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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은 성적순이다 (마 25: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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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전, 후기 입시가 모두 끝났습니다. 지금쯤 합격한 학생들은 여유가 있을 것이고, 실패한 학생들은 아마 인생을 실패한 것처럼 실망에 사로잡혀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학생들은 지금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하고 자위하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행복은 성적순이다”라고 정했습니다. 몇 해 전인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제목의 청소년 영화가 있었습니다. 당시 청소년들에게 굉장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의 이야기는 대강 이렇습니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언제나 반에서 1등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매번 1등을 하다 보니까 어머니는 그 1등을 놓치지 않게 하려고 더 다그칩니다. 어쩌다 2등이라도 할 때는 난리가 납니다. 외부와는 일체 연락을 못하게 하고,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와도 바꾸어 주지 않고, 오히려 전화한다고 야단을 치고, 학교에서 조금난 늦게 돌아와도 시간을 재고 앉아 있다가는 벼락을 치고, 집에서는 꼼짝을 못하고 앉아서 공부만 하라고 합니다.
이 아이는 완전한 기계처럼 살아갑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만족을 위해서 매일같이 이 아이는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학생이 견디다 못해서 유서를 써 놓고 자살을 합니다. 그때 써 놓은 유서의 내용 중에 한 구절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입니다.
아이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지금까지 행복은 성적순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던 그 어머니는 환상에서 깨어납니다.
그래서 그 영화는 같은 처지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굉장히 이필해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우리집 아이들에게도 물어 보았더니 분명히 말하기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 행복은 성적순이다라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인생을 길게 놓고 볼 때 학교 성적이 곧 행복이라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그 자세를 탓하고 나무랍니다.
머리가 아무리 좋고 평소 공부를 잘해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좋지 않은 자세입니다. 자기 능력만큼 최선을 다했는데도 성적이 좋지 못하다고 하면 그것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학교 성적이 곧 행복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신앙의 문제다 할 때는 달라집니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성적이 곧 행복”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 성적이 좋지 않으면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보면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여기에 두 사람의 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실력이 있는 종이고, 또 한 사람은 실력이 아주 빈약한 종입니다. 주인이 이 두 사람의 종에게 각각 재물을 나누어 주고는 그것으로 열심히 일해서 이를 남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습니다. 주인이 와서 종들을 불러 놓고 결산을 했습니다.
먼저 성적이 좋은 종이 주인에게 와서 셈을 했습니다.
여기 보면 주인과 종이 나눈 대화 가운데 몇 가지 독특한 단어들이 나와 있습니다.

1. 더 남겼나이다.

22절을 보면 “(마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 종이 주인에게서 두 달란트를 받았었는데 열심히 일해서 두 달란트를 더 남겼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종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종은 주인 앞에 당당하게 서서 “더 남겼다”고 자신 있게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실력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확신에 차 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자신감에 차 있습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성취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일하는 것이 즐겁고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사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력 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신앙 생활도 이렇게 자신 만만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 보아도 확신에 차 있고, 싱싱하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보는 이들에게도 신선함을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의 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보면 자신감에 차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 종이 그랬습니다. 주인 앞에 당당히 서서 “주신 것보다 배나 더 남겼다”고 보고를 합니다. 이것이 곧 실력입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2. 잘하였도다.

23절을 보면 “(마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칭찬을 받으면 삶에 맛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재미가 있습니다. 생활에 자신감이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로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철저하게 성적순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피곤함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휴식이 따로 필요가 없습니다. 일하는 것 자체로서 이미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자꾸만 자기 발전이 가속화됩니다. 잠재되어 있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고, 언제나 생활이 진취적이고, 무한하게 발전을 거듭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이 이쯤되면 행복하게 마련입니다. 행복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흑인 민권 운동가였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죽기 얼마 전에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 영결식장에서 무슨 말을 듣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사람은 죽어서도 잘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존재입니다. 실력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똑같이 “그는 잘했다”는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매사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언제나 발전이 있고, 전진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3. 나의 즐거움에 참예하라

