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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라 (마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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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팔복을 가르치신 이후에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내 마음을 내놓고 보고하고 상의하고 호소하고 간구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현대인들에게는 이 기도가 더욱 절실히 요구됩니다.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쌓여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도 많고 호소하고 싶은 말도 많습니다. 사람은 이것들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이것들이 큰 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들이 기도할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속에는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이 전제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면서 살면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어추구니없는 일들, 불행한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보면 모두들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자꾸만 사고가 일어나고 사건이 일어납니다.
옛날 사람들은 생각하며 살아갈 일들이 많았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생각할 일이 많습니다. 농사를 짓다가 비가 오지 않으면 사람들은 먼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피해가 생기면 우리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먼저 자신들을 반성하는 일부터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언제나 하늘이 무섭고 두려워서라도 경거망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점검하고 교만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늘 하늘을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생각들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늘과 무관한 생활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이 잘되면 모두 내 공로로 돌려 버립니다. 모두 내가 잘해서, 내가 능력이 있어서 잘된 줄로 알고 우쭐합니다. 그리고 일이 잘 안 되면 모두 네 탓이고 환경 탓입니다. 그래서 원망을 하고 불평부터 합니다. 모두 생각 없이 살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얼마나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나라 경제가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3,300만 원짜리 외제 카펫을 사고 팝니다. 이것 하나를 팔면 2천만원의 이익이 남는다고 합니다. 루이 13세라는 양주 꼬냑 한 병 값이 200만 원인데 없어서 못 판다고 합니다. 이 양주는 병 값만 15만 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양주로 소비되는 돈이 일년에 1,700억 원이랍니다.
또 여자들이 입는 모피 코트 한벌에 2천만 원씩이나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지금 돈 있는 집에서는 딸 시집 보낼 때 시어머니 혼수로 사 보낸답니다. 그것도 국내업자가 외국에서 원피를 사다가 가공해서 만든 것이니까 그렇지 외국 업체가 직접 만든 것을 그냥 수입해 오면 한 벌에 일억 원씩이나 한다고 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이런 것을 사고 팔고 그럽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각 없이 살아가면 이렇게 비인간화됩니다. 짐승화됩니다. 짐승이 따로 있습니까 생각 없이 살면 그것이 짐승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을 살되 좀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하늘의 소리를 들으라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하늘의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합니다. 이 하늘의 소리는 조용히 엎드려야만 들립니다. 엎드려서 깊이 묵상을 하면 내 속에서 이 음성이 들려옵니다. 양심을 통해서 들리고 마음을 통해서 들리고 생각을 통해서 들려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살아야 그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조용히 엎드리는 시간이 없으면 하루종일 세속의 소리만 듣게 됩니다. 세속의 소리만 듣다 보면 생활이 짜증스럽습니다. 오늘 신문을 보고 TV를 보십시오. 전부 짜증하는 소리만 들리지 않습니까 매일같이 부정부패 뉴스만 들리고, 누가 뇌물을 받고 구속되었다느니, 무슨 사고가 터지고, 강도당하고, 교통사고로 죽고, 집이 무너지고 그런 소리만 듣게 됩니다. 이제는 뉴스를 듣기도 싫고 신문도 보기가 싫어집니다. 거기 어디에 신앙적인 소리 한마디라도 나오고 소망적인 말 한마디라도 있습니까
사람이 이런 소리만 나꾸 듣고 살면 인성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세상 무너져 버려라”, “될 대로 되라”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인성이 파괴되었다는 말입니다. 자포자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이 삐뚤어져서 싸우고 파괴하고 사고를 치고 막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2억을 받았다, 5억을 받았다 하니까 몇 천만 원 받은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이야”하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뇌물에 대해 무디어지고 그런 소리를 자꾸 듣다 보면 사람들이 무감각하게 세뇌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뇌물에 대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버립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뇌물 천국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전염병입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엎드리면 인간의 소리가 아니고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렇게 엎드려 묵상 생활을 하면 먼저 자기를 보게 되고 자신을 살피게 됩니다. 엎드려 묵상 생활을 하면 먼저 자기를 보게 되고 자신을 살피게 됩니다. 그러면 내면의 세계에서 정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 거기에서 영적인 힘이 주어집니다. 그 힘을 영성이라고 말합니.
