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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헤롯의 과욕 인생 (마 02: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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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는 가을의 결실을 바라보고 짓습니다. 농부가 여름 내내 땀을 흘리고 수고하는 것은 가을에 가서 풍년을 경험하고 추수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농사 짓는 일이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기쁨 때문이고 그 즐거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에게는 천직 의식이 있습니다.
그렇게 농사를 지어 농사가 잘되면 그것을 풍작이라고 합니다. 풍작을 이룬 해에는 곡식알이 실하고 빛깔이 아주 좋습니다. 그런 결실을 맺은 들판의 모습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은 넉넉하고 만족스럽습니다. 그때는 농부들이 농사를 짓느라고 여름 내내 수고하고 고생한 시름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마음에 흐믓함과 보람이 가득합니다. 농부는 그런 맛에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농사가 매년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수고를 했는데도 농사가 잘 안 되면 그것을 흉작이라고 합니다. 그때 곡식들을 보면 여물지 못해서 빈 껍데기가 많습니다. 빛깔도 좋지 않고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농부는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오고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또한 농사를 짓는데 풍작도 아니고 흉작도 아닌 보통 수준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평년작이라고 합니다. 농사는 이런 때가 많습니다.
농사뿐만이 아닙니다.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아주 만족스러운 작품이 만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작품을 걸작이라고 합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습니다. 작품 생활을 하다 보면 더 아끼고 관심이 가는 작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을 새워 가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해서 다 걸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작품은 공을 들여서 만들었는데도 도저히 보아 줄 수 없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실패작”이라고 합니다. 그 작품을 보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어떤 이들은 붓을 꺾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실패작도 아니고 걸작도 아닌 어중간한 작품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마음 놓고 내놓을 만한 작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깝고 그저 그런 작품이 만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작품을 가리켜서 “가작”이라고 합니다. 1등은 못 되어도 2등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농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작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생도 마찬갖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갑니다. 그의 인생을 종합해 볼 때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평가는 자기가 내리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내려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살아 있을 때가 아니고 죽은 후에 받는 평가가 가치 있습니다. 죽은 후에 내려지는 평가가 진정한 평가입니다.
어떤 분들은 죽고 난 후에 “그 사람은 과연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리고 “과연 큰 그릇이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런 사람은 죽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자손들 보기에도 떳떳한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걸작 인생이고 풍작 인생입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죽고 난 후에 “그 사람은 좀스러웠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평생을 호화롭게 살았어도 그 인생이 실패작이라고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평생을 호화롭게 살고 고관으로 살았다고 해서 다 성공한 인생은 아닙니다. 이완용 같은 사람은 외견상으로는 대단히 성공한 사람같이 보이지만 누구도 그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실패자로 평가하고 낙인을 찍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일평생을 초라하게 살았다고 해서 그 인생을 실패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 호화롭게 살았다고 해서 그를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살아간 모습대로 평가를 받습니다. 일생을 다 산 후에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인생이지만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서 죽으시기까지 그 주변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 특별한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고 빌라도나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도 있고 여러 명의 무명의 여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데 그 중에서도 독특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에 나와 있는 헤롯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에서의 후손으로 정통 유대인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의 이름이 뜻하듯이 50여 년간 이름값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또 아주 교활해서 로마 정권이 자주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면서 유대인들을 지배했습니다.
헤롯은 당시 사정으로 보아서는 나름대로 입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세에 능하고 때로 아첨도 할 줄 알고 해서 로마 정부에 의해 분봉왕으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핏 보면 그의 인생이 성공한 사람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사람의 인생은 실패작입니다. 그 이유가 본문에 몇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1. 모든 사람이 그가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살았으면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기다렸겠습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이 사람의 인생은 실패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기를 기다렸다는 것은 일종의 모욕이고 저주입니다. 그 인생이 얼마나 악했으면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기다렸겠습니까
이 헤롯은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말을 듣고 당시 2살 미만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합니다. 그때 죽은 아이들이 적게는 1,400명, 많게는 모조리 죽였다고 주석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무작위로 학살당할 때 “(마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고 했습니다. 오죽 했겠습니까
마크로비우스라는 사람이 쓴 축제라는 책을 보면 “헤롯은 2살 미만의 아이들을 죽일 때 자기 아들도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권세에 미친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이 사람이 자기 동족을 알았겠습니까 민족의 독립에 관심이나 가졌겠습니까 헤롯이 자기 아들도 죽였다는 소식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듣고는 말하기를 “차라리 그 아들은 돼지로 태어난 것만도 못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사람들이 헤롯을 얼마나 원망하고 저주를 하면서 죽기를 기다렸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을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간혹 보면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듣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독하다는 말을 듣고 살면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원망을 들으면서까지 철저하게 이득을 챙기고 부를 축적하고 자신의 입지만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다. 남에게 특별한 도움을 주지는 못하고 은혜는 끼치지 못하더라도 손해는 끼치지 말아야 하고 원망의 대상이 되도록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그 사람은 참 괜찮은 사람이다”는 평가를 받고 살아야지 “그 사람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경우가 인생의 실패작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되 너무 유별나게 살지 마십시오. 그리고 특별하게도 살지 마십시오. 사람이 왜 특별해야 합니까 평범하게 사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에게 원망을 듣지 마십시오. 또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 너무 깎지 마십시오. 성경책을 옆에 끼고 시장에 가서 지독하게 물건 값 깎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쟁이들은 다시는 거래할 상대가 못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언제나 손해보는 입장에 서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언제나 이득만 보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인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때로 손해도 보는 때가 있어야 이득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손해 보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 그 인생이 부드러운 모습으로 만들어져 갑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 자연스럽게 신앙인의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마음과 생각과 생활에 따라서 그 모습이 그대로 만들어지고 가꾸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모습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신앙인에게서는 신앙인의 모습이 나와야 합니다. 신앙인의 모습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입니다.