23절을 보면 “(마25:23)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고 했습니다. 이것은 상급입니다. 이 말은 “내가 너를 시험해 보니까 합격이다”는 말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만족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세상을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직장에서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인정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무슨 일에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소망적인 말들입니까 “더 남겼나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 잔치에 참예하라” 확실히 행복은 성적순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적이 아주 좋지 않은 게으른 종과 주인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여기 보면 아주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대화의 내용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1. 두려워하여

25절을 보면 “(마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그럽니다. 주인이 재산을 나누어 주고 간 후에 이 종은 그 돈을 곧바로 땅 속에 묻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일하지 않고 놀았다”는 말입니다. 주인이 없으니까 이 종은 마음껏 놀고, 질리도록 잠자고, 다른 사람들은 죽도록 일하는 그 시간에 제 마음대로 놀았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이제 결산의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 주인 앞에 서고 보니까 마음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여”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실력이 없으면 언제나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실력이 없는 학생은 입시 때가 되면 마음이 두려워집니다. 왜냐하면 결산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놓아야 하는데 내놓을 것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실력이 있는 학생은 오히려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실력이 있는 학생은 과연 내가 합격을 할까 그것이 궁금한 것이 아닙니다. 과연 내가 몇 등을 할까 그것이 궁금하고 그것이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종이 주인 앞에 설 때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실력이 없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놓을 것이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실력이 없으면 이렇게 두려운 마음부터 생기는 법입니다.
그것은 실력이 없는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력이 없는 신자도 매사 두려움이 많고 염려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언제나 불안해 합니다. 자신감이라고는 어디를 봐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어디에서 예수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며, 더군다나 기적인들 어디에서 일어나겠습니까
언제나 죽을까 봐서 벌벌 떨고, 종말의 때가 왔다고 하면 집 팔아 바치고, 땅 팔아 바치고 하는데, 그것이 모두 자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신이 없으니까 물질의 힘을 빌려서라도 천국을 가 보자는 심리입니다. 실력이 없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행복은 철저하게 성적순입니다. 신앙의 실력이 있는 사람은 언제 보아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파에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이단 사설들이 그렇게 난무해도 조금도 요동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언제 보아도 늠름하고 의젓하고 중심이 확고하고 신앙관이 분명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그것이 모두 신앙의 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게으른 종은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실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실력이 없으면 이렇게 모든 것이 두려운 법입니다.

2. 악하고 게으른 종아

26절을 보면 “(마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랬습니다. 이것이 실력이 없는 종에게 내린 성적표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사람이 이렇게 문책을 당하고, 평가를 받고 나면 비참해집니다. 사람이 가장 비참할 때가 바로 이같이 실력을 인정받지 못할 때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얼마나 사람이 비참해지는 순간입니까 그런데 이 같은 비참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3. 그의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8절을 보면 “(마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철저한 박탈입니다. 책망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격 박탈”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까지도 모두 빼앗겼습니다. 얼마나 철저한 심판입니까
신앙의 실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서운 심판입니다. 아마 신앙 생활에서처럼 내신 성적을 중요시하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내신 성적이 형편없는 신자들은 이렇게 있던 것까지도 모두 빼앗길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을 보면 그렇게 빼앗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4. 내어 좇으라

30절을 보면 “(마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버림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실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결과입니다.

이제 결론을 짓겠습니다. 학교 성적은 좋을수록 좋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장차 행복한 삶과 비례된다고 우길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적이 아주 좋은 것이 오히려 화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적이 아주 좋지 않았던 사람이 누구보다도 앞서갈 수도 있고, 누구보다 더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만큼은 전적으로 행복은 성적순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처럼 성적이 좋지 않으면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불행도 그냥 불행이 아니고 철저하게 빼앗기고 내어 쫓기는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고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은혜를 입는 길입니다.
이제 한 해를 살아가시는 동안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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