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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 올라갑시다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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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 입구에서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시고, 성 안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여리고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다른 곳은 다 메마른 땅이지만 여리고만은 물도 넉넉하고, 땅이 비옥해서, 종려나무가 우거지고 여러 가지 과일들이 많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여리고를 ‘종려나무의 도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은 여리고를 중심으로 해서 무역을 했기 때문에 여리고는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금이 많이 유통되고, 상권이 크게 형성되어 여리고에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큰 세관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들은 정한 세액 이상을 받아서 로마 정부에 바치고 나머지로는 자기의 사욕을 채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세리를 대할 때 매국노와 같이 취급했습니다. 창녀가 몸을 팔아 사는 것처럼 세리는 국민의 피를 팔고, 결국 나라를 파는 놈들이라고 생각해서 창녀와 세리를 같이 멸시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삭개오는 그 당시 여리고 세관의 세리였습니다. 그는 세관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때 형편으로 보아 큰 건은 자기가 직접 취급해서 돈을 받았고, 밑의 직원들이 매달 상납하는 액수도 상당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지방 사람들은 삭개오를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고, 가까이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멸시의 눈초리로 대하는 것을 삭개오 자신도 느꼈습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보통 돈이 많으면 행복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아마 여리고에서 제일 돈이 많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독했습니다. 누구하나 그에게 인격적으로 친근하게 대해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세금 좀 적게 내보려고 접근해 오는 이가 있기는 했으나 인간적으로 대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기가 버림받은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멸시와 냉대를 당할 때, 마음 속 깊은 곳의 갈등은 날로 심각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세리나 죄인을 환영하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처지에 있던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컸고, 그분을 한번 만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는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님을 만나 뵈려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거리에 나갔더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는데, 삭개오는 그 틈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말씀한대로 그는 보통 사람보다 키가 좀 작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신 이 기회에 예수님을 꼭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 끝에 예수님을 뵙기 위하여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길가에 가로수로 보통 뽕나무를 심었습니다. 가지가 많아서 그늘도 좋고 올라가는 것도 다른 나무에 비해서 쉬웠습니다. 물론 나무에 올라가 본 경험이 없는 삭개오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뽕나무에 올라 갔습니다. 온전히 예수님을 뵈려고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여리고 거리에는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지나가신다는데 도대체 어떤사람인가 하는 호기심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사람 구경하러 나온 사람도 있엇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자기의 복잡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처럼 뜻을 가지고, 예수님을 꼭 만나 뵙겠다는 생각으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고 은혜를 받게 되고 주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게 되고 주님의 한없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뽕나무 아래 길거리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지마는 주님을 집으로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아래 있는 사람과 위에 있는 사람의 삶은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사람과 아래 있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위치에 잇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 달랐습니다. 창문에 올라가든지, 나무에 올라가든지 어디라도 올라간 사람은 어떤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찾는 것이 있습니. 같은 여리고 사람이지만 아래 있는 사람이 찾는 것과 위에 있는 사람이 찾는 것은 달랐습니다.
길거리에 나온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라는 분은 병을 고치신다는 내 병을 고쳐 주셨으면, 그분은 인간의 가난을 해결해 주신다는데 내게 더 좋은 길을 열어 주셨으면, 주님은 모든 것을 풍성케 하시는 분이시라는데 내게 있는 것 중에 더 있게 해 주었으면, 내가 사는 중에 더 잘 살게 해 주었으면, 내게 있는 고통의 짐을 벗겨 주었으면, 그 분은 무슨 일이든지 하신다는데 내게 아들을 하나 낳게 해 주었으면, 이런 생각, 저런 바람을 가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나는 가난해도 좋습니다. 병이 나도 좋습니다.” 삭개오는 가난과 질병을 해결하기 위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이제 더이상 살 수 없고 그분의 은혜를 받아야만 살 수 있다는,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나무 아래 있는 사람들이 구하는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무 아래 있는 사람들이 구하는 모든 것이 그에게 있지만 그것들이 자기의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삭개오에게는 주님을 만나 뵙고 싶은 마음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주님, 나는 주님을 꼭 만나 뵈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세상의 그 무엇도 내가 직면하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할수가 없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아래 있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문제의 해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나는 주님을 꼭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 꼭 오셔야 합니다. 저는 주님의 은혜를 꼭 받아야 합니다.’ 이런 간절한 생각, 소원을 기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주님, 세상의 물질, 육신의 건강, 다 주시지 않아도 저는 주님을 뵙는 것만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주님이 저를 봐주시면 주님의 얼굴의 뵙는 순간 모든 문제는 해결될 줄 믿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도우심을 따라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살고 싶습니다. 그 동안 살기는 살았어도 사람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이제 주님 뵙고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돈이 많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집이 좋아도 기쁨이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꼭 만나 뵙고 주님의 지시대로 살아야 거기 평화가 있고,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고, 보람이 있을 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뵈러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아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삭개오와는 다른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영적인 것을 찾았고, 아래 있는 사람들은 육적인 것을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현실 적인 것을 찾았지만, 삭개오는 미래를 향하여 꿈을 가지고 나아갓습니다. 세상의 돈이나, 집이나, 권력을 가지고 육신은 잘 살 수 있지만 이것을 미래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것은 영원한 천국까지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삭개오는 알았습니다.
