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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위에 은혜 (요 0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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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모두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참생명은 그의 나심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가 다같이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한 아기가 태어나서 베들레헴의 구유에 뉘였습니다. 어디까지나 한 아기의 탄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출생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며, 우리 모두를 향한 생명적, 창조적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몇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켜 탄생이다, 출생이다, 이렇게 말하지만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우리 보통사람에게는 쓰이지 아니하는 용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 대하여 쓰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심’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납니다마는, 그분은 오신 분입니다. 출생이 아니라 오신 것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간증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6,7절)......” 여기서 ‘비우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케노센,’ 영어로는 empty라고 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신’ 것입니다.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오셨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되심’입니다. ‘되심’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게네토,’ 영어로는 become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14절)”--이 말씀은 헬라어로 ‘호 살스 에게네토,’ 혹은 ‘고로스 살스 에게네토’라고 표현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성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얘기를 해도 그것은 다 주변 얘기일 뿐이고, 성탄의 골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기 위하여 그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주적 원리입니다. 죄인이 의인되기 위해서는 의인이 먼저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엄청난 진리를 성탄사건 속에서 계시해주십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땅에 오심입니다.
세 번째는 ‘거하심’입니다. 헬라어로 ‘에스케노센’이라고 하는 이 말은 천막을 쳤다는 뜻입니다. 임시로 땅에 천막을 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잠시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현실의 의미를 바꾸어놓으셨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 큰 난리가 났습니다. 급기야 왕이 그 왕궁을 버리고 시골로 피난을 갑니다. 왕은 농부의 옷으로 갈아입고 신하 몇 사람과 함께 어느 마을에 몰래 숨어들어갔습니다. 한 농부가 이 낯선 길손들을 잘 영접해주었습니다. 변장을 한 왕과 신하들은 며칠 동안 거기서 잘 묵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라 정세가 회복되어 왕은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왕은 그 농부가 자기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준 것과,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남을 잘 대접해준 것이 기특해서 농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농부는 낯선 길손들이 그실 왕과 신하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왕은 농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 그러나 농부는 이렇다할 소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이시여, 이제와서 제가 출세를 원하겠습니까, 영화를 원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금은보화를 원하겠습니까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다만 며칠 후 제 생일잔치에나 한번 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침 환갑인 지라, 자식들이 힘을 모아서 조촐하나마 잔치를 열어준다는 군요.” 왕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며칠 후, 한 나라의 왕이 시골 초가집에 사는 일개 농부의 환갑잔치에 왔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 집은 귀한 집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집이 되었습니다. 그일 하나로 인해 농부의 가문은 위대한 가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33년 동안 거하셨습니다. 그로써 오늘날 우리의 현실, 이 땅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버려진 땅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입니다.
본문은 “나타내셨느니라(18절)”라고 말씀합니다. 나타나심은 곧 계시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신비, 우주적 비밀을 예수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다 나타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말씀은 그가 하나님되심을 뜻하며,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을 뜻함입니다. 여기에 성탄의 참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있고, 재창조의 역사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맞이하면 되겠습니가 그길은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장 7절로 13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바로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요 1:1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껏 진리를 찾아 헤매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하였습니까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습니까 좀더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쳤습니까 고행을 했습니까 명상을 했습니까 이제 다 포기하시고, 주님의 오심에 마음을 활짝 열고 그대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영접하는 것, 문을 활짝 열고 ‘어서 오십시오’하고 영접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영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생명으로 영접하고, 빛으로 영접하고, 말씀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나를 위해 오신 분으로 그대로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을 수 있다고 성경은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영접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즈음, 안나와 시므온이라는 나이 많은 늙은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 하는 응답을 받고, 예루살렘성전에서 떠나지 않고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오셨고, 마리아와 요셉이 난 지 8일되는 이 아기를 안고 예루살렘성전에 와서 할례를 받으려 합니다. 이 때, 성전을 지키고 있던 시므온이 그 아기를 보고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라고 가르쳐주신 아이를 그의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 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눅 2:29)”--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저는 이렇게 풀이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이렇게 귀한 내 영광을 보았고 품에 안았습니다. 이제 평안히 죽겠습니다.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모든 소원, 모든 영광을 다 받았습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이제 종은 평안히 가겠습니다. 안심하고 죽겠습니다’라는, 바로 그런 말일 것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30-32)”--그가 본 것은 아기 예수요, 그가 아는 것은 아기 예수뿐입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그는 영원한 세계를 봅니다. 놀라운 세계를 바라봅니다. 영광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이방의 빛입니다. 무한한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의 사건을 통하여, 이 크리스마스를 통하여 우주적인 소망의 세계를 봅니다. 영광의 세계를 봅니다. 독생자의 영광, 그의 왕되신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바로 그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성탄을 맞는 비결입니다.
또한 오늘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 여러분, 은혜를 바라고 살았습니까 성탄 그 한 가지로써 충만합니다. 진리를 찾아 헤매었습니까 달리 진리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만족하니까요.
