 잘 길들여 놓으면 효용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들은 파괴적이고 난폭한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짐승을 길들이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혀는 이 짐승들보다도 더 길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잠언 12장 18절에 보면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고 했습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는 다른 사람이 한 말 때문에 상처받아 보신 분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던진 말 한마디가 비수 처럼 우리의 가슴을 찔러서 상처를 남길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악인의 혀가 그와 같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상처를 덮어 싸매는 양약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혀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까 아니면 상처를 싸매주고 위로하는 지혜로운 자의 혀입니까 끝으로 9절 이하에 보면 축복을 주는 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샘과 나무가 있는데 샘과 나무는 아름답고 신선한 것입니다. 샘은 우리에게 마실 물을 줍니다. 성경에는 샘과 언어를 연관지어 말씀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잠언 10장 11절에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고 했습니다. 샘에서 생수가 솟아나는 것처럼 의인의 입에서는 생명의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생명의 말이 나와 다른 사람에게 생기를 주고 시원함과 기쁨을 안겨주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13장 14절을 보세요.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라 사람으로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 말씀 듣고 사람이 주님께로 나오면 우리의 입술은 생명의 샘처럼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 모두가 생명 샘 되어 여러분을 통해서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는 심령이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야고보 기자는 혀를 나무에 비교하면서 한 나무가 두 가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한 혀를 가지고 복을 비는 말과 저주하는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샘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말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9절 말씀 보세요.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아무리 내가 볼 때 믿게 보이고 싫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되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작품을 저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실수가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여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입은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그 입으로 사람을 저주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4절에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한 나무가 두 가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한 우물에서 두 가지 특성의 물이 나올 수 없듯이 우리 속에서도 선과 악이 함께 나올 수 없습니다. 만일에 두 가지가 함께 나온다면 우리 속에 굉장한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8절에 보면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하지 아니하고”했습니다. 교회에서 이랬다 저랬다 말하는 사람 때문에 분위기가 깨어지고 영성이 파괴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혀는 파괴력과 생산력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혀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형제를 격려하면 생산적이 되고, 다른사람의 인격을 허는 일을 하면 파괴적이 됩니다. 주님은 곤욕을 당해 괴로울 때도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침묵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덕을 세우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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