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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비멜렉의 비극 (삿 09: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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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이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모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심지어 부모의 기대를 따르기는커녕 부모의 뜻을 거스려 잘못된 길로 나갈 때가 많습니다. 이는 부모의 가슴 에 못질하는 불효 막심한 노릇입니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본문의 주인공인 아비멜렉입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70여 명의 아들들 가운데 세겜의 첩에게서 낳은 서자(庶子)였습니다(8:31). 그는 이복 형제 7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기드온은 자신과 자신의 아 들은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아비멜렉이 아버지 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는 왕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라 세겜 땅 에 사는 외척의 도움을 빌려 일종의 청부 살인 사건을 저지릅니다 .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기드온의 기대 와 얼마나 다른 행동입니까?

70명의 아들이 한 반석에서 변을 당했을 때 유일한 생존자가 있 었습니다. 그는 막내였던 요담입니다. 요담은 매우 용감하였습니다 . 그는 이복 형제였던 아비멜렉이 왕이 된 후에 세겜을 찾아갔습 니다. 자기 형제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 던 세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는 세겜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이 산 의 맞은 편에는 에발 산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두 산이 만나는 계곡은 일종의 원형 극장과도 같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세겜이 바로 그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형상 마이크가 없어도 산 위 에서 소리 치면 산 아래에서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요담은 아버지 기드온의 기대와는 달리 왕을 세웠던 세겜 사람들을 향해 유명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설교는 일종의 풍유적인 설 교입니다. 「네 나무의 비유」는 부당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던 아 비멜렉의 비참한 말로를 증언하였습니다.

 중국 격언에 보면 두 사람이 나란히 여행을 할 때 동행하는 사람 이 착한 사람이거나 악한 사람이거나, 두 경우 모두 똑같이 교훈 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착한 사람과 동행할 때는 나도 저 사람처럼 인생을 살아야지라고 다짐하게 되고, 악한 사람과 동 행할 때는 나는 저 사람처럼 살지 말아야지 하고 경각심을 불 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비멜렉의 비극을 보면서 우리는 아비멜렉처럼 인생을 살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

아비멜렉의 비극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다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본분을 망각한 이기적인 욕망의 비극 ^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존재 목적이 어디 있습니 까? 예수께서는 한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이런 대답을 유도해 내셨 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눅 10:27).

주님은 이 율법사의 대답을 승인하면서 그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 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 랑하는 것입니다. 이 본분을 망각하면 남는 것은 자기 욕심을 채 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숲의 나무들이 감람나무를 찾아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이때 감람나무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 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9절).

감람나무는 자신의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해야 하므로 그 일을 그만두고 왕 노릇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자신의 본분이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의 대답 역시 자신의 본분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나무들의 왕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13절).

포도나무는 자신에게서 나는 술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하 므로 다른 일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무들의 임금이 되는 것 조차 자신의 임무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감람나무와 동일한 고백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1인칭이 먼저입니다. 내(I)가 최우선입니다. 상대방(You)은 그 다음입니다. 그(He, She)는 3인칭으로 맨 뒷전에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습니까? 물과 성 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언제나 그분,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그분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입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들이고, 제일 마 지막에 와야 할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 정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생 전도 단체 가운데 「JOY」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단체의 목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JOY」의 철자를 가지 고 만든 것인데 J는 Jesus first, O는 Others second, Y는 You third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이고, 그 다음이 이웃들, 마지막 이 당신, 즉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평생 나밖에 모르고 살아갑 니다. 이기심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평생 자기만을 위해, 자기 가 족만을 위해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건강과 사 업 번창과 자녀들의 성공만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만 복받게 해 달라는 기도가 전부입니다. 이웃을 망각하고 살면서 자신은 그리스 도인이라고 떠벌리고 다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해 보십시오. 고통받고 있는 이 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 자들, 얽혀진 인간 관계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 누구에게 도 고백할 수 없는 고통을 간직한 사람들, 사업이 망하여 미래가 막막한 이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이 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무더운 지역에서 선교하는 분들, 러시아와 중국에서 수고하고 있는 분들 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회교 국가에서 목숨을 걸고 전도하고 있 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와 전혀 상관없게 느껴 지던 지구 반대편의 나라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내 이웃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중보 기도는 이웃을 발견하게 합니다. 우리의 시야를 넓혀 줍니다 .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 다 자녀들에게 해외 선교 현장에 나가보도록 권장하십시오. 그들의 생각의 폭이 확장되고 생활 태도가 변할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인생을 낭비하는 삶입 니다. 그런데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면 자기를 찾습니다. 역 설적인 진리입니다. 예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아비멜렉은 자기만을 위해 인생을 살았습니다. 인생을 소모하는 삶 을 살았습니다. 인생의 본분, 삶의 목적을 상실한 허무한 인생이 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살지 못하고 자 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 한 데서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지배욕에 사로잡힌 비극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긴다는 말 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상대에게 도움이 되도록 무엇인 가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웃을 섬기기 원합니까? 무엇을, 어떻게 기여하겠습니까? 감람나무를 생각해 봅시다. 감람나무는 기름을 생산합니다. 그 기 름으로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어떻습니까? 무화 과나무는 아름다운 실과를 맺습니다.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워 줍니 다. 포도나무는 어떻습니까?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고 새 술을 냅 니다. 중동 지방에서 포도주는 음료수로 가장 중요합니다.

