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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일한 대안 (마 0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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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은 너무나 은밀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 밝히 알고 깨닫기에는 무리입니다. 그래서 때로 신앙생활 중에 오해하기도 하고 불신하기도 하고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 깊은 하나님의 생각을 잘 헤아려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깊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하는 데는 남다른 감각이 필요합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족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보면 이 내용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하게 읽어 보면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깊으신 생각이 들어 있고 하나님의 세심하신 계획이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순수한 인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인간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말할 때는 반드시 이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인간의 아들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을 말할 때 신성만 강조해서 말썽이 나곤 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말할 때 신성만 강조하게 되면 십자가의 고난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신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신적인 존재인데 그러면 십자가에 못박혀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큰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곳에 고통이 있었고 아픔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으며 부활이 있었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순수한 인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철저하게 인간의 아들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복음서 첫머리에 이 족보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족보는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되 철저하게 인간이 거쳐야 하는 과정을 그대로 거치도록 해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잉태되는 과정을 거치고, 출생하는 과정을 거쳐서 30년 동안 우리들과 똑같은 과정으로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의 사역 기간에도 사람들이 겪는 수난과 고통을 고뇌를 모두 거치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이 겪는 배고픔도 거치고 우리들과 똑같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순수한 인간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만이 느끼는 눈물도 흘렸습니다. 또 죽은 자 앞에서 인간의 한계와 무력감에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운명 직전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고 울부짖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철저하게 인간임을 나타내는 모습들입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 가시가 찌르듯 하리라.” 그런 형용사를 달고 태어나신 예수, 얼마나 고통의 인생을 살았습니까 그러기에 이 족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이 같은 예수의 고난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당하는 아픔, 고뇌, 배고픔, 눈물을 먼저 체험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 땅에 오시는 예수는 철저하게 제물로 오신다는 점을 밝혀 주려고 인간에게나 필요한 족보를 복음서의 첫머리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족보를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잘 표현해 놓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역사의 주관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역사의 주관자”라는 것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그대로 기록해 놓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때가 가장 부흥하던 융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얼마나 나라가 부흥했겠습니까 다윗 때는 천하를 통일했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시대는 그 나라가 가장 크고 넓게 명성을 떨쳤던 때입니다. 그래서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나라를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지금의 예멘이라는 나라에서 2,400㎞, 6천 리를 마차를 타고 예루살렘까지 왔고 직접 보고나서 “(왕상10:9)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하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 부와 융성 뒤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성경은 그 부귀와 융성은 모두 하나님이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배후에서 그 역사를 운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융성기에만 함께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430년간의 고난의 역사와도 함께하셨습니다. 실낱 같은 운명의 노예로 살던 그 처절했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이를 낳을 권리도 없었던 때입니다. 노동이 너무 가혹해서 아이를 만들 여력도 없었꼬 낳았다 해도 강물에 버려야 했던 때입니다. 그렇게 몰락한 백성들을 하나님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게 해서 구원하십니다. 그 창일하던 홍해, 그 홍해를 기적같이 갈라 놓으시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강을 육지같이 건너가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영화의 화면으로 볼 때도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그래서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지 않습니까 얼마나 통쾌하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렇게 나타나지 않으면 그게 무슨 기적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거짓말 같은 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는 믿음이 없이는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교회학교 교사가 홍해를 건넜다는 이야기가 하도 거짓말 같아서 홍해를 직접 가 보았다고 합니다. 가 보니까 홍해가 둘이었습니다. 하나는 강물이 넘실대는 홍해였고 또 하나는 갈대가 우거진 갈대밭이었습니다. 안내자는 그 둘을 보여 주면서 각자 믿음대로 둘 중 하나를 믿으라고 하더랍니다. 강물이 넘실대는 강을 가르고 건넜다는 것이 믿어지면 그것을 믿고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허황되다 싶으면 갈대밭을 그냥 걸어서 건너갔을 것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교사는 “그러면 그렇지, 갈대밭을 건넜겠지 어떻게 저렇게 물이 넘실대는 강을 걸어서 건널 수가 있었겠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교사가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홍해는 깊은 강이 아니고 가서 보니까 갈대밭이었어요.” 그랬더니 아이 하나가 “선생님, 그렇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렇게 잘 훈련된 애굽의 군대가 갈대밭에서 빠져 죽었다니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고 말하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의 이성으로 짜 맞추려고 하면 이런 시험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적인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은 그런 모습으로 개입하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뒤로도 많은 수난을 당합니다.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앗수르에게도 망했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회생하려고 했을 때 바사와 메대에게 망합니다. 그리고 헬라에 또 망합니다. 헬라가 망해서 다시 회복되려고 할 때 또다시 로마에 짓밟혀 버립니다. 그런 역사를 거치는 동안 이 백성들이 얼마나 뼈아픈 고난을 겪습니까 이 족보는 그런 내용을 자사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역사를 들여다 보면 그 속에 이런 고난이 배어 있습니다.
