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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지기 생활-이웃과의 삶 (마 0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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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교훈 중에서도 너무나도 유명한 핵심내용인 산상 수훈의 일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이웃과의 삶에서 기억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을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한곳에 모여서 서로 대화하고, 교류하고,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외딴 섬에서 혼자 살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웃과 함께 살아가려면 몇 가지 의무가 필요합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의무가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보다 더 특별한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일컬어서 “이웃에 대한 청지기 생활”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을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협동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삶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서로 웃으며 이웃하면서 함게 살아가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마음들이 갈갈이 찢겨진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사람들이 갈등이 많고, 불화가 많고, 쌓인 감정이 많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이 시대의 특빙일 것입니다.
사회를 보아도, 정치계를 보아도, 어떤 모임에 가 봐도, 심지어는 교회들을 찾아가 보아도 거기에는 모두 불화가 있고, 갈등이 있고, 상한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가 보면 정상적인 가정이 드물 정도로 마음들이 상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시대에는 모두들 긴장하고 살다 보니까 신경이 모두 날카로워져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위로받고 싶어하고, 도움받고 싶어하지 먼저 위로하고 인내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협동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화평을 만들고 평화를 조성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갈들이 많은 곳에 위로를 심고, 분쟁이 많은 곳에 평화를 조성하고, 불화가 많은 곳에 안정을 조성하는 지혜 있는 사람들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체스코는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밝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오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바로 이런 기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본문에서 “너희는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무엇인가 역할을 해내라는 뜻입니다. 무엇인가 수고하라는 말입니다. 빛이 되라는 말은 우울하고, 어둡고, 고민이 많고, 불화가 많은 곳에 들어가서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화평케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이 시대를 살면서 가장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고하는 일입니다. 이웃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필요한 이웃이 되어 주는 일입니다. 또 각박한 세상에서 뭔가 좀 나누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사람들, 그리도도의 청지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세상과 이웃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항상 빚진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저는 항상 손해를 보고 살아갑니다. 돈을 걷을 때도 더 많이 냅니다. 명절 때가 되면 경비하는 사람들이나 청소하는 분들에게 더 많이 신경을 씁니다. 명절 때가 되면 그분들의 눈길이 나를 더 유심히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압력을 받습니다. 그래서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경비하는 분들에게 제가 먼저 인사를 합니다. 좀 불만스러운 것이 있어도 마음대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말을 아낍니다. 또 밤늦게 집에 들어가게 될 때는 가게에서 뭔가 먹을 것을 사서 넣어 주고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목사가 아니라도 할 수 있으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결코 손해만 보는 그런 일은 사실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생활은 삶을 윤기나게 하는 그런 생활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각박한 세상인 것 같아도 우리들이 조금만 수고를 하고, 조금만 베풀면 베푼만큼 따뜻한 마음이 되돌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며칠 전에는 새벽 기도회에 나오려고 문을 열어 보았더니 눈이 많이 와서 차 위에 소복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저 눈을 쓸고 가려면 손깨나 시리겠다 생각하고는 리모컨으로 엔진을 시동 걸어 놓고 10분 후에 나가 보았더니 누가 눈을 깨끗하게 쓸어 놓았습니다.
저는 누가 눈을 그렇게 쓸어 놓았는지 짐작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아파트 경비원은 자기가 안한 것처럼 경비실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고맙기도 하고 얼마나 재미있는 모습입니까 그래서 저는 깨끗이 닦아진 차를 타고 교회에 오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몇번이고 마음으로 “아저씨 고맙습니다.”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지기들입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모두 이 시대의 빚진 자들입니다. 이를테면 녹아져야 하는 소금들이고 타 들어가야 하는 촛불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두 수고하며 뭔가를 투자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는 진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 시대를 진실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청지기로서의 둘째 덕목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거짓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의가 너무 많습니다. 온갖 거짓과 모략과 부정과 속임수가 너무나 많습니다. 진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적당히 속여 가면서 살아야 편하고, 일을 하기가 쉬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적당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다 보면 불이익을 당하는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참 불행한 사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속임수를 적당히 써 가면서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이 시대는 순교가 없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예수 믿는다고 핍박을 받고 피 흘리는 일은 없습니다. 더 이상의 순교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순교의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오늘날의 순교는 세상을 진실하게 살며, 온갖 불이익을 다 당하면서도 개의치 않고 기쁨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수용하는 신앙적인 자세를 짐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운 사람은 중심 있게 신앙 생활하면서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정말 말기적인 징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디 한군데인들 성한 곳이 있습니까 온전한 데가 한 군데 정도라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가 만신창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그런 대로 지탱하고 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숨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이 사회를 지탱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바로 이 같은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이 시대의 청지기들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진실하게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밖에 버리워진 맛 잃은 소금처럼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는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요즘 한창 우리 사회가 변모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차량 10부제 운행이라든가 쓰레게 종량제, 버스 전용 차선 운용 등 이것들에 우리는 전적으로 협조해야 합니다. 성숙한 시민 의식이 신앙으로 승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종량제를 실시한다고 하니까 한꺼번에 집안 가재도구를 밖에 내다 놓는 사람들, 봉투를 사려면 돈이 드니까 밤에 살짝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사람들, 집 주위가 언제나 지저분한 채로 그냥 살아가는 모습 등은 이웃을 불쾌하게 하는 모습들입니다. 우리는 좋은 이웃을 만들어 나가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셋째는 이웃의 인격이나 재산 그리고 생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면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모두 귀합니다. 내가 귀하듯이 남도 모두 귀한 사람들입니다. 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입니다. 다 인격이 있고,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죄입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학대하고 착취하는 것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모두 큰 죄입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로마에는 세 가지 농기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말 못하는 농기구인데, 그것은 삽과 곡괭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말 없는 농기구인데, 그것은 소아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말할 줄 아는 농기구인데, 그것은 당시 100만 명이나 되던 노예들이라고 했습니다.