아래 있는 많은 사람들은 땅의 것, 세상의 것, 보이는 것, 일시적인 것을 찾았지만 삭개오는 위의 것, 하늘의 것,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찾았습니다. 나무아래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더 잘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고 나무 위의 사람은 자기가 예수님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는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선과 삭개오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위로 올라간 사람에게 은혜가 임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위에 올라가 주님을 만나 뵈려는 사모하는 사람의 눈빛을 보시고, 그 마음을 보시고, 생각을 보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것으로는 안된다. 육신적인 것으로는 안된다. 보이는 것으로는 안된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것, 아래 것을 의지하는 동안 하늘의 것, 위의 것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문을 닫아야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지위가 아무리 많아도,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릴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간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의 것을 포기한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인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인 것입니다. 재벌은 재산을 버리고, 학자는 학위를 버리고, 군인은 계급장을 버리고, 자기자신의 것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삶이 뽕나무 위로 올라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야 될 줄을 알면서도 실제로 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공무원은 부정부패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앉고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사회에 크게 물의를 일으킨 금융사고가 또 일어났습니다. 10여 년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낡은 수법의 범죄가 개혁을 한다고 하는 신한국에서 다시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법은 고치고 제도는 바꾼다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아직도 나무 아래서 헤매고 있기 때문에 그 모양, 그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달라져야 할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내 마음이 연약하오니 내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는 새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도와 주시지 않으시면 제가 바로 살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라는 기도를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 신앙 생활을 바로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습니까 혈기가 날 때 다스릴 자신이 있습니까 고난이 닥칠 적에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이 일어날 때 다스릴 힘이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삭개오처럼 나무 위로 올라가서 “주님, 나는 토색한 부자입니다. 나는 나쁜 세리장 노릇을 했습니다. 나는 바로 살고 싶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세요.”하는 간절한 회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 뵙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삭개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리장 삭개오를 압니다. 체면도 없이 나무 위에 올라간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삭개오를 보게”하면서 얼마나 수군거렸을까요
하지만,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을 기다리는 그 간절한 모습은 생각만 해도 얼마나 흐뭇한지 모릅니다.
참된 구도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살고 싶지만 그대로 안되는 것이 우리입니다. 헌신, 봉사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이 약한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삭개오처럼 우리도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나는 약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이것이 삭개오의 고백이요,그의 자세요, 그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삭개오와 같은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아래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아래에 있으면 아무리 있어도 부족하고, 아무리 누려도 만족이 없고, 행복도 기쁨도 보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는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20년 전, 30년 전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풍요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때는 상상도 못하던 것을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만족이 있고 보람이 있습니까
오히려 사람들은 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시설은 문화적으로 해 놓았는데 거기 사는 사람은 원시인보다 못하게 짐승처럼 살면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뽕나무위로 올라가지 아니하고 뽕나무 아래로 내려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질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우리는 걸맞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었는데 그 옷에 걸맞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는데 그 음식에 걸맞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집을 짓고 사는데 그 집에 걸맞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데 그 차에 걸맞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훌륭한 직책을 가졌는데 그 직책에 걸맞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부는 많이 했는데 그 학식에 걸맞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뽕나무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뽕나무 위로 올라갈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망합니다. 개인 이든 민족이든 꿈이 있어야 합니다.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가절한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뜻과 목표가 없는 생활은 방향 없는 항해와 같고, 목적지가 없는 행진과 같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날이 향상하고 성장하고 발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가는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의 인생이 부패와 타락으로 내려가는 길이라면 삶에 무슨 의미와 보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뜻을 세운 다음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힘을 써야 합니다. 삭개오는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사람에게는 오르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날이 향상하고 발전해야 합니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의 사나는 자기성자이을 스스로 느끼는 것입니다. 쉬운 것은 아니나 못할 것도 아닙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지위도 높고, 권력도 있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꼭 만나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되겠다고, 그래서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사람답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회개하는 삶입니다. 그는 자기만 알고 살았었지만 이제는 이웃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뵙기 위해 그처럼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예수님은 삭개오의 심령을 보셨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먼저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십니다. 거기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대답함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친구, 훌륭한 친구를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사람의 눈은 차이가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삭개오를 버림받은 죄인, 희망이 없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보셨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그의 가정에 모시게 되고, 소외되었던 삭개오의 가정은 많은 사람이 찾아 와서 함께 즐거워하는 잔칫자리가 되었습니다. 대문을 열어 놓아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마음의 천국과 가정의 천국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염려도, 불안도 없어졌습니다. 소외감도, 열등감도 사라졌습니다. 그의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전에는 돈 벌어 모으는데 급급했지만 이제는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재산의 반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베나 같겠다고 고백하는 삶으로 변했습니다.
위로 올라가면 우리의 삶이 새롭게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은 있는데 만족이 없습니까 권력은 있는데 평하가 없습니까 지식은 있는데 보람이 없습니까 세상 것은 넉넉한데 아직도 목마르십니까
세상적인 것은 우리의 삶을 아래로 끌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뽕나무 아래 있는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우리 모두 기도의 뽕나무 위로 올라갑시다. 은혜의 뽕나무 위로 올라갑시다. 믿음의 뽕나무 위로 올라갑시다. 성령의 뽕나무 위로 올라갑시다. 이것이 고상
한 삶이요, 의미있는 삶이요, 보람된 삶입니다. 위에 올라간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들이 되었고, 그 손이 복을 받아 인류를 위해 크게 봉사한 것입니다.
세계를 향해 크게 문을 열어 놓고 열심히 봉사하는 나라의 민족이 잘 되고 앞서가는 것을 우리는 세계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역사에서 낙오되지 아니합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앞서갈 때 성공합니다.
우리는 모두 뽕나무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삭개오와 같이 낮은 곳에 있다가 높은 곳으로,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세상의 것 바라보고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뵙기 위해 나오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주요, 치료의 주요, 인도하시는 주님이시며, 위로의 주요, 사랑의 주이십니다.
이 시간, 위에 올라 오신 여러분을 향하여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겠다. 네 삶을 도와주리라 내가 네 여생을 인도하마.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하시는 주님 음성 들으시고 주님 모시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1994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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