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행복의 비결 (시 37:1-11)

첨부 1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마라톤 대회는 미국 보스턴시에서 열리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라고 합니다. 순수한 아마츄어 마라톤 대회입니다. 매년 4월이되면 세계의 마라톤 선수들이 다 모이는데 평균 2000여명이 해마다 달린다고 합니다. 이 마라톤 코스는 언제나 일정하다고 하는데 전 코스를 다 달리는 사람은 약 1/3밖에 안되고 2/3는 중도에서 탈락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승지점 6마일 전에 한 언덕이 있는데 이 언덕을 넘기가 퍽 힘이 들어 대부분의 선수들은 이 언덕에서 포기해 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마지막 6마일 지점에 있는 이 언덕을 [통탄의 언덕]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러한 고비가 있습니다. 잘 달리다가도 가끔 통탄의 언덕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서 어떤 사람은 좌절해 버리고 포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언덕이 있는 사실 자체를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힘들더라도 그 언덕을 잘 넘어 영광의 월계관을 쓰기도 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새 생명을 얻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도 하늘에 사는 것이 아니라 땅에 발 붙이고 살기 때문에 자주 절망하고 회의와 좌절에 빠지는 때가 많습니다. 신앙의 사람이라도 대부분 네가지 원인에 의하여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첫째는 세상이 너무 악할 때에 좌절하고 절망해 버립니다. '세상이 다 악한데 나혼자 선하게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나'하고는 포기해 버립니다.

두번째는 세상이 너무 불공평할 때입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았는데도 절대적으로 못살고 어떤 사람은 절대적으로 잘살때 '아무리 내가 성실하게 일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하고 좌절과 절망을 하게 됩니다. 더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산 사람이 나중에 더 많은 것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당연한 데도 그렇지 못할 때에, 성실하게 믿음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려는 마음을 포기해 버리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심리가 적용하게 됩니다.

세번째는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시련이나 역경이 거듭될 때에 절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다가 한번 어려운 일을 당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아, 이것은 하나님이 더 좋은 것 주시기 위하여 내게 이러한 시련을 주시는가 보다'하고 생각하며 시련과 역경을 믿음으로 잘 이겨냅니다. 그러나 역경과 시련이 한두번이 아니라 일년, 이년, 계속되면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나 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시는구나'하고 생각해 버리고는 절망합니다.
네번째는 현대인이 가장 느끼기 쉬운 단조롭고 틀에 박힌 생활에서 오는 권태감입니다. 이 권태감으로 인해 짜증과 불평이 생기고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자연 생활에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롤로 베이]라는 학자가 쓴 책 가운데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책은 현대인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미국에서 실지로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놓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뉴욕에 한 노선 버스 기사가 있었습니다. 노선버스라는 것은 매일 같은 노선을 다니는 버스를 말합니다. 이 노선버스를 타고 매일 왔다 갔다하는 길로 10년, 20년 운전하던 이 기사가 견디다 못해서 어느날 그 버스를 몰고 자기가 가고 싶은데로 멋대로 가버렸습니다. 버스 회사에서는 버스가 돌아올 시간이 되었는 데도 돌아오지 않자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 버스 기사와 버스의 행방을 찾는 전파를 전국에다가 보냈습니다. 한 일주일 후에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프로리다 주의 한 경치좋은 산 속에서 이 버스기사를 잡아서 유치장에 넣어 놓고 버스 회사에서는 이 기사를 구속시킬 것인가를 심각하게 의논하고 있는데 이 버스 기사의 이야기가 조그만 신문에 실리자 뉴욕의 많은 시민들이 꽃다발을 들고 유치장에 갇혀있는 기사에게 찾아와서 축복하고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이 버스 기사의 엉뚱한 행위가 자신들의 권태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러한 인간을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텅빈 인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좌절하고 절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편 37편은 가장 악한 시대에 살았던 시인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득세를 하고 온갖 세상의 악한 죄를 좇아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세상 너무나 불공평한 세상을 보고 불평, 원망,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살았던 시인에게 주신 말씀인 동시에 오늘날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얼마나 악하며, 불공평하며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의 깊은 뜻을 찾아보도록 합니다.

첫째 어떤 경우에든지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라고 하나님의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 어떻든지 환경이 어떻든지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삶을 긍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37편의 시인은 세상의 너무 악함 때문에 좌절에 빠져 그 입에 불평이 가득찼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투기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불공평함에 분노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자기에게 닥친 어려움을 보고 불만이 가득찼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런 어려움을 주시고 세상의 악한 사람들은 잘되게 하시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부정적으로 인생을 볼 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반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시인에게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 분을 그치고 노를 버려라. 불평하지 말아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불공평하다고, 자신에게 닥친 환란이 크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투기하고 노하면 자신이 점점 더 깊은 악에 빠져들어 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부정적이 되기를 거부해야 하며 삶을 긍정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두운 면을 크게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야외에 나가게 되는데 겨울의 산에 가면 "여름에 왔더라면 좋았겠다"하고 숲이 우거지고 물이 흐르는 여름에 가면 "눈이 내리는 겨울에 오면 좋겠다"하고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에 가면 "꽃피는 봄이 오면 좋겠다"하고 말합니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은 보지 않고 어두운면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 인간은 최악의 상태를 미리 예견해 놓고 자기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더욱이 하늘이 온통 어두움으로 덮여있을 때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되면 자신을 실패자로, 무능한 자로, 보잘것없는 자로 낙인을 찍게 됩니다. 그 결과 좌절에 빠지고 불평, 원망, 분노, 미움, 질투, 시기가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더 큰 악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나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이나 사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대부분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을 정신 질환자라고 말합니다. 일례를 들어 하나 더하기 하나는 얼마냐는 물음에 보통 사람들은 둘이라고 대답하는데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은 셋 또는 다른 답을 말합니다. 죽어도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우리는 환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보지만 더 고약한 병은 신경과민입니다. 이 신경과민은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라는 사실은 아는데 그것이 마음에 안든다는 사람입니다. 온통 세상이 다 마음에 들지 않고 눈에 거슬립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나 어디에서도 언제나 만족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됩니다. 약이 병보다 더 나쁠 수가 있습니다.

