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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마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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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동안 주일은 모두 52번이 있습니다. 그 52주 가운데 교회력이 어오늘로 마지막입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매년 교회력은 대강절부터 시작해서 오늘로 끝이 납니다. 대강절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준비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독일 교회에서는 오늘 주일을 “죽은 자의 주일”이라고 해서 한해 동안 돌아가신 이들을 추모하고 그 가족들을 위로하는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면서 지키는 의미 있는 주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미래는 장차 있을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초점은 언제나 미래에 두고, 다가올 심판에 두고, 그리고 언젠가 주어질 천국에 뜻을 두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장차 있을 심판과 재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심판과 재림의 날을 우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혼인잔치에 비유를 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전통적인 혼인식은 밤늦게 시작됩니다. 밤늦게 손님들이 신부의 집으로 모여들고 신부의 들러리들인 열처녀는 손에 각각 등불을 준비해서 신부집을 밝게 비추면서 신랑이 도착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면 보통 자정을 전후해서 신랑이 오는데 신랑이 올 때는 신랑 친구들이 또 각각 등불을 들고 신부집으로 오며 그때는 온 집안이 밝은 빛으로 찬란하게 됩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 올 때는 모두가 영접을 해야 하는데 성경을 보면 기다리던 신부를 비롯해서 열처녀들이 모두 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처녀들은 깨어 보니 등잔에 기름까지 떨어져서 기름을 넣으려고 기름집을 찾아간 사이에 찬칫집의 문은 닫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신랑이 언제 올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장차 이 땅에 재림하실 예수님의 모습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 땅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고의 말씀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이런 설교를 하면 농담으로 여겨 버립니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로 돌려 버립니다. “또 그런 황당한 설교냐”하고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강단에서는 심판이니 재림이니 천국이니 하는 설교들이 자꾸만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꾸만 윤리적인 설교, 복을 받는 설교만 행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오늘만 있는 현상은 아닙니다. 옛날 그 시대에도 이런 현상은 있었습니다. 장차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몇 번이고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오늘 사람들처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그날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나자 사람들이 모두 얼마나 혼란을 겪었습니까
창세기 19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나옵니다. 그 이야기를 보아도 똑같습니다. 소돔성이 타락합니다. 심판의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천사들이 소돔성에 잠입했습니다. 이 천사들이 롯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고 가족들을 데리고 빨리 성을 탈출하라고 일러 줍니다. 그래서 롯이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급히 달려갑니다.

1. 사위들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심판의 천사들이 이 성을 심판하러 왔으니 빨리 탈출하자”고 말합니다. 롯에게는 부인도 있었고 두 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롯은 사위들에게 먼저 찾아갔습니다. 가족들을 이해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두 사위는 소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설득시키는 데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사위들은 장인을 참 잘 만난셈입니다. 그 어두운 시대에 이런 비밀스런 계시를 받아가지고 와서 구원받을 길을 제시해 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계시가 없는 사람은 이렇게 중대한 사건 앞에서도 그것을 농담으로 여거버리는 우매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베들레헴 땅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였다더라”고 말합니다. 그때 사람들의 반응은 “설마”입니다. “설마 그 작은 고을에서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였습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농담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 예수가 자라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데도 사람들은 “설마 그가 메시아랴”하고 그냥 넘깁니다. 그러다가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어 가는 모습을 눈여겨 바라보던 제사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입니까
그뿐입니까 노아가 방주를 만듭니다. 그것도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합니다. “얼마 있으면 이 땅에 대홍수가 납니다. 그러면 이 세셍이 모두 물에 잠겨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니 모두 준비를 하십시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노아를 정신 이상자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큰 사건 앞에서는 언제나 이런 과정이 나타나고 이런 반응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그 땅에 대홍수가 일어납니다. 비현실적이었던 이야기가 어느 날 현실로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때서야 사람들이 방주로 몰려가 문을 열어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떼를 쓰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렇게 먼 이야기는 그만두고 가깝게는 400년 전 이퇴계가 얼마나 일본을 경계하라고 강조했습니까 일본이 반드시 이 땅에 쳐들어 올 것이니 군사를 길러야 한다고 얼마나 십만양병론을 주장했습니까 그때 사람들은 모두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모두 현실성 없는 이야기로 넘겨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퇴계가 죽은 지 2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습니다. 그때서야 사람들이 얼마나 땅을 치고 안타까워 하면서 울었습니까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발생된 때를 보면 반드시 이런 과정이 있꼬 이런 반응들이 나타났습니다.
“농담으로 여겼더라”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그 심각한 말을 왜 농담으로 여겼습니까 그것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현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가능성을 믿고 확률을 믿습니다. 가능성과 확률이 없으면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현실과 확률도 믿어야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약속”과 “계시”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롯의 사위들은 불행하게도 이런 약속이 주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인의 말을 듣고 생각도 해보지 않고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을 그토록 사랑하는 장인이 와서 간고하게 호송하는 데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그냥 쉽게 농담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잠시 후 그 장인의 말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그들이 얼마나 참담해 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앞날에도 그런 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야 합니다.”

