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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침묵하시는 주님 (마 2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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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라고 하는 것은 생활을 위한 수단이고 교제와 의사 전달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매개 수단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졌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소중한 언어일지라도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아질 때는 하나의 공해일 수밖에 업습니다. 말 때문에 발생되는 불화와 오해와 갈등은 분명 이 시대의 공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이 이웃과 교제하면서 말을 적게 하여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말이 필요 이상으로 많으면 경망스럽습니다. 그리고 말이 너무 많으면 자연히 실수하게 되고 품위와 무게를 잃게 되기 쉽습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행동과 실천에 미치지 못하면서도 말은 언제나 앞서 가기 때문에 온갖 불신과 조소를 받고 신용을 상실한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힐난을 받게 되고 언제나 말이 앞서고 무책임하다는 말까지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침묵이 금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침묵이 금일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꼭 말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말을 꼭 하여야 할 때는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금입니다. 그러나 꼭 말을 할 때 말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용기가 빛을 잃습니다. 책임감이 없어집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을 때 시내산 밑에서는 부패한 백성들이 금 송아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불평자들과 반란자들이 힘을 모아 하나님을 거역하고 애굽에서 하던 그 습관대로 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절하고 야단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아론은 끝내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말 한마디를 하지 않습니다. 그 어디를 보아도 항거하고, 항의한 일이 없습니다.
그 때의 침묵은 금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같은 행동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들 앞에 나서서 지금 하고 있는 그릇된 일을 가로막지 못하고 할말을 다하지 못한 아론은 두고두고 비겁자의 낙인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가 말을 잘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도 인정하셨던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함께 애굽의 대사로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짓밟히고 하나님의 권위가 사뭇 욕을 당하고 무너져 내려가는 광경을 보고 있는 아론은 끝내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말 한마디를 하지 않습니다. 그 어디를 보아도 항거하고, 항의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함께 애굽의 대사로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짓밟히고 하나님의 권위가 사뭇 욕을 당하고 무너져 내려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으면서도 한 마디의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두고두고 아론이 질책을 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고 침묵이라고 다 금이 아니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침묵하여야 할 때는 침묵하여야 합니다. 그때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말을 하여야 할 때는 고가의 값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말을 하여야 그것이 언어로서의 값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지닌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용기고, 힘이고, 진리인 것이며, 동시에 지도자의 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 속에서 끝내 침묵하시는 주님의 침묵이야말로 말 많은 오늘의 사람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침묵하시는 경륜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침묵은 어떤 침묵입니까

첫째는 “비난 앞에서의 침묵”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이유 없는 비난을 받는 일은 기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변명하느라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안 되면 아투기도 하고 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비난, 원색적이며 훼손적인 악의에 찬 비난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주님은 언제나 침묵으로 대처했습니다. 그들의 비난에 끝까지 변명을 하거나 해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들의 비난과 모함 앞에서 그때마다 변명을 하였거나 해명을 열심히 하였다면 그의 운명은 어느 정도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의 시간도 어느 정도는 지연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비난 앞에서 주님은 여전히 일관되게 침묵으로 대처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침묵하는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과 같이 모함과 오해와 험담과 모략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침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침묵은 말을 해야 할 때 위험을 무릅쓰고 말을 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고, 용기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그만큼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침묵하지를 못하고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유가 많고 말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침묵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만이 승리의 제일가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끝내 침묵하신 결과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생활이고, 인내의 극치이고, 주님이 주신 교훈입니다.

둘째는 “약자 앞에서의 침묵”입니다.

사람은 흔히 강한 사람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약한 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강한 사람이나 힘이 있는 권세자 앞에서 흔히 많은 사람들은 교활해지기 쉽고, 아첨하기 쉽고, 비굴해지기 쉬우며,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약자로서 맹종하기가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또한 약한 자에게는 무자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약한 자 앞에서 당당하고 강하고 호령하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고, 생리이고, 부패한 근성입니다.
이것이 두 개의 인격 그리고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숨겨진 모습입니다. 사람이 교활할수록 아첨과 호령을 잘하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대다수 많은 사람들은 이 범주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아주 신선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당시 강자였던 빌라도 앞에서도, 헤롯 앞에서도, 단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온갖 누명과 질시와 오해를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굳이 변명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변명을 했고 자신을 변호했더라면 그의 운명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약자들 앞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에 돌을 들고 와서 입에 거품을 내며 욕하고 비난하며 죽이려 들던 간음한 여인 앞에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질책하지도 않으시고 묵묵히 바라만 보실 뿐이었습니다.
또 강도의 욕지거리를 들으시면서도 단 한 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항변하거나 분노하거나 탄식하지도 않스십니다. 모두에게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그 길이 주님이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진리의 삶과 선구자의 삶은 이렇게 침묵하는 생활입니다. 할 말을 다하고, 자기 변명을 일삼아 보면 정작 할 일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선구자들의 삶은 일찍이 모두 그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침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강자 앞에서도 아첨하거나 비굴하지 않으며, 약자 앞에서도 무례하지 않으며 업신여기지 않으며, 칭찬하는 자 앞에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우쭐하지 않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굳이 변명하려 들지 않으시는 주님의 모습은 오늘 하고 많은 세상의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해 낼수 있는 방법같이 보입니다. 우리는 너무 말이 많습니다. 자기 변호가 너무 지나칩니다. 불필요한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삶에는 진지함이나 내용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침묵하는 모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십자가 위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욱 무거웠고, 몸소 지시기에 어려웠던 것은 십자가의 형틀이 그 중량이 무거웠고 거칠었고 또 그 길이 험난한 언덕 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차마 인간으로서는 감당해 내기조차 어려웠던 일련의 일들 때문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배신, 가룟 유다의 배신, 곁에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의 욕설, 그리고 군중들의 배반들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자들의 배신 행위는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더욱 고되고 아프게 만들었던 서글픈 일들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무게를 한층 더 무겁게 만들었던 요인이었고, 베드로의 배신은 주님의 마음을 허무하리 만큼 허탈하게 만들어 버린 어이없는, 분노할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죄를 지어 죽어 마땅한 강도의 욕지거리는 골고다를 더욱 황량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할 말이 많고 변명할 것이 많은 주님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죄인처럼 말이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고독입니다. 할 말이 없어 말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은 많으나 할 수가 없는 주님의 처지이기 때문에 골고다의 고난과 고통은 더욱 큰 아픔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침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할 말을 다 하고서는 갈 수가 없는 길입니다. 좁은 길을 걸어 가고, 좁은 문을 통과하여야만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변명을 하고, 따져가며, 할 말을 다 하면서, 십자가를 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침묵하는 삶, 그것 자체가 십자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먼저 이 침묵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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