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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여름 농촌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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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여름,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의 황에스더 교수는 학생 김노득과 최용신 두 명을 데리고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라는 마을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그 곳은 농촌사업 겸 교회를 세울만한 곳으로 물색한 지역이었다. 이 곳에는 약 40가구 300여 명 주민이 있었지만 대부분 한글조차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그리고 생활 형편도 극히 원시적이어서 산을 깎아 만든 밭에다 보리나 감자를 심어 겨우 연명해 나가는 정도였다.
세 처녀는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을 하나 얻어 놓고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김노득과 최용신이 종을 흔들며 마을을 돌아 어린아이들을 모아 오면 황에스더 교수는 아이들에게 딱지와 연필, 공책을 나누어주고 놀이와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딱지는 그냥 주었으나 5원짜리 공책과 연필은 '내 것'이라는 관념을 갖게 하기 위하여 1원씩 받았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그 에미나이들은 결국 연필장수였군' 하면서 비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 사람의 억척스러운 노력으로 낮에는 어린이, 밤에는 청년 남녀들이 모여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공부하는 청년들에게 '이 연놈들이 같이 앉아 무슨 짓들이냐?'고 작대기를 휘둘러 청년들을 내쫓기도 했지만 학생들은 자꾸 늘어갔다.
이렇게 틈틈이 논밭 일을 같이 하며 석달을 지냈고 마지막 날은 학예회를 열었다. 어린이들이 유창하게 국어책을 읽어대고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청년들은 산술문제를 척척 풀고 열렬히 웅변을 토해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순서가 끝난 뒤 최용신과 김노득이 개학 때문에 상경하겠다고 고별인사를 하자 모두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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