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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받을 때 (약 05: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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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주일 아침마다 야고보서를 차례로 읽어 내려가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당합니다. 아무도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것이 고난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고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난, 정신적인 고난, 민족적인 고난, 세계적인 천재지변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이나 이 방송을 들으시는 여러분 중에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지 당하지 않으시는 분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날이 있습니다. 개인 생활에도 고난의 날이 있습니다. 민족 역사 속에서도 고난의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말했습니다. 고난의 날에 할 일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봉사 받기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이 찾아와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날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원망부터 합니다. 그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낙심합니다. 그것도 고난을 바로 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어떤 이는 고난을 당하면 절망하고, 반항하고, 자포자기하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
이것도 물론 고난을 당하면 아예 타락해 버리고 심지어 상상못할 흉악한 죄를 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태도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잘못된 태도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난의 날에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 당할 때 눈을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며 간절히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고난을 당할 때 잘 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만 부여된 특권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몇 절 안되지만 일곱 번이나 ‘기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고난을 만날 때 기도하는 것입니다.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바로 왕의 큰 핍박을 받아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고난에서부터 해방시키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고난 속에서부터 구원하여 주십니다. 전에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건절히 기도함으로 그 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병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낙심하지 말고 간절히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업에 실패하신 분이 계십니까 원망하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간절히 기도하세요. 재기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고난당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꼭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죄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고난입니다. 이럴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원망을 하거나 아니면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원망하는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 그 책임을 전가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1장 5절에서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그때 주님의 지혜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응답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두 가지 길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는 그 고난을 없애주십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을 그대로 두며 그 속에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어떤 길로 역사하시든지 주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족한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를 보면 주님은 우리를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옮겨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번째 길로 역사하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바울이 육체의 가시가 주는 고통이 너무 심해서 그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서 육체의 가시가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은 사도 바울에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약할 때 강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인생은 고난의 때가 있는가 하면 즐거움의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에 찬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나아갈 길을 보여주시는데 고난 중에서 벗어난 후 우리는 감사를 잊기 쉽습니다. 고난 중에 기도해야 할 일과 함께 잊지 말아야 할일은 즐거움 중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찬양하는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기도하라는 말은 계속헤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찬양도 그렇게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찬양은 즐거울 때 뿐만 아니라 고난 중에서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고난 중에서 기도하고 찬양했더니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욥기 35장 10절에 욥이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라고 증거했습니다.
둘째, 병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는 병자는 특별한 병자입니다. 죄 때문에 병든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치료를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모든 병자에게 다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한편 이 말씀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는데 모든 병이 다 죄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병은 죄 때문에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죄를 범한 것 때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 보면 죄 때문에 생기는 병이 있고 죄와 상관이 없는 병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그때 그 질문에 주님께서는 누구의 탓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질병이라고 대답하시고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죄하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하시고자 그에게 질병을 주신 것입니다.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는 주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병들었을 때 사람을 시켜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라고 전해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의 위대한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서 나사로에게 죽음을 허용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질병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죄 때문에 생기는 병도 있잇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계시는데 중풍병든 사람을 들것에 메고 왔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며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질병은 죄와 관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4절에 있는 병자는 죄 때문에 든 병입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의 의사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농어촌에서는 교역자가 반 의사 노릇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현대의 상황에서 적용시켜 말한다면 “병든 자가 있느냐 의사에게 갈 것이요”라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야고보는 장로들을 청하라고 한 다음에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름이 무엇이냐 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만 많은 사람이 이 기름을 성령으로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뜻도 없지 않지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기름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기름이 의약품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길르앗의 유향이란 말이 있지요 이것도 그 당시에는 의약품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이 치료의 정당한 수단을 사용하면서 또한 기도해야 할 중요성을 말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병든 사람의 정당한 치료수단을 배제한 적이 없습니다. 약을 쓰는 것이 믿음 없는 일이고 의사를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이 아니므로 병원에 가는 것을 중단해야 된다고 성경이 가르친 적은 한번도없습니다.