2.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롯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서 부인을 찾아갑니다. 그러고는 “지금 소돔성에 심판의 천사들이 와서 이 성을 심판하겠다고 하니 빨리 이 성을 탈출하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부인도 남편을 참 잘만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신앙은 남편보다 부인이 더 좋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부인이 먼저 믿고 나중에 남편이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롯의 경우는 남편이 더 영적으로 순수했습니다. 그래서 롯이 빨리 도망가자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랬더니 나오는 반응이 “망설임”입니다. 다급한 남편의 말을 믿어야 하겠는데 또 한편 망설여집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삶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현재의 삶에 미련이 많습니다. 뒤에 깔아 놓은 것이 많습니다. 이 좋은 집과 많은 재산들, 이것을 포기하기에는 미련이 너무나 큽니다. 현실이 아무리 급해도 손쉽게 발걸음이 떨어질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미련이 생깁니다. 남편이 다급하게 손목을 잡고 끌고 나갔지만 자꾸만 뒤를 돌아다봅니다. 그러다가 결국 이 여인은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가운데서 참 불행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하는 데는 여러 가지의 장애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장애물은 이 “미련”입니다.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를 선뜻 끊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선뜻 짜라나서지를 못합니다. 자꾸만 뭉그적거립니다. 자꾸만 두고 보자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자”고 하면 “다음에 가지요”합니다. “오늘 당장 갑시다” 하면 “내일 가지요” 그럽니다. 그것이 모두 미련 때문입니다.
사탄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회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신자들을 쉽게 넘어트릴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사탄이 나서서 “신자들을 모두 병들게 합시다” 하고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사탄이 말하기를 “그러면 신자들은 더 열심히 기도할 것입니다.” 그럽니다. 다른 사탄이 말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을 핍박합시다.” 또 다른 사탄이 말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더 울면서 떼를 쓰며 시도할 것입니다.” 그때 어느 노련한 늙은 사탄이 권위 있게 제안했습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열심히 기도하게 합시다. 그리고 성경도 많이 읽도록 합시다. 단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읽되 ”내일부터 하자“하는 마음을 넣어 줍시다.” 그때 결의된 것이 오늘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붙잡고 교회에 가자 하면 “다음에 가지요”하는 것입니다. 오늘 집에 가셔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가족들에게 교회에 가자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다음에”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롯의 부인은 그 망설임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치고 소금기중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롯의 부인은 현대인들의 모형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꼭 롯의 부인처럼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자꾸만 내일로 미룹니다. 그러다가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맙니다.

3. 아브라함의 놀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심판의 천사들을 소돔성에 보내 놓고 얼마나 노심초사 기다렸겠습니까 그곳에는 조카 롯의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열 명의 의인이 없습니다. 분명히 심판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도 설마 하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갑자기 소돔 하늘에서 옹기점 연기가 솟아 올랐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설마 하고 우려했는데 그것이 사실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이 소돔성이 어떻게 망했는지 아십니까 불로 망했다고 했습니다. 불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불은 어떤 불입니까 성경은 “유황불”이라고 했습니다. 그 유황불이 마치 비같이 내렸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 유황불이 앞으로 우리의 미래에도 그렇게 내려서 심판을 한다고 했습니다. 노아 때의 심판은 물로 내렸지만 앞으로 있을 심판은 그렇게 불로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옹기점 연기는 “버섯구름”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버벗구름을 어디서 보셨습니까 핵무기 실험할 때 피어오르는 연기가 바로 버섯구름 아닙니까 한번 번쩍 하면 끝입니다. 롯의 부인이 그 번쩍 하는 빛에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큰 도시도 한번 번쩍하면 그것으로 이 세상은 조용해집니다. 끝나 버리고 맙니다.
아브라함이 설마하고 기다렸는데 그 설마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소돔성은 그날로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한순간에 일어났습니다.
롯이 잘 살아 보겠다고 소돔성을 찾아갔습니다. 가서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재산도 늘렸습니다. 식구도 늘었습니다. 결혼해서 아내도 얻었고 두 딸을 낳아서 잘 키웠습니다. 이제는 살 만큼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때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고 두 사위는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재산, 좋은 집, 모두 불타 머리고 두 딸과 간신히 도망해서 겨우 생명만 건졌습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얼마나 창피한 모습입니까

여기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해 주는 교훈이 많습니다. 언젠가 그날이 갑자기 오면 그때도 이 롯과 같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모으느라고 애쓰고 수고한 모든 것들이 속절없이 그냥 타버리는 그날이 언젠가 현실로 우리 앞에 그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게게 혼인잔치의 비유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황당한 이야기로 보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 이야기들이 언젠가 노아 때의 사람들처럼, 소돔성의 두 사위들처럼 그렇게 현실로 다가올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약곳으로, 계시로, 예언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교회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들이 다시 한번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날”입니다.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살던 그날, 어떻게 보면 현실성 없어 보이는 그날, 그날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그날은 약속되어 있는 날입니다. 그날은 성경에 여러 번 예언되고 계시되어 있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날을 생각하면서 준비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날이 소돔땅에 어느 날 갑자기 현실로 찾아왔듯이, 노아의 방주가 예언 그대로 물위에 떠올랏듯이, 한창 자고 있는 데 신랑이 갑자기 찾아왔듯이 그날은 그렇게 올 것입니다.
한해를 보내면서 우리 생활도 점검해 보고 그날도 한번 점검해 보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날은 오직 깨어 있는 사람들만 소유하고 기뻐할 수 있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신령한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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