이 백성들이 이렇게 수난을 당하고 쇠망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이 땅에서 흔적까지도 없어지려 할 때 하나님은 그 뿌리에서 예수님을 탄생시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끊어질 듯 하려 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망하려 할 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다시 일으켜 놓습니다. 이것이 이 족보 속에 나타난 역사의 줄거리입니다. 얼마나 희한한 일입니까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책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성경이고 둘째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승들을 모아놓은 미쉬나라는 책이고 세 번째는 탈무드입니다. 탈무드는 이스라엘이 수천년 동안 뼈 아픈 생활 속에서 체험하고 겪은 이야기들을 담아 놓은 책입니다. 그 혹독한 고난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겪고 깨달은 지혜와 진리들을 천 명의 학자들이 10년 동안 수집해서 모두 20권 12,000페이지로 엮어놓은 책이 탈부드입니다.
이 책이 지니는 특징은 한 페이지는 교훈을 기록해 놓았고 그 옆 페이지는 빈칸으로 남겨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 빈칸은 옛 조상들이 살아가면서 느끼고 체험한 교훈을 적어 놓았듯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고 체험하는 교훈과 깨달음들을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인생을 어떻게 함부로 살겠습니까 그런 지혜는 고난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와 경험드을 통해서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그들의 역사에만 나타나겠습니까 자세히 보면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오늘 우리의 일생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오신 일생을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그곳에도 하나님의 이 같은 섭리는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알고 보면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그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뒤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 같아도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분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살아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성자가 일생을 다 살고 주님의 영접을 받으며 천국을 갑니다. 천국 문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다보니까 선명하게 나타나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보입니다. 이 성자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한 사람의 발자국은 분명 제 것인데 다른 발자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그것은 항상 네 곁에서 함께 걸어간 내 발자국이란다.” 주님은 성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곁에서 항상 동행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자는 다시 일생을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시절을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발자국이 하나박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자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가장 어려웠을 때는 어디 가셨습니까 왜 제 발자국만 보입니까” 그때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때 네가 너무 어려워 해서 내가 너를 업고 걸어갔단다. 그 발자국은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란다.”
지금 우리 곁에 주님이 이렇게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미래도 너무 부정적으로 보거나 너무 지나치게 불안해 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사탄이 지배한다면 몰라도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어차피 역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대한 뜻대로 움직입니다. 이런 점을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3.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모순이 참 많은 사람들입니다. 가장 큰 모순은 유대인들의 우월감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습니까 얼마나 교만하고 자만하며 우월감이 강했습니까 이 유대인들은 어떻게 보면 이 세상 사람의 모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교만하고 자만하며 허황된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무리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얼마나 짐승 보듯 했습니까 세리를 어떤 눈으로 보았습니까 간음한 여인을 부정하다고 돌로 쳐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만감에 도취되어서 살았습니다.
어느 유대인 소경이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동전 하나를 던져 주고 갔습니다. 이 소경이 참 좋아했습니다.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이 지금 동전을 던져 준 사람은 세리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 소경은 주저하지 않고 그 동전을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모순된 생각입니까 이것이 허황된 우월감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무서운 죄입니다.
마태는 이 같은 유대인들의 모순을 족보를 통해서 보기 좋게 고발합니다. 그렇게 교만한 백성들에게 마태는 힐난합니다. “웃기지 말아라. 너희들이 지금 교만을 떨고 있지만 너희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이 족보 속에 버젓이 들어 있는 여인들을 보아라. 이들이 누구냐 밧세바가 누구며 다말이 누구냐 또 라합이 누군데 너희들 족보 속에 들어 있느냐 그들의 부정한 피가 지금 너희들 몸속에 흐르고 있지 아니하냐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 너희는 이제 더 이상 교만 떨지 말고 회개하라!” 얼마나 신랄한 고발입니까 이 족보 속에는 이 같은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누가 이 같은 마태의 물음에 답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그들만의 모순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역시 교만할 까닭이 없는 것은 우리들의 몸속에 지금 흐르고 있는 피도 그 피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자만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누구 앞에 나서서 누구를 탓하고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자격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교만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뿐 아니고 우리들의 조상도 거슬러 올라가면 역시 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참 더 올라가 보면 우리의 피는 아담의 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몸속에서는 지금도 타락한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잔인한 가인의 피도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정한 피가 우리들이 몸속에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를 탓하며 교만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태는 이렇게 책망한 다음 복음서에 나타난 족보 끝에 가서 “그러면 이렇게 더러워진 피를 어떻게 정결케 할 수 있는가” 질문하고 나서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피로 씻으면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절에 가서 “예수님이 여기에 있다”하고 예수를 소개합니다. 얼마나 극적인 장면입니까 이것이 이 족보가 주는 결론이고 교훈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예수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는 모든 것의 대안입니다. 그래서 축복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모든 것의 해결책입니다. 이 땅에 예수께서 오신 것은 그래서 축복입니다. 그 예수가 있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그가 오심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신 이 기간을 대망하면서 보내는 것입니다. 이 대강절 아침에 우리 주님의 이 같은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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