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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통 때문에 받은 은혜 헤어 보기 (시 31: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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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달력의 날짜 상으로 대단히 의미 깊은 주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9년도 한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고, 20세기로 불리는 1900년대의 끝자락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두 번째로 맞았던 천 년대를 마감하는 주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뒤를 돌아보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즐거운 일보다는 고통으로 상처 입고 아파하던 날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 중에 지금까지 고통을 완전히 면제받고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고통을 당해 보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 사람은 인생의 고통에서 나오는 삶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아직은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고통을 다 경험하고 살았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삶이란 '고통과의 싸움'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고통을 떼어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저나 여러분이나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싫어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고통은 피하기를 원하고 또 고통 없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면서 그 행복을 추구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의 용광로를 통과하는 것을 한동안 내 버려두시는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자비하십니다. 얼마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곁에 이런 고 통, 저런 고통이 얼씬거리기만 해도 지체하지 않고 달려와서 그 큰 팔을 휘두르시어 모든 고통을 쫓아 주실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는 것을 자주 봅니다. 우리 중에는 믿음이 남달리 좋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주님 앞에 기도하기를 힘쓰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고통, 저런 고통을 안고 오랜 세월 동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봅니다. 어떤 때는 불신자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이 무서운 곤경에 빠지는 일도 목격을 하게 됩니다. 이럴 때 저나 여러분이나 마음으로 이런 탄식을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 하나님을 무얼하시나'
오늘 제 설교가 여러분의 귀에 안 들어오시면 여러분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보셔야 됩니다. 마지막 주일날 우리가 좀 더 깊이 지나간 날을 회고해 보고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직시하면서 은혜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가 선택한 시편 31장을 가지고 자기가 한때 불같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깨달았던 소중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가 사울 왕의 정치적인 라이벌로 낙인찍히면서 겪은 고통은 과히 지옥의 연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그가 다 맛보고 그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나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고통 때문에 손해 본 것이 없다고 합니다. 고통 때문에 자기가 불행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통만이 주는 특별한 보너스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희한한 고백을 검토해 보면서, 우리가 당한 고통, 우리가 현재 끌어안고 있는 이 고통을 보는 시각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라고 저는 믿습니다.
정말 고통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정말 고통으로 손해를 보지 않고 있는지, 정말 고통이 주는 특별한 보너스가 대단한 것인지 헤아려 보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 대부분이 고통과 싸우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다 끌어다가 설명할 필요가 없는 21세기,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일들이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다고 판단해도 잘못 되지 아니할 21세기, 그 21세기에는 어떤 고통을 겪을지 모르기 때문에 고통을 보는 올바른 시각을 좀 더 겸비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윗이 발견한 사실, 그가 고통을 겪으면서 발견한 첫 번째 사실은 고통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피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31장 1절에 무엇이라고 소리치면서 고백합니까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합니다.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피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도 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다는 말도 되고,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말도 됩니다. 31장 전체는 다윗이 혹독한 고통의 연단을 받는 기간동안 그가 경험했던 은혜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1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합니다.'라는 말은 그가 고통 때문에 하나님에게 피했다는 고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특별히 괴로움을 당했던 고통은 어떤 것이었는지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시면 '내가 근심으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현대적인 말로 바꾸면 '근심 때문에, 너무나 근심이 많아서' 정도의 뜻입니다. 이것을 이어지는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와 연결시켜 보면 너무 근심에 짓눌려서 온 몸이 말라 간다는 뜻이 됩니다. 