이렇게 내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면 거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을 받게 됩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이 힘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죄인인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서 그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둘이 합해지고 연합될 때 거기서 하나의 힘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이를테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헌신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때 그곳에서 영적 각성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성의 생활입니다. 웨슬리는 그런 삶을 가리켜서 “성화의 삶”:이라고 했고, 루터는 그런 삶을 가리켜서 “영성의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기도하는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욥기 22:21을 보면 “(욥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화목이 복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 화목을 유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가정도, 부부 사이도, 형제간에도, 교우간에도 이 화목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화목을 유지하려면 자주 찾아가야 합니다 자주 만나야 합니다. 부모도 자주 찾아가지 않으면 멀어지기 쉽습니다. 자주 찾아가야 관계가 돈독해집니다. 형제도 멀리 떨어져 살면 남만도 못합니다. 어떤 때는 친구가 형제보다 훨씬 좋을 때가 있습니다. 이웃이 사촌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것은 가까이에서 자주 만나고 친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자주 찾아가지 않으면 멀어지기 쉽습니다. 여기서 접촉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주 접촉하여야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자주 찾아가서 만나야 합니다. 자주 만나면 가까워지고 정들고 이해가 깊어지고 사랑을 입게 됩니다. 이것이 좁촉이 주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는 어머니가 품에 안고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는 어머니와 자주 접촉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건강이나 정서나 성격 형성에 문제가 하나도 없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조절된 온실이고 요람이고 집입니다. 아이는 그 품에 있기만 하면 그곳이 어떤 곳이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실수를 해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어린 아이도 같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잘자라더랍니다. 그곳은 어머니가 생각할 때 감옥이지 아이에게는 그곳에 어머니의 품이 있는 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안에 살면서 하나님의 체온을 느끼고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주문하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관계를 이루면서 사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여기서 몇 가지 기도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산기도를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들에 신앙 방종파들이 은둔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속에 있는 굴에 금욕주의자들이 모여서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은둔생활이나 방종생활은 신앙인의 정상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무엇보다도 생활이 건전해야 합니다. 방종파나 금욕주의는 한결같이 그 생활이 한편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이를테면 왜곡된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들에 가고 산으로 가면 그들에게 물들까 봐 주님은 골방으로 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산에 가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이 아주 편협하게 된 채 은둔하며 세상을 정죄하고 부정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런 곳에 잘못 가면 그것이 신앙생활의 참 모습인 줄 알고 물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내방자들에게 그 편협된 신앙을 주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자꾸 그런 곳만 찾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은 갔다 와서는 이상한 말들을 하고 돌아다닙니다. 그것이 벌써 그 영향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 이 말은 조용한 곳에서 깊은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조용히 엎드려 묵상 기도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다 보고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깊은 영적 교통을 이루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영적 양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또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진지하게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진지한 기도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데이트하는 남녀들을 보면 시끄러운 곳은 찾아가지 않습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가서 둘만이 앉아서 대화를 합니다. 그래서 진지한 대화는 큰 소리가 필요 없습니다. 사랑을 속삭이는 데 소리가 커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한나 이야기가 나오는데 한나에게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성전에 들어가서 아이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그 기도가 얼마나 진지하고 간절했겠습니까 제사장 엘리가 가만히 보니까 한나가 기도를 하는데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음성은 들리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소리가 필요 없습니다. 말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의 소리를 들으시고 고요한 영혼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기도하되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정감 넘치는 말씀입니까 주기도문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하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얼마나 부드러운 단어입니까
어떤 아들이 식사 때마다 가족을 대표해서 혼자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허락하니까 아버지가 기도하시기를 “하나님 형님이시여”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놀라서 “형님은 무슨 형님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너는 촌수도 모르느냐, 네게 하나님 아버지면 나에게는 하나님 형님이지 않느냐”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즘 여성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남성이 아니고 중성인데 어떻게 아버지라고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어머니”라고 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궤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하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다정한 기도입니까

다음은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이미 한 말을 또 되풀이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준비 없이 기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대표 기도할 때 준비가 없으면 중언부언하게 됩니다. 한 말 또 하고 자꾸 되풀이합니다. 그러면 듣은 이들이 참 불쾌합니다. 성의가 없어 보입니다. 준비 없는 것이 금방 표가 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는 얼마나 큰 실레가 되겠습니까
또 기도하는데 어떤 분은 일사천리로 거침없이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기도도 진지함이 없어 보입니다. 웅변가처럼 입을 한 번 열면 일사천리로 레코드판 돌아가듯 나오는 기도는 진지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대표로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음성을 떨면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오늘날 장로님들이 대표 기도할 때 음성을 떨면서 기도하면 모두 웃느라고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에는 무엇보다도 진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는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옛날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는 대중기도할 때 한 시간씩 했다고 합니다. 오래기도할 줄 알아야 그것이 경건의 척도라고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기도가 얼마나 중언부언했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만능 열쇠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모든 문제의 해결사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죄 사함을 받고,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낫고, 기도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이제 기도를 끝낸다”는 마침 부호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새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이름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마칠 때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무리해서 응답을 기원해야 그것이 기도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한 분에게 기도를 시켰더니 그분이 기도하다가 이 “예수의 이름으로”를 잊어버렸습니다. 기도가 끝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끝날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꾸만 빙빙 돌리길래 보니까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하루 종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시작할 때도 주님 이름으로 기도를 하지만 마칠 때도 주님 이름으로 끝을 내야 그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복을 받고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만나고 사랑을 입고 살아갑니. 그러니 이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강조하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은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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