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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짖는 사람들3 (렘 33: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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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서태지 귀국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일주일 전부터 수백명의 극성 팬들이 몰려와 공연장 마당에서 자고 먹으며 서태지를 만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공연 당일 수천명이 입장을 못해 공연장 밖에서 아우성이었고, 공연장 안은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였습니다. 서태지가 움직이고 몸짓을 할 때마다 아우성, 탄성, 괴성이 울려퍼졌고, 흥분을 견디지 못해 기절하는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서태지가 누굽니까 그는 서 예수도, 서 메시야도 아닙니다. 그냥 노래하는 인기가수 일 뿐입니다. 그런데 극성팬들은 서태지 뒤를 좇아다니는가 하면 서태지를 부르다가 울기도 하고 기절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주님을 부르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가 누굽니까 나를 위해 죽으신 분입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부르는 우리들의 태도나 감정은 어떻습니까
시편 100:1을 보면,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라고 했고, 시편 105:1을 보면,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1. 평강을 주십니다.
9절을 보면,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섬기는 성이 받은 복과 평강 때문에 이방인들이 놀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29:11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했고, 이사야 26:12을 보면,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들은 평강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지난 3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와이즈만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이 평화를 위해 우리는 세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UN의 중재와 미국의 중재,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노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언제 어떤 사태가 벌어질 지 예측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나라는 평화를 하나님에게서 찾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러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평화를 찾지 않고 UN이나 미국 그리고 협상을 통해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대로 언제 어디서 어떤 사태가 돌발할지 예측을 못하는 것입니다.
미국 CNN방송이나 영국의 BBC방송이 하루도 빠짐없이 동향을 뉴스에 담아 보도하는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이트(도시)라는 말과 샬롬(평화)라는 말이 합성해서 된 이름입니다. 그 뜻은 '평화의 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과는 아랑곳 없이 그동안 20번이나 주인이 바뀌었고, 그 중 10번이나 완전 폐허가 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지금도 전세계가 이곳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4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회교도 지역, 기독교 지역, 유대인 지역, 아르메니안 지역입니다. 특히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좁은 땅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평화가 깨질지, 언제 총성이 울릴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에 평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들고 땅에서 솟아나는 평강은 바람 불면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시들지도, 날아가지도, 꺼지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겐 그 평강과 그 평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찬송가 469장은 코넬과 쿠퍼가 작사 작곡한 찬송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맘 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이 땅 위에 험한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있나
우리 모두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는 그곳이 낙원입니다. 총소리가 울리면 엄마는 놀라지만 아이는 놀라지 않습니다. 비가 쏟아져도 엄마는 뛰지만 아이는 뛸 필요가 없습니다. 배가 고파 울면, 엄마가 먹을 것을 챙기기 때문에 아이는 먹을 것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는 엄마가 다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원하는 평화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주십니다. 평화를 찾아 헤맬 필요도 없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 이 평안, 이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소리가 다시 들리게 해 주십니다.
10-11절을 보면,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고 황폐한 그 거리에 다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 신부의 소리,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는 소리가 들리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적막하고 고요했던 예루살렘이 회복되면서 북적대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늙으면 어디 조용한데 가서 여유있게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젊을 땐 산 속도 좋고 바닷가도 좋고 사람 없는 계곡도 상관이 없지만, 나이 들고 늙으면 사람 소리도 들리고 자동차 소리도 들리는 곳이 좋습니다. 늙을수록 외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사는 집에는 사람 소리가 들려야 정상입니다. 음악이 연주되는 세종문화회관이 나 예술의 전당이 아닌 다음에야 떠들석하고 이 소리 저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우리 집안 얘길해 보겠습니다. 저희 부부는 아직 그렇게 나이가 많은 축에 드는 건 아니지만 벌써 삼남매 다 밖에 나가 있고 저희 부부만 남아 있습니다. 집안에 아이들 우리소리, 떠드는 소리, 웃는 소리가 없습니다. 너무 조용해서 탈입니다.
전쟁에 져서 폐허가 된 예루살렘, 사람소리, 짐승소리가 끊어졌습니다. 웃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노랫 소리가 끊긴 지 7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 거리에 다시 사람이 왕래하고 웃는 소리, 떠드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젊은이들의 함성이 터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말 못하는 농아들의 수화 찬송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그들은 소리로 찬송하지 못하기 때문에 손과 몸으로 찬송을 부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여호와의 집에서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찬송소리, 기도소리, 감사소리와 믿음은 비례합니다. 찬송소리가 없고, 기도소리가 없고, 감사소리가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어로 찬송을 '할랄'이라고 합니다. 할랄은 본래 소리에서 기원한 말입니다.
찬송은 소리를 내서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도 내 소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도 소리로 드립니다.
우리에겐 어떤 소리가 있습니까
우리나라 원로 소리꾼 박동진 옹은 8시간 동안 판소리를 완창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판소리는 혼신을 다해 부르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8시간 동안 계속한 것입니다.
나에겐 어떤 소리가 있습니까
슬픈 소리입니까 기쁜 소리입니까
불만의 소리입니까 감사의 소리입니까
어떤 소리를 내고 있습니까
적막한 가정에 찬송 소리가 들리게 하옵소서.
폐허 같은 내 심령 속에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기 하옵소서.
기도소리, 감사소리, 찬송소리가 그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3. 결론을 찾겠습니다.
33:1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고 했고, 10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고 했고, 12절을 보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고 했고, 17절과 20절, 23절, 25 절 역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구약 예언서의 중요한 요점을 우리에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예언의 절차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 예언을 받은 예언자들이 백성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대언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예언자들이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나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주실 때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같이 말씀하신 것을 예언자들은 그대로 받아서 대언했던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받은 예언자와 그 대언의 말씀을 받는 백성들 간의 삼각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더하거나 덜하면 안 됩니다. 그대로 원형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8을 보면,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라고 했고, 19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했습니다.
받은 대로 가르치고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먹고 순종해야 합니다.
소금 장수네 집에 나귀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주인을 따라 늘 등에 무거운 소금을 싣고 다니며 불평 불만이 많은 나귀였습니다. 어느 날 소금을 싣고 개울을 건너다 실수로 넘어졌는데 소금이 물어 녹아 짐이 가벼워졌습니다. 나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 후로 나귀는 종종 넘어져 짐을 가볍게 하곤 했습니다. 나귀의 얕은 꾀를 알아차린 주인이 괘씸하게 생각하고 하루는 꽁꽁 뭉친 솜을 잔뜩 실었습니다. 나귀는 여느 때처럼 미끄러지는 척하고 물에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등에 실은 솜뭉치는 천근 만근 더 무거워졌습니다. 주인은 무거워 쩔쩔매는 나귀에게 "니 꾀에 니가 넘어졌지"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부르짖읍시다.
말씀대로 순종합시다. 꾀부리지 맙시다.
눈을 들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봅시다.
손을 들어 주의 옷자락을 잡읍시다.
입을 열어 주의 이름을 부릅시다.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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