정신적으로도 도무지 기운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침체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끝 부분에 '나의 죄악으로 약하여졌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도 죄악 때문에, 자기가 지은 죄들을 생각하면 그 죄악이 찌르는 가시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자기 뼈가 쇠하여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통증을 심하게 일으키는 것이 뼈로부터 오는 통증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범죄에 대한 가책이 너무나 심해서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많은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기도 하고,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고통을 통해서 다윗이 무엇을 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이렇게 많은 고통으로 괴롭힘을 당하면 사람의 본능적인 반응이 어떻게 나오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을 믿던 사람도 '믿어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라며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도망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 반응이 반대로 나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 그러하여도, 이런 고통이 나를 괴롭히지만 여호와여 나는 주께 의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님을 향하여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실 분이라고 고백했나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 피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사람이 언제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게 됩니까 언제 하나님을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부르게 됩니까 형통할 때입니까 곤고할 때입니까 고통을 모를 때입니까 고통을 알 때입니까 대답은 여러분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20년이 넘도록 많은 형제들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수백 명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 강단에 서서 대각선 전도 집회 때마다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는가를 간증하는 수백 명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자기가 어떻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는가를 눈물을 흘리며 간증하는 형제들, 자매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백 명의 간증자들을 제가 다 기억은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묶어서 보면, 열 명에 여덟이나 아홉 명은 똑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당한 고통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고통 때문에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 고통 때문에 내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고맙습니다.' 열에 아홉은 똑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난번 간증 때 김희두라는 형제의 간증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30대의 패기만만한 나이에 시작하여 16년 동안 피와 눈물로 키워 온 회사가 갑자기 자금 압박과 노사 분규로 도산하여 공중분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은 직접 당해 봐야 그 사정을 알지, 말로만으로는 모르는 일입니다. 허탈과 절망으로 그는 죽음 직전까지 몰려갔습니다. 한 마디로 막장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 때 아내의 손에 이끌려서 생전 와 보지도 아니했던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고통이 그 형제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피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말을 적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교만과 자만으로 나 자신이 전부였던 삶에서'. 다 그렇습니다. 고통을 모를 때는 교만과 자만으로 나 자신이 전부처럼 생각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전부 아닙니까 '내가 전부였던 삶에서 이제 나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존재인가를 깨달아 인정케 하시고, 이런 겸손한 자아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를 불러 주신 하나님, 당신을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특권과 구원의 감동으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진정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누가 이 형제로 하여금 하나님께 피하게 만들었습니 까 고통입니다. 다윗이 그런 경험을 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에게만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이미 예수를 믿은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한 번 솔직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가 정말 언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습니까 형통 할 때입니까 곤고할 때입니까 우리가 단 한마디 말로 '아버지'하고 부를 때가 언제입니까 그 한 마디의 부르짖는 소리에 모든 무게를 다 실어서 하나님을 찾을 때가 언제인가 하는 말입니다. 형통할 때입니 까 곤고할 때입니까 우리가 언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은혜를 갈급합니까 형통할 때입니까 고통 당할 때입니까 우리 영혼이 언제 맑아집니까 우리 영혼이 언제 은혜로 풍성해 집니까 우리 영혼이 언제 하나님으로만 기뻐하는 순수한 은혜의 경지를 맛봅니까 형통할 때입니까 곤고할 때입니까 솔직히 이야 기합시다. 곤고할 때입니다. 고통을 맛볼 때입니다.
이것은 저 자신의 지나간 한 생을 놓고 말할 수 있는 하나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저는 고통이 있었기에 한번이라도 더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통이 있었기에 저는 한 번이라도 더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던 사람입니다. 고통이 있었기에 한번이라도 더 주님을 향하여 내 마음을 열고 그 분이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오늘의 저 자신은 고통이 빚은 하나의 질그릇이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통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나를 빚어 주셨습니다. '만일 저에게 이와 같은 고통, 저와 같은 고통이 없었 더라면 오늘의 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저는 이 질문을 거의 하루에 한번씩 해 보는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질문해 봅니다. 제가 고통으로 괴로울 때, 습관처럼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고통 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 어떤 모습의 목사가 되어 있을까 교회가 매년 부흥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제자 훈련받고,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라는 말만 듣고 있는 상황 속에서 내가 이 고통이 없이 그저 날마다 눈만 뜨면 기분이 좋아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살 것인지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는 인생을 살았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항상 기뻐하라고 했으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뻐할 일만 연속해서 일어났다면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육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은 우리의 겉 사람이 아니고 속 사람입니다. 현세의 사람이 아니고, 내세에 자기와 함께 영원히 살 자아를 하나님께서 더 깊이 마음에 두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고통도 절대 마다하지 아니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도 고통을 통해서 빚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시면 하나님은 눈 딱 감고 고통을 주셔서 그것을 통과시키십니다. 이것이 저의 간증입니다.