일본의 종교가이자 사회운동가인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는 소실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서자로 태어났기에 그의 생활은 언제나 우울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자세는 아닙니다만, 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시간에까지도 성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강의하는 선생님은 좀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질책하듯이 “너, 지금 무슨 책을 보고 있느냐”라고 물어보자 가가와 도요히꼬는 벌떡 일어나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힘차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진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 진리를 찾는 순간, 다른 책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최송합니다만, 가끔 저는 이런 섭섭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뭐라 할 말이 없고 해서 저한테는 제일 난처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교회 밖에 여기저기 이상한 모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 교인 한 분이 그런 모임에 갔다와서는 저에게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무슨 모임에 가니까 이러이러한 점이 이상하던데, 그건 왜 그렇습니까 어떤 것입니까” 그럴 때에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들은 사람이 알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지만 매우 섭섭하디다. 소망교회에서 주일날마다 예배드려, 수요일마다 예배드려, 새벽기도마다 예배드려, 목사님 성경강의도 많아......성경공부 하는 길이 이렇게 많은데 무엇이 부족해서 외도를 합니까 어디에 가서 과외수업을 하는 거예요 어디로 샜다가 온 것입니까 그래, 거기에 가니까 어떻습디까 여러분이 그럴 때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충만하게 먹였더라면 저런 불상사가 없었을 텐데. 무슨 허기가 들어서, 어디로 샜다 왔노.’ 저도 할말이 없어요. 그것은 제 잘못이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곁길로 가지 않아요.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만족한 사람이 무슨 외도를 한다는 것입니까 외도하는 남편을, 아내를 나무랄 것 없어요. 내가 뭔가 다 채워주지 못했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래, 목사인 저로서는 할말이 없어요. 다 내가 부족해서 이 꼴이 되었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섭섭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3년 동안 추종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배우고, 듣고, 그 하시는 모든 일을 보았습니다. 예수사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인입니다. 십자가 밑에까지 간 사람입니다. 이제 그가 고백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달리 무슨 철학을 연구 할 것도 없고, 달리 어디 가서 고행할 것도 없고, 그저 만족 하더라, 그 말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67절)”라고 물으십니다. 이 때, 베드로가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8절)”--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에수님의 나심, 역사, 사역, 말씀, 십자가, 부활, 이 모든 것을 확실히 경험한 요한은 말씀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한 “은혜 위에 은혜(16절)”라고 말씀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 모든 은혜 위에 최상의 은혜, 절대 은혜, 사건 자체가 은혜입니다. 이제야 알고보니 내게 은혜입니다. ‘내게 은혜’--이 은혜를 아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실패도 은혜요 병든 것도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성탄의 참된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의 벅찬 감격으로 일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은혜 위에서 살아갑니다. 이 감격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뵈어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은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뵈옵니다. 하나님을 뵈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그때문에 성지가 성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봅니다. 사실 예루살렘에 가보면 별것 없습니다. 그렇게 제대로 된 마을도 못되고, 풍요한 마을도 못되고, 이런 땅에 어떻게 오셨을까 싶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계셨기 때문에 이 땅이 성지가 된 것입니다. 저는 작년에 디베랴라고 불리는 갈릴리 바다 서쪽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이른새벽이라 주위는 아직 깜깜한 바닷가의 어느 바위 위에 앉아서, 저기 보이는 골란고원 앞으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제가 그 때 사진을 하나 찍었는데 사진이 잘 나왔습니다. 저는 이 사진을 좋아합니다. 아무튼 그 바위에 한 시간 동안 앉아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혹 내가 앉아 있는 이 바위에 앉아 계셨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바위에 앉아서, 이 아침에, 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었는지도 모른다.’ 그런생각을 하니까 거기에 있는 바위고 나무고 그 바다에 떠오르는 해이고 간에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사건, 베들레헴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 충만함을 봅니다. 그 신비 세계를 다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그 모든 행적을 눈여겨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뵙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그리고 연원히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가보면, 공산주의의 열렬한 실천자인 레닌의 묘지가 있습니다. 묘지라고 이름하지만, 시체를 유리관에 넣어서 보관해놓은 곳입니다. 그 유리관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나라, 모든 인민의 지도자였다. 그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주었다’--얼핏 보기에는 위대한 사람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마는, 자세히 보면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민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한 모든 일들은 훌륭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살아계셔서 오늘도 우리의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성탄은 그저 ‘언제 있었던’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도, 영원히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의 오심의 의미를 압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존재를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아니 나를 이처럼 사랑하심을 알게 됩니다. 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여러분, 혹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고민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어, 죄인이 되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할진대, 내가 왜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까 한 계단만 내려서면 사랑할 수 있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사랑을 못한다는 이야기입니까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의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땅에 오십니다. 사람이 되십니다. 그런고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성탄의 의미 속에서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사랑의 실재적 의미가 무엇이며, 은혜 위에 은혜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증인으로 살며, 이 성탄의 은혜를 온누리에 전하여,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성탄을 맞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기 도>--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시고, 구유에 오시고, 친히 영광을 나타내어주신 그 놀라운 주님의 은혜에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주여, 주님을 영접하오니 우리 마음에 오시고, 우리를 다스려주시고, 그 나심의 기쁨, 오심의 기쁨,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 기쁨 안에서 영원히 충만한 생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은혜 위에 은혜를 높이 간증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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