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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복음성 (마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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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첫인상이 좋으면 호감을 갖게 되고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첫인상이 좋지 않으면 별로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도 우러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럴 것입니다.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살 때는 첫장을 먼저 열어보게 됩니다. 첫장의 글이 마음에 들면 주저하지 않고 책을 삽니다. 그렇지만 첫장의 글이 별로 재미가 없다 싶으면 그냥 책을 놓아 버립니다. 처음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본문 말씀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사람들이 모처럼 성경을 읽어보려고 마음먹고 성경을 펴는 순간 읽을 마음이 싹 가셔 버리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족보를 자세하게 써놓은 것인데 차라리 이 족보가 신약성경 뒷부분에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첫장에 들어 있어서 모처럼 성경을 읽으려다가 시험드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이 족보를 본문으로 해서 설교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만큼 무미건조한 말씀입니다.
이 족보는 모두 16절로 되어 있는데 그냥 읽으면 별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쉬운데 잘 읽어 보면 이 족보 속에 복음의 참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족보에는 평등의 원칙이 들어 있고 진정한 민조주의의 근원이 들어 있으며 몇 가지 우리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복음성이 들어 있습니다.

1. 남녀 평등입니다.
오늘 이시대는 여권이 너무나 강화되어서 남녀 평등이라는 말이 별로 신선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는 남녀 차별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당시 여자는 혼인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딸을 마음대로 팔 수 있었습니다. 딸의 권리나 인권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절대 권한 속에 아무에게나 보내면 그대로 갈 수밖에 없는 가부장적인 권한이 강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는 남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남편이 살아가 싫으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내보내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디가서 보호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당시는 그만큼 남녀 차별이 심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남자들은 자고 나면 기도를 했는데 반드시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하는 기도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남녀에 대한 편견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공문서에는 여자의 이름이 등록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어디를 보아도 여자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족보에 여자 이름이 들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셀 때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자들은 그렇게 무시당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관습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네 명의 여자 이름, 즉 라합과 롯과 다말과 밧세바를 기록해 넣었습니다. 새로 주어지는 복음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포함한다는 깊은 뜻을 보여 주려는 배려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족보가 보여 주는 복음성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한 발상입니다. 당시는 고사하고 오늘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족보에 여자의 이름이 들어갑니까 이것은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까지도 고치지 못하는 이 나라의 인습입니다. 사람들이 아들을 선호하는 근본 원인이 여기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딸은 아무리 많아도 족보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족보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합니까 아들을 낳지 못하면 대가 끊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들을 선호하고 별짓을 다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렇다 치고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되었다는 미국은 어떻습니까 미국은 여자가 결혼을 하게 되면 성을 빼앗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들이 비록 족보에는 들어가지 못해도 자기의 성은 죽을때까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결혼을 하면 여자들이 모두 남편의 성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여자의 성은 아주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도 그토록 여권이 강한 나라에서 여자들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 고답적인 시절에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의 족보에 여자들의 이름을 넣었습니다. 아주 파격적인 발상입니다. 마태는 여기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굳이 남자나 여자를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이 같은 차별이나 악습들이 바뀌고 불평드이 바로 잡히고 편견들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력입니다.

복음이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얼마나 우스운 일들이 많았습니까 당시 여자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습니다. 여인들이 어디 활보하며 돌아다닐 수나 있었습니까 그렇게 집안에 갇혀 살던 여인들을 밖으로 불러내서 활보하게 만들고 인간 대접을 받게 한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때부터 여인들이 감히 학교라는 곳에 다니기 시작했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사회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서는 남자들과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기적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이것은 당시 관습으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변화였고 엄청난 변신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가장 수지맞은 계층은 뭐니뭐니해도 이 땅의 여인들입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세월이 훨씬 더 흐른 후에나 가서 여인들이 이 같은 남녀 차별에서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가 쓴 이 족보를 통해서 벌써 그 당시 남녀의 불평등을 복음이 수용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족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개화되고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이나 개인이나 나라가 발전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지금도 예수 없는 나라들을 보십시오. 여자들이 한결같이 이 구속을 받고 살아갑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여인들이 얼굴을 내놓지 못하고 천으로 가리고 다니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구속이고 차별입니다. 그곳에 예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2. 인종과 국경의 수용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인종의 문제이고 국경의 문제입니다.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나라인 미국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이 인종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지금 평등을 말하고 인권을 말하고 있지만 그 평등의 이론 뒤에 숨겨져 있는 인종 차별이 얼마나 가혹합니까 그 나라에서 흑인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살아갑니까 사람 취급이나 받고 있습니까 서부 개척 시대에는 흑인들에게는 영혼도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흑인들을 짐승처럼 노예로 부려 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쳤던 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입니까
이 미국 사람들은 참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미국 사람들의 친절하고 상냥한 겉모습만 보고 좋다고 보는데 그것은 참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흑인들이 백인들을 그토록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는 마리아상을 만들어 놓고 모두 새까맣게 페인트칠을 해놓습니다. 오늘까지도 이렇게 서로 반목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어디에 평등이 있고 용납이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지금부터 7,80년 전만 해도 양반 상놈 하는 사농 공상의 계급이 엄연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급은 서로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서로 대립하며 살았습니까 소위 양반들이 “아랫것들, 상것들”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 말속에 얼마나 인간을 경멸하고 차별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까 이 같은 편견은 오늘날에도 없어지지 않고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로 나뉘어서 보이지 않게 차별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 무서운 관습입니다.