누군가가 '고통 없는 지옥'이라는 묘한 말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고통 없는 지옥이 무엇입니까 고통이 없으면 천국이지 왜 지옥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한 사람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폴 브랜드 박사가 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고통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나는 하나님께서 고통을 만드신 것보다 더 좋은 일을 하실 수 있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속으로 '이 양반, 고통이 무엇인지 아직 맛 을 못 보았군.' 하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당해 봐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 한센씨병, 즉 나 병 퇴치를 위해서 싸운 의사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신경이 완전히 마비된 나병 환자가 얼마나 비참해 지는가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고통 신경이 마비되는 것은 나병만 이 아닙니다. 당뇨병도 심하면 그렇게 됩니다. 알코올 중독자도 그렇게 되고, 마약 중독자도 그렇게 됩니다. 추운 러시아 지방의 겨울철에 길바닥에서 동사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왜 그렇게 많이 나옵니까 고통을 느끼는 신경이 마비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무서운 사실은 선천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을 안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이빨이 한 너댓개 난 두 살 박이 아이가 한번은 방에서 깔깔거리고 좋아하길래 그 소리를 듣고 엄마가 뛰어 가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가 뚝뚝 떨어지자 그것이 재미가 있어서 손가락에서 나오는 피로 방바닥에 낙서를 하면서 좋아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지옥이지 천국입니까 아픈 줄을 모르니까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브랜드 박사는 이런 것을 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 고통을 느끼는 신경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잘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 신경이 바로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는 안전벽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만 그렇습니까 몇 년 살다가 없어질 육체에만 고통이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영원히 살 영혼에도 이 고통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다윗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여러가지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드는 완전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라고 하나님은 판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고통으로 인해서 망한 사람보다 고통을 몰라서 망한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피하지 아니하였다면 영원히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의 멸망을 자초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한 둘입니까 이 가운데 도 한 둘입니까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였다면 가정을 위기에서 영원히 건지지 못하고 불행한 사람이 되었을 그런 형제 자매들 이 한두 명입니까 고통이 있었기에 무서운 죄로부터 돌아설 수가 있었고, 고통이 있었기에 자녀를 평생 불행하게 만들지 아니할 수 있었고, 고통이 있었기에 건전한 인격을 갖출 수가 있었고, 사람다울 수가 있었고, 남을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고통이 있었기에 부부가 오늘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할 사람이 한두 명입니까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이 있었기에 주님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제자로서 신 앙 생활을 이처럼 하고 있다고 고백 할 사람이 이 가운데 어디 한두 명이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종의 경고 체제라고 보아야 합니다. C.S. 로이스의 말처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용하시는 확성기'가 고통입니다. 고통은 소리를 칩니다.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면 고통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뇌에 소리칩니다. 고통이 소리를 친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난롯불에 손을 갖다 대면 조심하라고 고통이 소리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이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 그 고통이 없었다면 잘못되는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아주 잘못될 수 있는 위험한 길로 가까이 다가갈 때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만약에 그 경고가 없었다면, 그 고통 이 없었다면 아마 아무것도 모르고 그 길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피하게 하는 하나님의 확성기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싫기는 하지만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할 조건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중에는 아직도 크고 작은 고 통을 안고 씨름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벗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고통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분들이 많고, 어느 때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하루를 우울하게 보내는 분들도 많고, 심한 경우 살 의욕마저 잃어버린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도 해 보았지만 여전히 그 고통이 남아 있는 아픔을 봅니다. 이럴 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내 고통을 보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다윗처럼 말해야 합니다. '나는 고통 때문에 손해보지 않아. 나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어. 