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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가 잘못했습니다. (욘 01:1-10)

첨부 1


교회력으로 말하면 사순절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그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에 구약 요나서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자 합니다.
요나서는 다른 어떤 책보다도 오늘의 교회의 모습을 잘 말 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20세기의 교회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그 죄의식을 은폐하기 위해서 잠자고 있는 오늘의 교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나서는 문자 그대로 요‘나’를 보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한 귀가 열려져 있는가 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요나서 1장 2절을 보세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중요한 세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어나’, ‘가서’, ‘외치라’ 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주신 전도의 지상명령을 가장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안일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이 전도의 명령 앞에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일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중요한 명령을 주실 때마다 이 동사가 어김없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빌립을 사용하시기 위해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그 길은 광야라”했습니다.
성경에서 ‘일어나라’는 동사가 명령형으로 여러 번 나타나는데 이 단어는 주님의 중대한 선교명령을 위하여 쓰여진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9장 11절에 보면 이방인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서 바울을 보내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사도행전 10장 20절에 보면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베드로를 고넬료의 가정에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중요한 선교의 명령을 주시려고 하실 때마다 언제나 ‘일어나라’,‘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의 잘못된 타성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흩어져 가는 일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어나 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얼마나 찾아가고 있습니까
그 다음 명령은 ‘외치라’입니다. 내 생각을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철학을 외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내 철학 사상으로는 아무도 구원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영혼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주신 말씀만을 외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주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니느웨는 그 당시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앗시리아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적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원수의 나라에 가서 외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민족적인 편견과 이기심을 잘 극복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만일 이와 같은 주님의 명령이 임한다면 우리도 요나처럼 응답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니느웨 성이 멸망하기 전에 요나를 통해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3절을 보세요.
“그러나 요나가......”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내게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주일마다 들려 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그러나’라고 응답하지 않습니까
여기 요나의 비극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아마 요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묻고 싶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하필이면 이 일을 나더러 하라고 하십니까
여러분,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나의 인생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나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의 명령 앞에 나는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한 민족 한 민족을 향하신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앗시리아 제국을 향한 경륜을 갖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경륜을 갖고 계십니다. 한국을 향한 경륜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세계정세만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50억이 넘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나’라는 한 사람을 향하여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앗시리아나 이스라엘, 세계정세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요나라는 한 사람에게 관심을 쏟고 계신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시다는 사실 때문에 그 하나님이 나에게까지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하나님, 민족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나’라는 개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요나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찾아가십니다. 그래서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른 데는 몰라도 우리 민족의 원수인 니느웨만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지 않다고 생각 했을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어려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소위 신념이 굳은 사람입니다. 자기 철학, 주관, 경험, 사상의 벽을 쌓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기를 기뻐하십니까 “주님 말씀하십시오, 저는 언제든지 제 생각을 바꿀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준비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내 인생의 숱한 경험을 통해서 내 철학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될 때, 주저없이 내 경험도 포기하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이려는 삶의 자세를 갖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요나는 순종의 길 대신에 불순종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해서 뱃삯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돈의 낭비입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주님으로부터 피하는 것은 돈의 낭비이며, 시간의 낭비입니다. 주님과 의논하지 않고 계획했던 사업, 인생의 계획, 인생의 모험이 그 어느날 돌이켜보면 시간과 돈의 낭비였음을 주님 앞에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요나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불순종과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시려는 방향과 상관없이 뱃삯을 주고 유람선을 타고, 새로운 인생의 이정표를 설계하면서, 다시스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요나서의 이야기를 여기서 끝낼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향해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요나에게 “나는 이제 더이상 너를 살 수 없다”고 포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그대로 버리신 것이 아니고, 그를 추적하십니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4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태풍을 바다 위에 내리매 바다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 지라”