 가시나무는 무엇으로 기여를 합니까? 가시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 게 합니까? 15절 말씀에 다른 나무들이 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하자 가시나무가 대답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내 그늘에 와서 피하라는 말은 내 지배를 받아라, 내가 너 희를 다스리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지배욕만을 채우려 는 속셈입니다. 이웃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처사입니다. 결국 스 스로 비극을 자초하는 행동입니다.

 당신은 자녀들을 기르면서 공부 잘하라는 말만 하지 않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람으로 태어나서 역사에 무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 보람 있는 삶이다. 그러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뭐니뭐니해도 돈이 최고다. 남에게 뒤지지 않고 출세하려면 일류 대학에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서 무시당한다.

당신은 자녀에게 어떤 가치관을 심어 줍니까?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도록 가르친다면 그는 자라서 아비멜렉과 같은 비극적인 삶을 살 것입니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지배욕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자 리잡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께 이런 부탁을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 날이 되면 한 아들은 주 님 오른편에 앉혀 주시고, 다른 한 아들은 왼편에 앉혀 주십시오 (마 20:21 참조).

마가복음 10장 37절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도 주께 권좌(權座) 를 청탁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에 대한 욕망은 많은 사람들 이 갖고 있는 세상적인 욕심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人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 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 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4,45).

주님의 삶은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다스리고 빼앗는 지배욕을 추구 한 아비멜렉의 삶은 비극이었습니다. 혹시 당신은 이런 비극의 현 장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파괴를 지향한 삶의 비극 ^ 가시나무는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아무 것도 기여한 것이 없습니다 . 오히려 파괴를 자행했습니다. 70명이나 되는 자기 형제들을 살해했습니다. 자신의 출세욕과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방해가 되는 모든 존재들을 다 제거해 버렸습니다. 지배욕에 사로잡힌 비극적 인 결과는 파괴로 나타납니다.

가시나무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꼭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남을 찌 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는 기 름을 생산하고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고 포도나무는 포도와 새 술 을 공급합니다. 모두 생산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만은 생 산해 내는 것이 없습니다. 가시나무의 삶은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 라 파괴적이었습니다.

 당신의 삶은 생산적입니까, 아니면 파괴적입니까? 당신의 삶의 자 세는 대화 중에 어떤 사람이 거론되었을 때 나타내는 태도와 자세 를 점검해 보면 됩니다. 폭력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고 생명을 빼 앗는 것만이 파괴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악담을 하고 다 른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그 사람을 매도하고 비판하고 헐뜯는 것 이 가시로 찌르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인 당신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자는 제안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를 도와줄 방안을 생 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변화될 가능성을 찾아보는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들을 죽이겠다고 날뛸 때 생각 없이 그 일에 동참했던 세겜 땅 사람들처럼 부화뇌동하면 안 됩니다. 주변에서 남을 중상하고 시기하고 헐뜯는 사람을 보게 되면 이를 말리지는 못할 망정 한 술 더 떠 상대를 비난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 울은 서신서에서 서로 사랑하라(엡 5:2 참조)는 내용을 강 조하였습니다. 그와 더불어 서로 세우라(골 1:28 참조)는 것도 강조합니다. 당신은 이웃을 허는 사람입니까, 세우는 사람 입니까? 아비멜렉의 비극은 이웃을 헐고 파괴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다 른 사람 뿐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는 인생을 살았습 니다.

 아비멜렉의 최후가 9장 5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 두 골을 깨뜨리니.

아비멜렉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여자가 던진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져 죽었습니다. 이는 우연한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 리 계획하고 계산한 심판입니다. 그가 받아야 할 당연한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이웃에게 덕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파괴를 일삼았던 아비멜렉은 하 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비멜렉은 죽어 가면서도 자존심을 내세웠습니다.

아베멜렉이 자기의 병기 잡은 소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그가 여인에게 죽었다 할까 하노라 소년이 찌르매 그가 곧 죽은지라 (54절).

아비멜렉은 죽는 순간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 신의 모습을 돌아보기보다는 여자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앞섰습니다.

 이 추악한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죽은 아비멜렉의 비극은 인생의 목적을 망각한 데 있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 과 이웃을 위해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범죄하고 이웃을 파괴하며 사는 인생은 자기 자신까지도 비참하게 만드는 최후를 맞게 됩니다.

이제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야 할지가 머리에 떠오를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이름을 존귀케 하 기 위하여 인생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당신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 형제와 이웃 을 사랑하며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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