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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김활란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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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은 한국 여성 교육의 어머니이며 이화의 큰 스승인 김활란 박사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1899년 2월 27일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조선조 말기에 태어나 군사 정부의 개발 독재가 한창이던 1970년 2월 10일 세상을 떠난 그의 생애와 업적은 21세기를 한 해 앞둔 오늘도 새롭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조 멸망, 36년에 걸친 일제 통치, 해방, 남북 분단, 동족 상잔의 전쟁, 학생 혁명, 군사 쿠데타 등으로 바람 잘 날 없던 격변의 세월이었다. 그 숨가쁜 역사 속에서 그는 여성 교육의 고삐를 움켜쥐고 시련 많은 길을 걸었다. 여자를 차별하는 뿌리 깊은 인습, 폐교를 위협하는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며 그는 여성의 인간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찬 비바람도 그가 높이 든 두 개의 깃발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여성 교육'이라는 복음을 한평생 전도했다. '당신의 생에 하나님을 영접하십시오'라는 말과 '여자여, 배우자, 세계로 가자!'는 말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평등과 사랑을, 교육은 평등과 사랑으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김활란을 봉건 사회의 굴레에서 구해 준 것도 신앙과 교육이었다. 그는 자신이 구원받은 길로 더 많은 여성들을 이끌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는 교육자로서뿐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 사회 운동가, 외교 대표로도 이름을 날렸다.
신교육을 받은 인재,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부족하던 시절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나 달려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승인받아야 했던 파리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것을 비롯, 유엔총회에 6번, 유네스코 회의에 3번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대통령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일생 동안 56회의 각종 국제회의에 참가했을 만큼 왕성한 해외 활동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어둡던 시대에 희망의 등불을 들고 앞장서서 걸어간 선각자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자 박사였고, 처음으로 트레머리를 잘라버린 단발 여성이었고, 결혼 대신 일을 선택한 당당한 독신 여성이었다. 1928년 예루살렘 기독교 회의에 참석하러 출국했던 그는 여행중 사이공 항구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불결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짐을 나르는 것을 본 후 인습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버리고 귀국하여 온 나라를 놀라게 했다. 서양에서도 여자의 쇼트 컷이 드물던 시절, 단발머리로 인습 타파와 생활 개혁을 역설하는 김활란은 신문화, 신교육, 신여성의 상징이었다.
1931년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 교육」이란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음으로써 그는 한국 최초의 여자 박사가 되었다. 여자가 박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던 나라를 기쁨으로 들뜨게 했다. '나도 김활란처럼 훌륭한 여자가 되겠다. 내가 김활란처럼 될 수 없다면 내 딸을 그렇게 키우겠다'는 열망이 여자들의 가슴에 샘솟았다. 김활란이란 이름은 한 시대의 여성들에게 위안과 희망과 각성을 준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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