마태가 이 복음서에 족보를 쓸 당시인 2천 년 전에는 이방인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만들었다고 해석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 보기를 짐승 보듯 했습니다. 그런 때에 마태는 족보에 여인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것도 동족이 아닌 이방 여인 라합을 등장시켰고 룻을 등장시켰습니다. 라합은 가나안 출신 여인이고 룻은 모압 출신 여인입니다. 이것은 당시 관습으로 보면 아주 파격적입니다.
그러면 마태는 무슨 의도로 이렇게 했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은 선민이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흑인이나 백인을 막론하고 모두를 수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파격적인 선포입니까 흑인들이 세상 어디에 가서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까 복음이 지니는 의미는 이렇게 깊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근본 문제는 이데올로기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정치로 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나 이상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그곳이 어디든 문제가 해결되고 장벽이 무너지고 인종의 문제가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핵이고 정신이고 중심이고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3. 선악의 수용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했던 대상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로 유대인들로부터 무자비하게 세금을 거둬서 일부를 착복하고 나머지는 로마에 상납하는, 동족을 못살게 굴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를 경멸의 대상으로 삼아 미워하고 증오했습니다. 이를테면 이 세리는 일제 시대에 가장 증오의 대상이었던 친일파와 같은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보다 더 경멸했던 대상은 창녀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간음한 여인을 발견하면 끌어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공개 처형했다는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부류의 사람들을 그 사회에서 가장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마태는 그 족보 속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부정하게 여기는 부류의 사람들을 그대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이 족보를 보면 라합이라는 여인이 나오고 다말이라는 여인도 등장하고 있고 밧세바라는 여인도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모두 누구입니까
라합은 이방인임은 물론이고 전직이 기생입니다. 그리고 다말은 창녀로 변장을 해서 시아버지와 관계해서 아들을 낳은 여인입니다. 밧세바는 남편이 전장에 나가 있는 사이에 다윗과 정을 통한 여인입니다. 마태는 이런 여인들을 버젓이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문중의 족보에 이런 여인은 고사하고 혹 역적이라든가 불명예스럽게 살았던 사람들이라도 들어있다면 가문 부끄럽다고 슬그머니 빼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자신들의 족보를 미화시킬 것입니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일부러 예수님의 족보 속에 이런 사람들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이런 일은 복음만이 가능한 일이고 복음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복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은 창녀도 용납하고 세리도 용납하고 의인도 용납하고 죄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좋은 소식입니다. 마태는 바로 그 점을 말하기 위해서 족보에 이런 사람들을 모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꾸만 사람들의 과거를 문제삼고 과거를 들추는데 그것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과거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서 모두 사함받고 다시 거듭나서 살아가는 오늘의 삶이 얼마나 소망적입니까
그래서 마태는 이 네 여인들을 단순히 예수님의 족보에 삽입시킨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단순히 남녀 평등을 강조한 선에서 끝나지 않고, 이 네 여인의 역할까지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사랍들이 부정하다고 여겼던 다말은 야곱의 며느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야곱은 유다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세라를 낳았다”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다말은 야곱의 며느리가 됩니다. 5절을 보면 기생 라합은 다윗왕의 고조모로, 룻은 다윗의 조모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6절을 보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이 태어나고 그 혈통이 이어져 내려가서 결국에는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마태가 쓴 예수님의 족보를 눈여겨 보면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고 고정관념을 뛰어넘고 세상의 모든 관습들을 뛰어넘는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렇게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해 놓고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예수님도 아니고, 백인만의 예수님도 아니고, 선한 사람들만의 예수님도 아니고, 만민의 구주이시다. 그 예수님은 죄인의 구주이시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청녀들의 구주이시며, 기생의 구주도 되실 뿐 아니라 세리의 구주도 되시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주가 되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이처럼”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입니까 바로 “말로 다할 수 없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고,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선한 사람도 사랑하시지만 세리도 사랑하시고, 기생도 사랑하시고, 창녀도 사랑하시고, 모든 죄인까지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마태는 강조하기 위해서 족보 속에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족보에는 하나님의 이렇게 깊으신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의 해결사입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대강절은 이런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의 아침에 이 같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리며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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