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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여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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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초기만 해도 힘이 샌 여장부나 몸이 큰 거녀(巨女)는 우러름받았다는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때 주통촌(酒桶村)의 스무 살 먹은 여장사는 수십 명의 군사들이 잡지 못하는 사나운 돼지를 한 손으로 잡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손수 주통촌을 찾아가 이 여장사를 계비(繼妃)로 삼고 왕자(東川王)를 낳고 있다. 한데 문호왕(文虎王) 때 키 13 척, 발바닥 길이만도 6 척이나 되는 거녀가 사비해에 떠올랐느니, 백제 말엽에 18 척인 거녀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올랐느니 하는 기록이 나오는 걸 보면 거녀나 여장사의 수난이 삼국시대 후반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존여비의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조에서 여성의 무력화는 세계사에서 가장 가혹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발이 크면 도둑년이라 하여 틀버선을 신겨 비틀걸음을 걷게 하고, 젖통이 크면 화냥년이라 하여 젖졸임말로 죄어 육체를 왜소화시켜서까지 무력화하였다. 그리고 거녀나 별나게 기운이 센 여아가 탄생되면 지방 수령들은 조정에 보고하게 돼 있었고, 흉물이라 하여 처치해 버리거나 궁중에 불러다 가두어 기름으로서 그 기운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관습이 돼 있었다.
김옥균(金玉均) 등의 개화 쿠데타 갑신정변 때 유일한 여자 행동대원인 이우석(李禹石)이란 궁녀도 그런 숙명의 여인이었다. 키가 7 척이요, 힘이 세어 쌀 두 가마를 겨드랑이에 끼고 유유히 걸어다니기에 모든 사람이 돌아보는 큰 지어미라 하여 고대수(顧大嫂)란 별명을 지녔던 이 한국 최초의 여자 혁명가는 대역죄로 시구문 밖에서 석살형(石殺刑)을 받고 있다.
고전소설 <박씨전>에 보면 병자호란에서 용골대를 항복시켜 엎드리게 한 박씨는 하루에 쌀 서 말을 먹고 사나이 대여섯 명이 못 드는 바윗덩이를 한 손으로 들어올리는 여장사다. 이처럼 여장사는 소설 속에서만 구제 받았을 따름이었다.
전통사회에서 여장사가 쓸모 있었다면 안방에 숨어 있는 범인을 잡기 위한 포도청 소속의 다모(茶母), 곧 여형사 수명에 불과했다. 키가 5 척이 넘어야 하고, 막걸리 세 사발을 단번에 마셔야 하며, 쌀 닷 말을 번쩍드는 채용시험을 거쳐야 하는 다모는 쇠도리깨를 휘두르고 범인이 숨어있는 내방의 문짝을 부수고 들어가 힘센 사나이를 손을 비틀어 잡아와야만 했다.
세계 유도 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두 낭자 역사(娘子力士)가 세계를 제패했다는 것은 금메달이라는 차원 이상의 부각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여자를 왜소화하고 무력화하고 비인간화해 온 수천 년의 역사에 반동하는 신기원으로서의 증명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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