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의 지름길 (마 15:21-28)

첨부 1


오늘 시대는 모두 빠른 것을 원합니다. 지름길을 좋아합니다. 속성과를 좋아하고, 빨리빨리를 좋아합니다. 신속한 결과를 좋아합니다. 신앙의 길에도 지름길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떠나시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두로와 시돈은 서로 이웃 하고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아합시대의 그 유명했던 왕비 이세벨이 바로 이 시돈 지방 출신입니다. 즉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이 이세벨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두로라는 곳에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한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 여인을 통해서 만족함을 얻으시게 됩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한번도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소문으로 들었고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입니다. 이 여인이 듣자니까 예수님은 기적을 행한다고 했고, 병자를 고친다고 했고, 귀신을 내쫓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그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으로만 듣던 그 예수님이 지금 두로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28절을 보면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십니다. 이 여인은 딱 한번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큰 은혜를 입었고, 그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오늘 읽은 성경 속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보면 이 여인에게서 세 가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귀신 들린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딸의 병을 고쳐 보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백약이 무효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딸만 쳐다 보면 불쌍해서 결딜 수가 없습니다. 왜 내게 이런 고된 시련이 오는가 하는 생각에 고민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딸이 죽을 것만 같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평화도, 기쁨도, 안정도 올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딸의 병을 고치는 것을 생활의 최우선으로 삼고 여기에 온 마음과 신경을 쏟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그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병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그냥 있다가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 편작이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임금님을 만났는데 안색을 보니까 임금님의 몸에 병이 있습니다. 그래서 “몸에 병이 있습니다” 하고 진언을 했더니 임금님은 괜찮다고 대답합니다. 다음에 또 임금님을 만났을 때 보니까 몸이 좋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몸이 좋지 않습니다.” 하고 또 진언을 하니까 임금님이 대답하기를 “약 팔아 먹을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까지 와서 약을 팔아 먹을 셈이냐”고 화를 냅니다 얼마 있다가 세 번째로 임금님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이 편작이라는 의사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임금님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의사를 향해서 “왜 오늘은 말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이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병이 몸 밖에 있어서 침만 맞아도 치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는 병이 몸 속으로 들어가서 뜸만 뜨면 치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병이 뼈속까지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침으로도, 뜸으로도,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그 임금님은 죽었다고 합니다.
이 임금님은 경고를 했는데도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지금 병이 깊어 가고 있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자기 자신이 심각한 병자인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모르면 죽습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그곳에 나아만이라는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이 나옵니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임금님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몸이 썩어 들어가는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다가 계집종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서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갔더니 선지자 엘리사가 방에 앉아서 내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러고는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합니다. 얼마나 우수운 이야기입니까
자기 나라에도 강이 많습니다. 요단강보다 더 맑고, 더 깊은 강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는데 내다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기만 하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몹시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그냥 돌아갑니다. 가는 도중에 시종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장관인 줄만 알지 자신이 문둥병자인 줄은 모르십니까 더 어려운 일을 시켰어도 그대로 하셔야 할 것인데, 몸을 씻으라는 일을 못하십니까 시키는 대로 가서 씻으십시오.” 나아만이 그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시종의 말대로 가서 씻었더니 금방 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문제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 자신의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문둥병자라는 사실을 모르면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이 장관인 줄만 알고 문둥병자인 줄은 모르면 병을 못 고칩니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병원에 입원을 해서 임종이 가까아 오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예수를 모른 채 그냥 죽을까 봐서 안타까워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예수 영접하고 구원받으라고 하면 믿기는 뭘 믿느냐고 고집을 부립니다. 얼마나 무지한 고집입니까 모르면 결국 망하는 길밖에 없고, 그래서 결국 죽고 멸망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 이 나아만이 그랬습니다. 지금 살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이 지금 소이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사가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기분 나쁘다고 그냥 돌아갑니다. “내가 장관인데”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종이 한심해서 그를 일깨워 준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장관이기 이전에 문둥병자인 것을 아십시오.”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밝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고칠 수가 있습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지금 이 여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 중에서 최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딸의 병을 고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곳에도 행복이 없고, 기쁨이 없고, 평화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그렇게 자신을 철저하게 잘 알고 있으니까 예수께 찾아가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둘째 이 여인에게는 뜨거운 열망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는 일은 가벼운 장난이 아닙니다. 한번 살아보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다부진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흐리멍텅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답답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늘이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요행을 좋아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요행도 오지를 않습니다. 삶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고,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이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뭔가 이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틀림업이 내 딸이 고침을 받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만사를 제쳐 두고 갔더니 제자들이 길을 막습니다.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에게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뜻이 분명했습니다.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 여인의 길을 누가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어떤 일에 목적이 분명하기만 하면 방법과 길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제자들이 길을 막으니까 소리로 직접 호소를 했습니다. 22절을 보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의 그 음성은 확신과 믿음과 모성이 깃들은 음성입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비장하게 들렸겠습니까 지금 자식이 죽어가고 있는 판국인데 무서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서 한 가지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요구해서 한 되면 “부르짖으라”고 했습니다. 또 성경은 “입을 크게 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채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최대의 장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존심이고 체면입니다. 어떤 분은 처지가 아주 딱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죄가 많아서 못 믿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도 처지가 딱해서 “함께 기도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하지 않다가 문제가 터지니까 염치없이 기도를 합니까” 그럽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겸손한 말같이 들리지만 사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주님께서 죄 지은 자는 오라고 했지 않습니까 주님게서 기도하라고 했는데 왠말이 그리 많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일으로가 아닌 “내 입으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어머니의 기도도 중요하지만 “내 입으로 직접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속은 지금 곪아 터지고 있는데 체면이 다 뭡니까 자존심이 무슨 도움이 됩니까
성경은 직고하라고 했습니다. 나의 무지, 나의 나약함, 나의 딱한 처지를 내놓고 솔직히 고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제자들이 길을 막으니까 예수께 직접 대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지금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체면이 다 뭡니까 자존심이 병을 고쳐 줍니까 이 여인 같은 사람에게는 분명히 길이 열립니다.
인생은 책임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되 책임 있게만 살면 기회는 하늘이 주고, 방법도 하늘이 주고, 무엇인가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삶에 대한 열망을 보게 됩니다. 문제를 풀어 보려고 하는 굳은 의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방법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가는 데도, 신앙 생활을 하는 데도, 열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셋째 이 여인에게서 무서운 각오를 보게 됩니다.