어떤 분은 성령께서 마음속에 확신을 주셔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도 존경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가령 디모데전서 5장 2절을 보세요.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의약품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포도주와 기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의학적인 수단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의사의 필요성을 인정했기에 “병든 자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도 평생 의사인 누가와 동행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몸의 가시 때문에 의사인 누가가 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포도주와 기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치료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의사나 약품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유명한 기독교인 의사 가운데 암브로스 파레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의사는 자기의 진료실 앞에 이런 표어를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나 의사 파레는 상처를 치료하고 하나님은 병을 낫게 하신다.” 옳은 말입니다. 의사는 상처를 돌보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치료의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얼마전에도 제가 병원에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담낭에 염증이 생겨서 잘라냈습니다. 배를 가르고 담낭을 자르고 배를 다시 실로 꿰맸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염증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자주 소독을 하고 약을 투입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아물고 살이 붙고 회복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수단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저는 신유의 은사를 믿습니다. 동시에 수단을 통한 치료를 믿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함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기도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됩니다. 우리가 위대하신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연결이 되지 못했을 때 우리의 기도는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결과를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만물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응답이 어떠하든지 바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서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두 쓸 것을 채우시리라”했습니다.
믿음은 기도의 기초입니다. 물론 기도 받는 사람이 믿음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하신 말씀을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치료하리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병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하심 가운데는 일반적으로 치료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구원하심 가운데 치료하심이 제외되는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치료하시리라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시려고 질병을 사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의 모범이 엘리야의 기도를 예로 들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우리가 기도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놀라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다가 도중에 그만둡니다. 엘리야는 간구했습니다. 목청만 높인다고 간구가 아닙니다. 바알 선지자의 목청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들이 더 열렬하게 기도했습니다. 칼로 몸을 상하면서 아우성쳤습니다. 그러나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받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저년 소제드리는 시간,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드렸습니다. 합심기도의 힘이 이렇게 큽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는 비오기 위하여 기도드릴 때 땅에 꿇어 엎드리어 기도 드렸습니다. 겸허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믿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요점입니다.
엘리야는 기도한 후 하나님께 기대하며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는 기도한 후에 사환더러 산에 올라가 바다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환이 가보고 와서 전하는 말은 아무런 결과도 없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그래도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기도한 후에 사환더러 아까처럼 바다가 있는 쪽에 또 가보라고 했습니다. 가보고 돌아와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엘리야는 또 간절히 기도하고 다시 한번 가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기을 일곱 번 거듭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보통 믿음입니까 낙심하지 않는 믿음,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일곱번째 기도하고 사환더러 또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사환이 다녀와서 하는 말이 “손바닥만한 구름이 바다쪽에 떠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엘리야는 그것을 부여잡고 또 기도했습니다.
일곱 번 기도하니까 응답이 되었는지 응답할 때까지 기도하다 보니까 일곱 번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믿음으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엘리야가 계속 기도했더니 조금 인노라니까 바람이 일기 시작하고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징조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드린 믿음의 기도는 마침내 응답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손바닥만한 적은 구름이 일어나자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말했습니다.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어서 내려가십시오” 이 말은 엘리야의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말을 할 때 빗방울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바다 쪽에 손바닥만한 구름, 자세히 보아야 구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미미한 구름 그러다가 없어질 지도 모르는 작은 구름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고 아합 왕에게 말한 것입니다. 여기 엘리야의 참된 간구의 본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주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기도는 하늘을 열기도 하였고 닫기도 하였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이렇게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셋째, 타락한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20절을 보세요.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면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뿐만 아니라 형제가 고난을 당할 때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왜요 우리는 주안에서 한 몸이요 겉은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병으로 고생하는 형제를 보면 마음이 무겁고 아픔을 느낍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를 떠나 타락해서 방황하는 형제를 보면 괴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 마지막에 그런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돌아서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돌아서는 데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 32절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타락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위해 기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른 형제를 돕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계속적인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 순결성이 회복되고 주님을 위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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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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