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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익한 종입니다 (눅 1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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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실재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가 우리들의 믿음이 없어지기도 하고, 신앙생활에 피곤을 느끼기도 하며, 혹은 가정생활, 사회생활에 무력함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좋은 뜻으로 시작하였다가 낙심하여 돌아서는 나약한 사람들을 봅니다. 또한 그 이율 찾는/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기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며, 제자들에게 필요한 참된 믿음을 가르쳐 주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5절"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라고 하였는데 바로 제자들의 요청 때문에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더하소서! 진정 믿음이 있으려면 믿음이 자라려면, 믿음이 점점 온전해지려면,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이 믿음의 소중함을 알았다는 것만 해도 저들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이야기를 잘 압니다. 기브온 산당에서 일 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내게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 하실 때에 솔로몬은 치리자로서 필요한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3:10)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솔로몬은 지혜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한 부와 영광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지혜를 구하는 지혜 자체가 상당한 것이요, 믿음을 구하는 믿음 자체도 상당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오셔서 한 가지만 구하라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한마디로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이 가장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주님께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수준이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도 역시, 돈 명예, 출세 등 이 모든 것을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3년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다 보니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아직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역시 믿음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가만히 보니 예수님의 믿음이 대단하시더란 말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시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사건적인 믿음을 통해서 믿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귀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표현하면 기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더 하소서!" 실족치 않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하는 데에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적을 행하는 것도 결정적인 요소가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이 절대적 필요성을 깨달은 저들 제자들이 바로 이 믿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좋겠다고 하십니다. 대단한 믿음, 바윗덩이처럼 큰 믿음이 아니라 이 작은 겨자씨요 살아 있는 조그만 믿음이 있어도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면 순종할 것이라는 믿음의 위대성을 설명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비유로 믿음이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종이라고 하는 자기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종이라고만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요15장에 보면 우리를 당신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편에서도 예수님은 나의 친구라고 건방지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가 친구처럼 대한 다고 해서 아빠는 내 친구야! 하고 덤벼들면 후레자식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대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언제나 대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오로지 종일뿐입니다."하는 그 마음을 가져야 믿음이 자란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종이라는 의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이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편지 가운데에는 언제나 "나도 사도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예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를 예수님의 종이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나 제자들이 실수한 그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의식,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일들을 머릿속에 새기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종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1.종이란 첫째로 소유권이 없습니다.
가진 것도 없지만 자기의 생명마저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마음대로 죽지도 못합니다. 자기의 재능은 물론 심지어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것이 되고 맙니다. 모두가 주인의 것일 뿐 나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믿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것이라 주장하고, 거기다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더 많은 복을 받아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믿음이 자라지는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좀 했다고 생각이 됩니까 내가 지적을 나타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나타내신 것일 따릅입니다. 또한 내가 말씀을 전했다 해도 주님께서 내 입술을 통하여 역사하긴 것입니다.
그 아무 덧도 내가 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도 기능도, 내 자신마저도 나에게는 전혀 소유권이 없습니다. 이것이 종의 모습이요 종의 의식입니다.

2.종은 절대 순종합니다.
무슨 일을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며 묻거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입니다. 폭우가 몰아치는 악천후에도 종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루종일 밖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배도 고프고 피곤도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다시 말하기를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 먹는 동안에 수종을 들며 심부름을 한 다음에 먹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종은 이렇게 이치를 따지거나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양을 치라면 양을 치고, 밭을 갈라면 밭을 갈아야 합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왔더라도 또 일하라면 해야 합니다. 밤을 세워야 할 뿐 거절이한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불평이 있고 질문이 있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때 여기에 바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은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가리고 따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를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믿음이 자라기를 바란다면 주님에 대한 절대 순종, 절대 위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인의 말씀이 종에게서 능력화되어 그것이 종으로 하여금 능력을 생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에게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지혜롭게 주신 말씀대로 하면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또한 종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할 때에 거기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3.이제 세번째로 생각하는 종의 특성은 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을 시킨 일꾼에게는 그 대가로 삯을 줍니다. 그러나 종에게는 보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마디의 고맙다는 인사도 없는 것이 이 종입니다. 보상은 없더라도 알아주기라도 해야겠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모두들 보면 결국은 안알아 준다고 불평들 아닙니까 그러나 정말 종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가 다 무엇입니까 다소라도 받고자 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고자 하다가도 나중에는 받고자 하고, 처음에는 무조건 바친다고 했다 가도 뒤에는 조건으로 바치며 점점 달라지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조석변개라고 하지만 가느 마음과 오는 마음이 그렇게도 다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수고를 시작할 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제법 하다 보니까 무엇인가 좋은 반응, 최소한 칭찬이라도 받아야 될 것이 아니냐는 당위성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 가지고는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세상은 당연히 너희를 미워하고 핍박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나를 먼저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며, 따라서 내 제자가 되었다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사례도 없고, 보수도 없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노예입니다
어떤한 경우에 있어서도 칭찬이나 보수를 전혀 바라지 않는 깨끗한 마음,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믿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적합한 비유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를 하던 한 선교사가 홍수에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어떤 중국 사람 하나가 이 선교사를 건져내어 주었습니다. 이에 선교사가 너무 고마워서 일생 동안 이 은혜를 기억하며 살겠음이 이름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선한 사마리안 사람에게 이름이 있소 있다면 내 이름을 말해 주겠오"하더니 그대로 가 버리더랍니다. 종은 이런 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종은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4.종은 불평이 없다는 것입니다.
피곤이나 불평, 원망이 전혀 통하지를 않습니다. 여기에는 절대 의무, 절대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때와 장소, 성격도 가리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힘들다는 말은 할 것이 아닙니다. 하는 데까지 하다가 죽게 되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힘들다는 말은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는 데에는 이미 앞선 수많은 순교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도 순교 아니면 순직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딴 소리 하거나 불평할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종의 마음입니다.

이제 참으로 중요한 결정적인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수고하였으나 그 마지막 생각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지칠 만큼 많은 수고를 하고도 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우리네 동양인의 겸손한 마음과 생각의 표현 방법이기도 합니다. (손님을 위하여 상을 가득 차려 놓고도 차려 놓은 것이 없다고 하는 생활의 자세)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도록 수고하고도 일한 것이 없다는 마음! 이 마음만으로만 살아간다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아무런 불행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식을 위해 수고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리고 아내의 마음이, 남편의 마음이 이렇게 불편이나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나 내가 하는 일은 부족하다고 하는 마음, 수고하고도 부족하고 주고도 부족하며 오히려 죄송해지는 마음이 되는 거기에 진실이 있고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쉬임없는 수고를 하고도 부족하기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정 믿음이 더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하는 자기 의식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충성심도, 우리의 겸손도, 우리의 종됨도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하는 자기 의식 속에서 보다 더 성장해갈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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