이혼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를 보면 이혼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원하는 이혼을 했으므로 이혼하기 전보다 더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90%가 이혼하기 전보다 이혼한 후가 불행하다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언제나 긴 안목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루 살다가 죽을 인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방이 여러개있는 집과 같습니다. 방 한칸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다른 방도 잘못되는 것이 아니며 방 한칸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집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우리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기를 결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먼저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고 다음에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성실로 식물을 삼으라][여호와를 기뻐하라][너의 길을 여호와에게 맡겨라][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톨스토이가 쓴 '나무의 고백'이라는 글 가운데에서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불행한 환경을 만나게 되면 네가지 유형으로 반응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첫번째 반응 유형은 불행한 환경에서 도망치려고 술이나 세상의 환락에 빠져버리는 인간상입니다.
두번째 유형은 불행한 환경에 항복하고 포기해 버리거나 자살하거나 불평 불만 속에 빠져버리는 인간상입니다.
세번째 유형은 불행한 환경을 독한 마음으로 헤치고 나가는 인간상입니다.
네번째 유형은 눈을 높이 떠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불행을 많은 사람을 위해서 개조하는 인간상입니다.

어느 곳에 홍수로 인해 다리가 떠내려갔습니다. 이 상황 앞에서 사람들은 4가지로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필이면 내가 건너가려고 할 때 왜 홍수가 나서 다리가 떠내려 갔는가'하며 신경질을 부리며 화를 내면서 술집에 가서 술이나 퍼마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도 다 팔자소관이야 하필 내가 건너가려고 할 때 다리가 떠 내려갈 것이 뭐람. 까짓것 할 수 없지"하고는 원망, 불평 속에 돌아가 버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주 독한 마음을 먹고 "다리가 떠 내려 갔다고 내가 못 건너 갈 것인가"하며 옷을 훌훌 벗어들고 혼자서 헤엄쳐 건너갑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도 건너가야 하겠지만 남들도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안됩니다. 같은 정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힘을 합해 다리를 놓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크리스챤이라고 했습니다. 이 공동체가 곧 교회라고 톨스토이는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합니다. [라인 홀드니버]라는 사람이 쓴 '평화의 기도'에 보면 [주여, 내가 어쩔수없는 것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주옵소서. 또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라는 기도 내용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문제는 가슴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무리 탄식해도 소용없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종교에서 대중 가요 중에서 제일 건전한 가사를 선정했는데 최고상을 받은 것이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가사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가 마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나그네인걸.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가 마는 그림.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 해. 그리운 가슴끼리 모닥불을 지피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마는 조각. 그래도 우리는 곱게 곱게 새겨야 해.]

우리의 인생은 전부 미완성입니다. 쓰다가마는 편지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렇게나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인생의 글을 쓰다가 그만 두고 떠나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더 곱게 써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노래, 사랑의 노래도 10년 20년 30년.... 부르다가 떠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부부도 어느날 서로 헤어져 이 세상을 떠나야 하며 부모와도 헤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모두 나그네처럼 타향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땅에 살 때에 외국인과 같이 나그네와 같이 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타향에서 외롭게 사는 존재들입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면서 사는 우리! 어쩌면 다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아웅다웅하지 말고 사슴처럼 그 목을 서로 기대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꼭 들수없는 그런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완벽하고 부족함이없는 완성된 존재라면 여러분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미완성이요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나 부모와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완성이요, 부족하고 쓰다가 말고 부르다가 멎어야 할 존재들이기에 더 사랑하고 더 아껴주고 더 아름답게 인생을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대, 악한 시대, 불공평한 시대, 환란과 역경이 끊임없이 닥치는 이 시대에서 끝까지 인생을 긍정하고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부정적이 되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십시다. 세상이 온통 불성실하고 온통 악을 행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시대에 오히려 성실로 빛을 높이 비추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십시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이 무신성의 시대에 여호와를 기뻐하며 사십시다. 우리의 길을 여호와께 맡깁시다. 그리고 때때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립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아름답고 더 복되게 살아가게 하시며 이 사회에 아름다운 빛으로 살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러한 믿음 위에서 우리의 인생이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산 위에 세운 동네와 같은 삶으로 변화되는 은혜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