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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전주 최초의 한인 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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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 원씨 집안에 아련년이라고 불리는 딸이 있었다. 아련년이 성장하자 양반 집 이씨 가문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아련년은 당시의 보통 여인들처럼 행복했다. 그는 사내아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신랑과 사내아이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리고 또 얼마 가지 않아서 아련년은 딸아이를 낳았다. 이 딸이 아련년의 문제의 핵심이었다.
남편이 죽자 부잣집에서 혼사 의사가 들어왔다고 중매쟁이가 말했다. 어린 딸이 문제였다. 중매쟁이와 아련년은 이 딸이 물에 빠져 죽은 것처럼 하자고 모략을 꾸몄지만 막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련년은 딸을 데리고 시집을 가게 되었다. 신랑이 부자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신랑은 술주정뱅이였다. 매일 구타가 끊이지 않았다. 아련년은 노예처럼 살았다. 아련년은 어린 딸을 데리고 여승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도망쳐 나와 서울에 오게 되었다.
아련년에게는 악성 상처가 있었다. 서양의사가 잘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서 아련년은 여자아이들을 위한 여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자기 딸을 이곳에 맡기고,얼마 후 자신도 남 장로교의 여자 선교사 테이트를 만나 함께 살면서 성경을 배웠다.
아련년이 성서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어느 날,아련년은 엉엉 울며 나타났다. 이유인 즉,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는 다 용서해 주셨지만,자식을 죽이려고 했던 자신의 죄는 너무 커서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테이트 선교사는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다시금 전했다. 아련년은 예수님이 죄인의 괴수인 자신의 죄까지도 용서하셨다는 것을 알고 너무나 기뻐했다. 그 후 그녀는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테이트는 1896년 서울을 떠나 전주에 가게 되었다. 아련년도 함께 전주로 갔다. 전라도 여자 선교는 미국에서 온 여인과 서울에서 온 여인 등 두 여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아련년의 불쌍한 딸은 미션스쿨에서 열심히 공부해 남 장로교가 전주에서 여학교를 세웠을 때 첫 번째 한인 여교사가 되었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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