하나님은 요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이 거기도 계시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바다에 폭풍을 몰고 요나가 타고 있는 배를 찾아오십니다. 사공들은 두려워하여 요나가 타고 있는 배를 찾아오십니다. 사공들은 두려워하여 자기의 신들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위기에 처하게 되면 갑자기 종교적으로 변합니다. 임사호천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이방 사람들도 감당키 어려운 폭풍 앞에서 각각 자기들의 신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기도하고 이방사람들도 기도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과 상관이 없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결국 종교적인 몸짓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어디 있습니까 요나는 잠자고 있었습니다. 6절을 보세요.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요나가 잠들었다는 것이 이상하지요 어떻게 양심이 괴로워서 잠이 들 수 있습니까 아마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혹시 무슨일이 일어나지 않겠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마음이 가라앉고 그 양심이 점점 마비되면서 잠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나가 잠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잠자는 사람은 깨어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자신이 잠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 순간에 이미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자신이 잠든 상태에 있으면서도 잠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귀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도 요나처럼 잠들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영적으로 둔감한 상태에서 잠자고 있던 요나를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장을 요나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요나를 찾아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강단에서 설교자들이 자장가를 불러주기를 원하고 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 영혼의 잠을 깨워주는 메시지가 없다면, 그래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그 말씀이 화살이 되어 그들의 가슴에 박힐 때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회개와 돌이킴이 없다면 교회는 성도들에게 자장가를 부르며 그들을 무서운 지옥의 파멸로 이끄는 하나의 거짓된 종교공동체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게 맡기신 어떤 명령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요나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했었습니까
이 요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끈질기게 요나를 추적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한 번 더 응답할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역경과 환난을 통해서 마침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요나서 1장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태풍을 거느리고 배를 준비하시고 마침내 요나를 추적해 오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피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선장을 통해서 하나님은 잠들어 있는 요나를 깨웠습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요나를 잠에서 깨운 사람들은 이 바다에서 일어나는 환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그 당시 보통 하는 대로 제비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비는 요나에게 떨어졌습니다. 8절에 보세요.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다시 말하면 “너는 도대체 누구냐”하는 말입니다. 요나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절에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요나를 향해서 일하시기를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 보일 때까지 하나님의 부흥은 지체가 됩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영국의 웨일스의 부흥이나, 미국에서의 무디의 부흥이나, 우리 한국의 초대교회의 부흥도 그런 하나님의 특별하신 손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에서 부흥의 원인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정직하게 나타낼 때였습니다.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말하고 회개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부흥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의 부흥을 원하십니까 교회의 부흥을 기대하십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내 신앙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내 마음 속에는 어떤 의식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내 믿음이 지금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보이세요. 가면을 쓰고 있는 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요나서의 이야기는 요나가 정직하게 그 스스로를 나타내보이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
“자기가 여호와의 낮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그는 나타내기를 꺼려하는 부분까지 정직하게 내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고 있습니다. 나는 불순종한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전을 피해서 도망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 고백이 요나서의 이야기를 다르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죄인임을 고백하는 순간부터, 나를 지으신 그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미국의 디트로이트 시는 자동차 공장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디트로이트 시 외곽에 살고 있는 일급 자동차 정비사 한 사람이 아침에 자동차를 몰고 출근하는 도중에 자동차가 고장 났습니다. 이 정비사는 길옆에 차를 세워놓고 차가 왜 고장이 났는지 그 원인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런데 고장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날씨는 춥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고급 승용차 하나가 멎었습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린 노신사는 차가 고장나서 당황하고 있는 일급 정비사에게 다가와서 “제가 뭐 좀 도와드릴까요”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이 정비사는 속으로 ‘디트로이트에서 일류 정비사인 내가 못 고치는 차를 고치겠다니’라고 생각하면서 그 노신사를 바라보았습니다. 노신사는 엔진의 몇 곳을 만지더니 “시동을 걸어 보실까요” 그래서 시동을 걸었더니 시동이 걸렸습니다. 이 정비사는 깜짝 놀라서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그 노신사는 명함 한 장을 주고 사라졌습니다. 그 명함에는 헨리 포드(Henry Ford)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십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은 내가 어디에 병들었는지를 아십니다. 그러나 내가 솔직하게 “하나님 제가 이렇게 병들었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라고 내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나에게 손을 대기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의 과거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결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내가 참으로 회개했다면, 내가 정말 잘못한 것을 인정한다면, 내가 참으로 새로워졌다면, 나도 나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입술만의 자백을 되풀이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한 1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약속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 가운데 나타난 자백은 죄를 버리는 결단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죄를 자백하기를 원하면 “하나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제가 이 죄로부터 돌아서겠습니다.”라는 결단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돌이키는 그 돌이킴이 없는 입술만의 자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요나의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는 고백은 자기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책임을 지는 결단입니다. 그는 입술만이 아니라 행위로써 하나님을 향하여 그의 마음을 지나간 과거로부터 온전히 돌이키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이것은 요나의 진정한 회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온 무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 바다에 풍랑이 일기 시작할 때는 저마다 자기의 신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더 이상 우상 앞에 가져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만일에 요나가 이 환난에 대해서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우겼다면 부흥은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 모든 어려움이 찾아왔음을 고백하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는 결단을 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고 그들은 요나의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 계신 분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타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배도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나서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시작될 줄 믿습니다.
1994년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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