노예들도 분명 인격이 있고,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사람들인데,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면서 일만 했습니다. 그 노예들이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는 주인의 재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짐승처럼 사고 팔고 했습니다. 얼마나 큰 죄입니까
초기 미국 역사를 보아도 미국 사람들이 흑인들을 잡아다가 그렇게 노예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교육할 때는 흑인 노예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흑인들은 사고 팔고 노예로 부려먹어도죄가 되지 않는다고 합리화해서 가르쳤습니다. 이 또한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랬으면서도 그들은 오늘 여러 나라들에게 인권을 말하고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한 가지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멸시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는 말은 그런 억압이 있고 멸시가 있는 것을 보거든 막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간 곳에서는 어디서나 인간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비판하고, 험담하고, 명예를 손상시키고,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남의 험담을 하는 것이 남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남의 명예를 추락시키고 악한 소문을 퍼트리는 것도 남의 재산을 도적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사람을 걸어서 투고질하는 것도 이웃의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 투고질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저지른 일 가운데서 가장 악질적인 모함입니다. 투고하는 사람은 대개 이름을 밝히지 않고 합니다. 그래서 그 투고 내용은 거의가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상대방에게 결정적으로 손핼르 입히려고 하는 의도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상대방의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교통 사고가 많은 이유도 알고보면 이웃의 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 때문입니다. 이웃의 생명을 존중한다면 그렇게 차를 함부로 몰아서 사람들을 죽게 하고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술에 취했으면서도 차를 운전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겠다고 하는 의도가 들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술에 취한 채 운전을 하면 100% 사고가 나게 되어 있는데 어찌 아닙니까 그런 사람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 인명 경시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지나치게 과속을 하면 누군가가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속을 한다면 그것도 이웃에 대한 생명 경시 풍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골를 당해 죽는 사람이 일년에 약 11,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일본의 10배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2010년에 가면 전국민의 4명 중 한 명은 교통 사고로 불구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 집에 한 사람 꼴입니다.
우리들이 좋은 이웃으로 살고, 좋은 이웃이 되어 주려고 한다면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를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지기들의 삶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 시대를 예언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아마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 가운데 가장 큰 사명일 것입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이렇게 제구실을 하지 못하면 국민들로부터 욕을 먹습니다. 세무 공무원들이 부정을 저지르니까 국민들로부터 얼마나 질타를 받습니까 그것은 마치 쓸모 없어서 밖에 버리워진 소금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것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때로는 오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재 가치도 없이 짓밟히고 있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망각하고 살아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자적인 안목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예언자는 그 시대를 일깨우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도 제시하면서 바른 소리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예언자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 자신의 부정에 대해서 엄격해야 합니다. 자기 부정을 배격해야 하고, 자기 편견을 극복해야 하고, 자신의 무지함을 깨우쳐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사회의 부정에도 민감해야 하고, 사희의 불의에 대해서도 엄격해야 하고, 사회가 너무 둔감하게 나아갈 때는 말도 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매양 들추어 내는 일만 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싸매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소망을 주는 일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언자적인 삶입니다. 사회에 사건 하나 발생하면 매스컴들은 물을 만난 것처럼 돌아다니면서 들추어 내서 확대 보도해서 보여 주곤 하는데 이제 그것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백성들의 마음이 허탈한데 거기 대고 무분별하게 마구 폄프질을 해대니 어쩌자는 것입니까 방송하는 사람들은 백성은 알권리가있다고 하며 보여 주고 있는데 좀 모르면 어떻습니까 어떤 때는 모르는 것이 약일 때가 있습니다. 방송을 들어 보면 소망적인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없고, 세상이 온통 난리가 난 것처럼 책임 없이 마구 뱉어 내 놓는 말들을 하는데, 그런 말들이 과연 우리 사회에 무슨 득이 되겠습니까
지존파 사건이 나니까 마이크를 들이 대고 난리 법석을 띤 결과, 사람들 입에서 나온 말이 편모 슬하에서 자라고, 없이 자란 것이 한이 맺혔을 것이라 해서 가지 자들을 욕하는 풍조를 낳았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장난입니까 편모 슬하라는 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링컨은 어렸을 때 두 번씩이나 어머니가 죽는 경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없이 살았다니 그렇다면 이 땅의 없는 사람들은 다 그렇다는 말입니까
매스컴의 사명은 그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정확하게 실상을 보도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상한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대안도 제시하면서 이 다음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소망과 희망도 아울러 제시해야 그것이 매스컴의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선도자 그룹은 말을 해도 자기 생각나는 대로,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를 살면서 내가 하고 싶다고 다하고 살아갈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각자 처한 위치에서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 좋은 이웃이 되어 주고, 때로는 평화를 이루고, 조화를 이루고며, 위로하는 사람으로, 소망을 던져 주는 사람으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이 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지기들인 여러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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