이 여인에게서 우리는 “이것이 아니면 길이 없다” 하는 사생 결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가기만 하면 문제는 다풀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서 고쳐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으로부터 반응이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반응은 “묵묵 부답”입니다.
22절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그랬더니, 23절에는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부정합니까 이것은 모욕입니다. 그래서 더 큰 소리로 호소를 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랬더니 계속 무반응이었습니다. 계속 소리를 지르니까 제자들이 예수께 “한 말씀 해서 보내시지요” 그럽니다.

그때 예수님이 두 번째 반응을 보이십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인간 차별의 말씀입니다. 24절을 보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다시 말하면 내가 온 것은 내 백성을 위해서 왔지 이방인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큰 모욕입니까
여러부, 사람이 살다가 가장 슬플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무시당할 때입니다. 차별 대우를 받을 때입니다. 사람이 못 배웠다고 무시를 당할 때, 가진 것이 없어서 무시를 당할 대, 집이 없어서 무시를 당할 때, 이때가 가장 슬플 때입니다. 서럽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께 찾아오기만 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예수께 와서 도와 달라고 하니까 한 동안 대꾸도 없다가 하는 말이 “너는 내 동족이 아니니까 도와줄 수 없다” 그럽니다. 이를 테면 민족 차별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보십시오. 어지간하면 그쯤에서 포기해 버리고 말았을텐데, 더 큰 소리로 “내 딸을 고쳐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랬더니 세 번째 반응이 나옵니다.
26절을 보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그럽니다. 이 여인을 개 취급합니다. 이것은 모욕의 극치입니다. 여러분, 욕 중에서 가장 모욕적인 욕은 모두 “개”자가 들어가는 욕입니다. “개 같은 X X”, 이 욕을 듣고 가만 있을 사람 없습니다. 이쯤 되면 딸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냥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면 결국은 나만 손해입니다. 여기서 포기하면 내 딸은 죽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27절에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럽니다. 이 말은 “옳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개에게도 부스러기는 줍니다. 큰 덩어리는 당신의 백성에게 주시고 나에게는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그것이라도 주십시오.” 그런 말입니다.
얼마나 집요합니까 딸의 행복을 위해서, 딸의 치료를 위해서, 내 딸이 고침을 받기만 한다면, 그 일념으로 이 여인은 온갖 수모도, 마다하지 않고 집요하게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이 같은 집념을 가지고 세상을 산다면 누가 그 앞길을 막겠습니까 운명이 그 앞길을 막겠습니까 사람이 막겠습니까 사탄이 어떻게 그를 시험할 수 있겠습니까
“주여 그 말씀이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내게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주십시오.” 그때 주님은 그 여인을 보시고 인자하신 얼굴로 극찬하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러분, 오늘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철야도 합니다. 금식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도 별로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여인은 단 한번 예수를 만났는데도 은총을 입습니다. 믿음을 인정받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밀고 나갔던 것이고, 그 결과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신앙의 지름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자기 성찰입니다. 거기서 신앙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 이 여인을 통해서 중요한 교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