나는 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려고 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 이런 고백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비로소 하나님이 내 고통 문제를 손질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저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어떤 때는 불평하기도 하고 믿음이 없을 때는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기도하면서 다시 한번 주님을 바라 볼 수 있게 되고, 다시 한번 다윗처럼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면서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어린아이가 될 때가 많습니다. '형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고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 보다 차라리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이것이 나에게는 더 큰복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다윗이 발견한 중요한 진리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쌓아 두신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봅니다. 19절은 31장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꼭 외우시기를 바랍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이 말씀 안에는 벅찬 감동과 놀람이 들어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요셉이 7년간의 흉년을 대비하여 애굽에 있는 곡간이라는 곡간은 전부 다 양식으로 채워 놓아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하려고 준비한 것을 아십니까 요셉이 7년 동안 백성들을 먹이기 위해서 쌓아 놓은 곡식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고통 때문에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려고 쌓아 놓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다윗이 실제로 경험하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은혜를 그렇게 쌓아 놓고 계신다는 말입니까 31장 전체를 놓고 여러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몇가지 만 봅시다. 7절 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한란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 피하 였더니 외롭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 잘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한란을 맞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떠나는 것입니다. 고독해집니다. 잔병에는 효자가 없다고 합니다. 부모 자식 사이지만 고통을 오래 겪으면 자식도 떠나는 것입니다. 혼자 남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자가 없습니다. 다윗도 한 때는 뜨는 영웅이었지 않습니까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환호했습니까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막상 그가 어려움과 곤고 함을 당하자 다 떠나 버린 것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나 외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 앞에 가 보았더니 하나님이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다 알고 계시고, 하나님은 자기를 이해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아십니까
또 하나 있습니다. 20절 중간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형통할 때는 강한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붙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어려움을 당한 분도 계시고, 실직 당한 분도 계시고, 부도 난 분도 계시고, 건강 때문에 사람 구실 못하고 몇 년을 사는 분들도 계실 텐데, 이런 어려움을 당하면 사람들이 도와주는 경우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나를 짓밟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깁니다. 이것이 정말 험한 세상에서 한 번씩 맛보는 쓴잔입니다. 사람이 약해지면 더 도와주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은 강자는 대우하지만 약자는 짓밟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해지기 때문에, 내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모 재벌 회장인 최장로님이 라는 분과 그 부인되는 이권사님이 라는 분을 가끔 생각합니다. 제가 좀 아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지금쯤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다 떠났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나는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고 계시고 그들의 사정을 알고 계신다는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21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께 피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기이한 인자'라는 말은 넘치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풍성하게 나를 사랑해 주시는지. 세상 사람은 나를 냉대하는데, 하나님 은 너무너무 뜨거운 가슴으로 나를 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경 급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고 절망을 느꼈지만, 내 가 주께 부르짖었을 때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기도 응답을 받는 은혜를 맛 본 것입니다. 안 들으시는 것 같으나 다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때가 되니 다윗도 대적들을 다 굴복시켰습니다. 하나님이 굴복시켜 주셨습니다. 때가 되니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는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때가 되니 모든 죄를 다 용서 하시고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그는 알았습니다. 놀라운 기도의 응답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통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가보면 고통 당하는 나를 위하여 쌓아 놓으신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이 몇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 큰지요.' 엄청납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고통을 당하면서 체험했던 그 은혜만 놓고 전부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에 최대치라는 말은 없습니다. 받으면 받을수록 더 풍성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만약 아직도 고통이 떠나지 않고 곁에 머물러 있는 분들 계십니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내가 받아야 될 은혜가 아직도 많이 있는가 보다.' 이렇게 꼭 고백하십 시오. 믿음의 눈으로 그 은혜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어수룩하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어제 성탄 예배 때 130-140 가정의 부부들이 나와서 자녀들에게 유아 세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얼마나 보기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 귀염둥이들에게 유아 세례줄 때만큼은 아 마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생긴 것도 그렇게 가지각색인지, 애 쳐다보고 두 부부 쳐다보면 재미있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래서 세례를 주다가도 내가 자꾸 웃음이 나와서 참느라고 고생을 좀 하는데, 얼마나 하나님이 기기묘묘하신 지 참 놀랍습니다.
