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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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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일생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태어난 것부터가 기구합니다. 하늘의 보좌와 독생자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의 갖은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얼마나 낮은 지리냐 하면 말구유의 자리까지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아무리 가난해도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천대도 많이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셨는데도 누구 하나 그를 영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이려는 사람이 많아 도피 생활부터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망명 생활을 하였습니다.
또 주님은 고뇌의 삶을 사셨습니다. 일생이라고 해야 30년밖에 안되는 생애였지만 그 30년밖에 안 되는 그 삶이 고뇌스러운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로마의 압제하에 있었던 시대입니다. 거기다 헤롯의 학정은 대단하였습니다. 그 밑에서 마음껏 소리를 칠 수가 없었던 때입니다. 자유도 누릴 수가 없을 때입니다. 로마의 감시 속에 젊은 날을 보내야 했을 때입니다.
그 같은 세상에서 가장 살아가기가 힘든 세대가 젊은 세대입니다. 젊은이는 모름지기 입지(立志)를 세워야 한다고 율곡은 갈파했는데 그 같은 세상에서 압박을 당하는 민족이 어떻게 입지를 세울 수 있습니까 내일이 불투명할 뿐입니다. 주님은 그 같은 세상에서 태어나 젊음의 시절을 보냅니다.
거기다 주님은 수모스러운 삶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가 성장한 후에 전도 길에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부딪힌 벽은 “저게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는 빈정댐이었습니다. 이 말속에는 천시와 조롱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 한 마디를 나기고 멀리 고향을 떠나 가십니다.
거기다 유대교로부터 박해와 비난이 거세어 집니다. 형제들로부터도 비협조와 힐난이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법정에서도 수모를 당합니다. 창조자가 피조물들로부터 재판을 받는다는 것부터가 수모입니다. 창조자가 피조물로부터 채찍을 받고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과 온갖 수모를 다 겪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또 어떻습니까 당시에 가장 악랄하고 흉악한 죄인만을 죽이는 십자가 형틀에서 주님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것도 온갖 누명을 다 뒤집어 쓴 채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철저하게 가난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태어나기를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니까 왕궁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알고 왕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작 태어나신 곳은 셋방도 아니고 마구간에서, 부드러운 이불도 아닌 강보에 싸여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생을 집 한채가 없이 사셨습니다. 그는 철저하리 만큼 없는자의 대표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까지도 처절했습니다. 인생에서 최고의 복은 고종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고종명이 아니라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화가들이 예수님의 초상에 수염을 길게 그려 놓아서 그렇지 사실은 33세의 동안입니다. 아침에 피어 오르는 태양같이 얼굴에서 윤기가 흐를 나이입니다. 그리고 죽음도 복잡했습니다. 뭇 사람들의 질시와 시기와 죄인의 누명을 다 쓰고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부모와 형제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고통 또한 처절하리 만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이나 매달려 있었습니다. 어지간한 사람 같았으면 매달리자마자 기절해서 죽고, 쇼크로 죽는다고 하는데, 주님은 6시간 동안 끈질기게 고통이란 고통은 다 감수하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생입니다. 아주 철저한 패배자입니다. 이 세상의 부정적인 것은 모두 다 간직한 채 죽어 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처다볼 때마다 죄송하고 부끄럽고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살아나셔서 부활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으니 이제 그만이다 하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굴려다가 무덤 문을 막았으니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고 안심하고 있을 때 그 예수는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이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고,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놀라운 것은 아마도 빌라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고 서기관들일 것입니다. 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군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혼비백산하여 떨고 있을 그 시간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희에 찬 개가를 부른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그것이 어찌 한두 사람이었겠습니까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몇 가지 중대한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는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교훈입니다.

진리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지 어김없이 승리합니다. 세상의 권세나 어떤 힘이 아무리 짓밟고 덮으려 해도 진리는 반드시 일어나고야 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일단 죽이는 데는 성공을 하였지만 그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외쳤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만군의 주로다 당할자 누구냐 반드시 이기리로다.”

둘째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야 만다는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무덤 속에 쳐 넣고 돌문을 닫아 버리면 그것으로 그만일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덤을 봉함하고 군인들이 지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막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찌 사람들이 막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진실을 아무리 덮으려 하고 감추려고 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이루어졌던 불의한 일들은 시간이 가면 모두 벗겨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 맙니다. 이것을 주님이 부활로써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역사의 심판은 막을 길도 없고 피할 방법도 없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죽어야 산다는 교훈입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죽는 종교입니다. 죽음은 분명히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눈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모두가 할 말을 잊어 버리고 숙연해지고 침통해지는 것입니다.
또 죽음은 흉칙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일지라도 죽은 얼굴을 두고두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볼수록 흉칙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 있는 곳에 향을 피워 놓고, 꽃으로 관을 둘러 미화시켜 놓기도 합니다. 이것은 흉칙함을 조금이라도 중화시켜 보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또 두려운 것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문 앞에 다가오고 있을 때 기쁘게 뛰어 나가서 맞이할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때 유쾌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4”자를 싫어합니다. 장례식에 축전을 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화제로 대화할 때 죽는 이야기를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동묘지로 소풍을 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죽음이 주는 의미는 기분을 좋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이후에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살아나심으로써 뜻과 의미가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이제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두려운 것도 아닙니다. 저주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잠시 자리의 이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죽은 사람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게까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일세 영광일세”하고 찬송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변화입니까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이 같은 경험과 변화를 갖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이 세상에 준 의미이고, 뜻이고, 축복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큰 소망을 주었습니다.

사람이 이 땅 위에서 7, 80년으로 그 인생이 완전히 끝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하면 이 땅의 피조물들 가운데서 가장 불행한 존재는 인간일 것입니다. 나무 중에는 천 년을 산다는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동물 가운데는 몇 백년을 산다는 거북이가 있고 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고작해서 7, 80년을 살고도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그 7, 80년의 기간 동안도 행복하였던 날보다는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날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단지 이것뿐이라면 인간은 분명히 불행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의 일생이 이생뿐이라면 다른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도 가장 불쌍한 것은 인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결정적인 소마의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나는 부활잉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 “(눅24: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고전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 이것이 부활을 통한 축복의 약속들입니다.

고난 뒤에는 즐더움이 있습니다. 비가 온 뒤에는 햇빛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렇게 세상에 희망을 주셨고, 기쁨을 주셨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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