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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사람들 (막 1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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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길고 지루했던 겨울이 가고 새봄이 되었습니다. 봄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들판과 산자락에 돋아나는 봄나물, 결혼시즌, 주룩주룩 내리는 봄비, 움이 트고 가지마다 맺는 꽃망울, 그리고 여인들의 옷차림 등이 봄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새봄과 함께 우리도 마음의 창을 열고 봄 채비를 합시다.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도 점검해야 합니다. 봄이 와도 봄이 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감정이 굳어버린 사람일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봄바람이 불어도 움트지 못하는 나무라면 그 나무는 죽은 나무일 것입니다.
본문은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며 믿음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베푸신 교훈 가운데 하나입니다. 22절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절대권위에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절대권위는 하나님만 가지고 계십니다. 그 권위에 동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권위자는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그 권위도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절대도 한분뿐이시고 절대 권위도 하나뿐입니다. 그 권위에 동의하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둘째 신용하는 것입니다.
IMF시대 이후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이 형편없이 떨어졌다가 국제 경제 기구들이 점차 신용등급을 상향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백프로 신용할만한 나라도 없고 기구도 없습니다. 클린턴이 집권했던 기간 중 미국 경제가 회복되는가 싶더니 다시 하락하기 시작했고, 세계도처에서 부동산을 사들이고 떵떵거리던 일본 경제 역시 불황의 늪에 빠진 채 헤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용케 IMF터널을 빠져 나오는가 싶더니 다시 경제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미국도, 일본도, 한국도, 그리고 정치도 경제도 1백프로 신용할 대상이 못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하나님을 영원히 신용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제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렵고 힘들 때 전혀 예치 못한 현금 1억이 그것도 공짜로 생겼습니다. 꿈에도 상상 못한 거금이 생긴 것입니다.
"그 돈을 집안에 보관해야 합니까 은행에 맡겨야 합니까"
"그 돈을 부모님께 맡기겠습니까 은행에 맡기겠습니까"
"그 돈을 시집간 딸에게 맡기겠습니까 은행에 맡기겠습니까"
"그 돈을 남편에게 맡기겠습니까 은행에 맡기겠습니까"
우리의 관심과 신용은 사람보다 은행이고 가족보다 은행에 기우러져 있습니다.
맡길 수 없다는 것은 신용할 수 없다는 것이고 신용할 수 없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살고 함께 일하고 여보 당신이라고 부르며 살고 있지만 신용이나 신앙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떠오르는 찬송입니다. 아서 루터(Arthur A. Luther)가 만든 449장 찬송입니다. 가사를 주목합시다.

1.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2. 검은 구름 덮이고 광풍 일어나도 예수 나의 힘 되니 겁낼 것 없네
예수 나의 힘 되니 겁낼 것 없네

3.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 말아라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이사야 43:1-2를 주목하십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 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하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용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믿어야하며 믿으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의심하지 말라
23절을 보면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의심은 믿음의 적입니다. 의심하면 부부생활도 안됩니다. 남자건 여자건 의심받을 일을 하면 안됩니다. 서로 믿고 신용하고 사는 것이 부부관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에서 열까지 색안경을 끼고 보청기를 꽂고 현미경으로 드려다 보면 함께 살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1.5가 평균시력이라고 합니다.

2.0의 시력도 있긴 하지만

1.0에서

2.0이면 아주 좋은 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력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게 더 많습니다. 내 눈으로 내가 나를 다 보는 게 아닙니다. 위장이나 대장은 내시경으로 의사가 봅니다. 신체 내부는 컴퓨터촬영기법(CT)으로 드려나 봅니다. 골수와 뼈 속은 MRI라고 해서 기계 촬영으로 드려다 봅니다. 백날 천날 거울 앞에 서 있어도 자기 눈으로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는 없습니다. 의심하면 좋은 것은 안보이고 나쁜 것만 보입니다. 그러나 믿으면 나쁜 것은 안보이고 좋은 것만 보입니다.
의심한다는 말의 뜻은 "분리한다"는 것입니다. 의심하면 부부도, 형제도, 교회도, 국가도 분리되고 맙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아트 부크월드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보다, 권력보다, 돈보다 더 좋은 것은 예수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제일 좋고 제일 귀하고 제일 사랑해야 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불수 없다고 해서 의심하면 안됩니다. 의심하면 기도 응답도 없고 믿음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의심을 물리칩시다.

2. 기도하고 구하라
24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미국사람들이 늘상 사용하는 용어와 한국사람의 용어는 그 표현상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사람들은 "도와드릴까요 도와 주실 수 있습니까 .....을 하겠습니까 ...을 해주시겠습니까"라는 말을 애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와주십시오. 해 주십시요라고 말합니다.
미국사람은 우회적이고 간접적인데 비해 우리는 직설적이고 직선적입니다. 이것은 기도 용어에서도 드러납니다. 미국사람들은 "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라고 기도합니다. 이른바 신사협정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사정이 다릅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기도는 적극적이어야 하고 직설적이어야 하고 단순해야 하고 신앙적이라야 합니다. 저희교회 집사님 가운데 지게차를 직접 운영하는 분이 있습니다. 지게차란 무거운 짐을 올리고 내리는 특장차입니다. 차가 오래되고 낡아 새차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동료들이나 같은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새차를 샀으면 고사를 지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집사인 사람이 돼지머리 올려놓고 고사를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지게차를 몰고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교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고사를 지낼 수는 없고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시면 좋겠다는 것이 었습니다.
저는 날짜와 시간을 정해주고 지게차를 교회 앞으로 몰고 오라고 했습니다. 정한 날 정한 시간 교회 앞에 지게차가 도착했습니다. 저는 기도로 고사를() 지내기 위해 지게차 운전석에 올라가 앉았고 그는 옆좌석에 앉았습니다. 지게차 운전석은 승용차보 다 세배나 높았습니다. 올라가는데도 힘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게차 운전석에서 축복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이 지게차가 지게질을 많이 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과 물질의 부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제 일생 지게차 타고 기도해보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 집사님의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이 맘에 들었습니다.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아멘. 기도하고 구합니다.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3. 용서하라.
25절을 보면 "서서 기도하는 떼에 아무에게나 협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주기도에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용서해야 용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헬라어는 아폴뤼오입니다. 뜻은 '놓아주다. 풀어주다. 보내버리다'입니다. 용서란 노예를 풀어주고, 놓아주고, 완전히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즉 자유케해주는 것입니다. 카리조마이라를 말도 있습니다. 뜻은 아무 이유 없이 허락하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찾고 까닭을 캐면 용서가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실 때 이유도 까닭도 조건도 없이 용서하신 것처럼 내가 남을 용서할 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용서는 용서고 따질건 따지자"라고 하면 다시 싸움이 일어납니다.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농업기술센터가 고부간 정나누기 운동을 펼치면서 멋진 시어머니가 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몇 가지를 꼽아보면 "가정 밖에서 가지 할 일을 찾을 것, 젊은 며느리를 이해할 것, 사사건건간섭하지 말 것, 며느리 생일 챙겨줄 것, 남에게 며느리 험담하지 말 것, 며느리를 칭찬할 것, 딸 앞에서 며느리 위신 세워줄 것, 같은 말 되풀이하지 말 것,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지 말 것 등입니다.
용서란 너그러운 마음이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용서란 화해하는 마음입니다. 용서가 없으면 기도가 안되고 기도가 안되면 기도가 안되면 신앙이 죽고 맙니다.
본문의 교훈을 재확인합시다. "하나님을 믿으라" "의심하지 말라" "받는 줄로 믿으라" "용서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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