그렇게 세례를 받은 가정 중에 한 가정은 결혼한지 8년만에 딸애를 얻었습니다. 이제 6개월 된 아이를 안고 나와서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주고 제 방에 들어갔더니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그 부부가 저에게 준 편지입니다. 그 가정을 제가 좀 알고 있습니다. 그 부인의 말입니다. 그는 한때 식물인간이 되기도 하고, 벙어리가 되기도 하고, 간질병 환자의 증세를 나타내기도 하고, 귀신도 들리고, 불면증도 걸리고, 조울증도 걸리는 등, 세상에 안 좋은 것은 다 갖다 쓸어 모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고통을 당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부인입니다. 병원을 다녔지만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다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한 2,3년 전의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그가 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피했다고 해서 금방 병세가 호전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어서 번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얼마 동안 우리 교회 여교역자 한 분과 정기적으로 만나서 상담도 하고 기도도 받고 그랬다고 합니다.
작년 1월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날도 상담을 하기 위해서 오고 있었는데 너무 괴로워서 여러 번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살고 싶지를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전도사님을 만나자마자 집에서 가족들에게 했던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자기가 34살이 되는 내년에는 살아 있지 못할 거라고. 이 말을 들은 전도사님은 성령께서 무슨 계시를 주셨는지는 모르지만 기가 막힌 말씀을 했습니다. '자매님, 내 년에는 틀림없이 아기를 손에 안고 유아 세례를 받는 엄마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34살은 죽음의 해가 아니라 성령 충만한 해가 될거예요. 힘을 내세요.' 그 말을 누가 곧이 듣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이런 기적이 그에게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반신반의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몇 달 동안은 여전히 투병 생활을 하면서 고통을 당했는데 언젠가 하나님 이 드디어 그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자를 위해 쌓아 두신 은혜를 그에게 쏟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을 여러분이 직접 들어보세요. '하나님은 정말 고통 중에 있는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전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제 안에서 그분의 계획에 따라 절 찾아 오셨습니다. 감동과 환희 속에서 전 드디어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 제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를 이토록 받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과의 그 뜨겁고 은밀한 사랑을 계속해서 누린다는 이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임신을 했습니다. 애를 얻었 습니다. 그렇게 괴롭히던 질병도 씻은 듯이 떠났습니다. 그것 보다 더 큰 은혜는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가슴이 벅차도록 느낀 것입니다. 그 은혜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참 복도 많네. 복도 많아.'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고통을 느껴도 하나님이 그 정도까지는 안 주신 것 같은데 무슨 복이 이리 많은가.' 또 한편으로는 '이 자매에게 그 고통이 없었다면 예수를 믿었을까 고통을 몰랐다면 대학원까지 나온 이 엘리트 여성이 얼마나 교만해서 인생을 자기 멋대로 살았을까 그런데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알았고, 고통 때문에 하나님이 쌓아 놓으신 은혜를 맛 본, 너무나 기가 막힌 하나님의 딸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제가 해 보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쌓아 놓으신 은혜가 있다는 것을 고통 중에 늘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나간 고통을 놓고도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주셨어. 나는 손해 안 봤어.', 지금 남아 있는 고통을 놓고도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위해서 쌓아 놓으신 은혜를 가지고 계셔. 때가 되면 반드시 주실 거야.'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천년이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어떤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시고 나에게 허락하시는 고통이 있을 때는 그 고통 때문에 내가 반드시 받아야 될 엄청난 은혜도 하나님이 쌓아 놓고 계시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9 절을 다시 보십시다. 다 함께 읽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하나님의 자녀만이 부를 수 있는 밤중의 노래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노래를 마음에 담고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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