저는 언젠가 신학교에 강의를 하기 위해서 전도사님과 함께 길을 걷다가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고 가야지 하는 생각에 가계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가계 주인이 나를 함참 처다봅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고 불으니까 저를 보고는 혹시 목사님아니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얼굴 모습이 목사닙처럼 보입니다. 그럽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얼굴 모습이 달라보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그렇지요, 그런 줄 알았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곁에 있던 전도사님은 사모님이셔요라고 묻더라고요. 저는 오랬동안 제 모습에서 목사 냄새가 나지 않아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제 마음이 얼마나 흐믓한지 아이스크림 보다 더 시원함을 느꼈고 그날 강의가 즐거운 강의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독하게 살면 그 모습이 독하게 만들어지고 그 인생이 독해집니다. 때로 손해도 보고 세상을 부드럽게 살면 모두가 부드러워 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모두 좋아합니다. 이렇게 살면 이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곳입니다. 이웃들에게 좀 포근한 사람이 되어 주고 때로는 손해도 좀 볼 줄 알고 살아가면 이 세상은 그렇게 저속하고 죄많고 타락한 그런 곳만은 아닙니다.

얼마전에 어느 잡지를 보니까 현대중공업에서 직원 부인 600명에게 조사한 통계가 나왔습니다. ‘남편이 가장 존경스러울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아내의 인격을 존중해 줄 때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데도 묵묵히 들어 줄 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결혼을 한다 해도 지금의 남편과 다시 결혼하겠다고 응답을 했습니다. 아내를 비롯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손해를 볼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오죽 악하게 살고 손해를 보지 않고 살았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죽기를 기다렸겠습니까 그렇다면 해롯의 인생은 철저하게 실패 인생입니다. 흉작 인생이고 졸작 인생입니다.

2. 그의 죽음을 환영했습니다.
“(마2: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마2: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헤롯이 죽기를 고대했다는 말이고 죽은 후에는 환영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았으면 죽었다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합니까
가끔 보면 그 사람이 죽은 후에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이 평생 주색 잡기와 노름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한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장이 죽고 난 후 가세가 회복되고 일어납니다. 또 독재자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온 나라가 혼란스럽고 백성들이 억압을 당하고 비탄에 빠지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독재자가 죽고 나니까 나라가 조용해지고 잘됩니다. 또 어떤 여인들은 포악스러운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불행하고 억압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면서 기를펴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그 남편이 죽고 나면 활짝 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인생들을 가리켜서 실패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한평생 로마의 보호 아래 녹을 먹고 권세를 누리며 잘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인생은 실패작입니다. 완전히 실패한 흉작 인생입니다.

3. 그의 죽음이 흉칙했습니다.
헤롯은 70세의 나이로 병들어 죽습니다. 그 병이 어떤 병인가 하면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내장이 썩고 벌레가 나고 악취가 나서 죽는데 죽을 때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죽어서 그 얼굴이 마치 괴물 같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헤롯은 죽을 때 가장 흉칙스런 모습으로 비참하게 죽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종말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죽은 모습도 중요합니다. 두고 두고 감명을 주는 모습으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도 싫은 모습으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온몸에 충이 나 썩어 가면서 죽었다면 그 죽음이 얼마나 욕된 죽음입니까 헤롯이 그렇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을 악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가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돌맹이나 흙과 같은 무생명의 존재는 다만 “있다”는 차원에서만 살아갑니다. 그래서 돌맹이나 흙은 자유가 없습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풀이나 개와 같은 동식물들은 “자란다”는 차원에서만 살아갑니다. 나무는 크게 자랄 뿐이고 개는 큰 개로 자랄 뿐입니다. 식물이나 개는 아무리 커도 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있다”는 차원을 훨씬 넘습니다. 그리고 “자란다”는 차원도 넘습니다. 무엇인가 “만든다”는 고차원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사람은 성숙한 인간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가 죽기를 기다리고 마침내 죽으니까 모두들 그렇게 기뻐했다면 그 인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셨으니 그분이 사역하시는 동안 얼마든지 그 사역에 보탬이 되고 도움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몇 안 되는 그 악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헤롯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를 위해 얼마만큼이나 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간 모습대로 우리의 인생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 평가는 오직 나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모습 여하에 따라서 나의 인생의 모습이 내일 나타날 것입니다.
어제 20세기 한국인이라는 CTN(교양) 방송국에서 기획시리즈로 방송한 인물이 있는데 김활란여사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여성교육의 선구자로서 이화여대 초대총장 김활란여사를 그는 강한 유교적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여성교육의 선구자였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일제 말기 제자들을 향해서 징병과 위안부 참여를 주장하기도 했다면서 그를 평가하는 모습을 방영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후대에 가서 칭찬은 못 들을망정 실패한 인생이라고 듣지 않는 성공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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