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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버가모 교회 (계 0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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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皇都(royal city);버가모
공무원과 군인들로 가득차고 하국적인 지식인으로 가득 찬 대학교 의과 대학 부속 병원과 변질된 괴이한 종교들이 적잖게 있는 도시, 버가모시이다. 서머나 북쪽 56km지점에 있는 버가모는 일곱 도시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거대한 요새와 같은 언덕에 위치한 멋진 도시였다.
필레태루스가 리시마쿠스 왕과 맺은 동맹을 끊고 B.C.282년에 버가모 왕국을 설립하면서, 버가모는 그탁월함을 나타냈다. 요한이 이 편지를 보낼 당시 버가모는 한 로마 지방의 행정 중심지였고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사데나 또는 에베소에서와 같이 불안전성이나 불확실성을 야기시킬 만한 것은 없고, 영구성과 강력함과 튼튼한 권세와 큰 규모라는 인상을 반드시 받게 된다.’

2.버가모의 종교

세계에서 신전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곳은 환자 간호병실과 연구하려는 자들을 위한 의술학교가 있었다. 제우스라는 神과 아스클레피오스神을 ‘구세주’로 소개했는데, 그런 표현은 그리스도만을 메시야로 믿는로 그리스도인들을 거슬리게 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의 모습을 한 신이었고, 버가모에서 보았던 뱀은 거의 어느 곳에서든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동전에는 황제 카라칼라가 뱀 앞에서 오른손을 치켜 들고 경의 표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고대에서 오른손을 든다는것은 숭배한다는 제스추어이다. 모패트는 시 144편의 기도를 그 입술에다 거짓말을 두며 거짓 맹세로 오른팔을 치켜 든 이러한 이방의 대군으로부터 구출되기를 바라는 요청으로 번역한다(시 144:7-8)
길들인 뱀들을 신전 건물에서 키웠고 그 뱀들은 환자의 치유책과 연관되었다. 치료받기를 원하는 환자들은 캄캄한 시간에 뱀들중 한 마리가 옆으로 지나가다 스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신전에서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뱀의 접촉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접촉이므로 즉시 치유가 뒤따라온다고 하였다. 그러나 뱀의 상징을 버가모가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1.사단의 위가 있는 곳--

예수께서 버가모를 ‘사단의 위가 있는’(13절)곳이라고 묘사한 가장 분명한 이유은 제우스를 위한 제단 때문이다. 언덕 정상 가까이에 우뚝 솟은 바위에 세위진 놓이 6m, 사방 27m크기의 제단이었다. 뱀 꼬리를 단 억센 거인으로 묘사된 가울 인을 헬라 신들이 패배시킨 것을 보여주는 동상이었다. 고대 올림피아 인들이 한때 ‘제우스는 구세주이시다’라고 오만하게 주장했던 말은 기독교 시대에서는 분명히 신성 모독적인 것이었다.

2.‘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신약성경은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나그네라고 하였다. 이 세상이 우리의 영구한 집이 아니라 다만 천성을 향해 그 길을 지나가는 순례자에 불과하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13절)라 엣 번역이 ‘거하다’(dwell)라고 표현했는데 마음대로 거주지를 옮길 수 없음과 버가모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방법을 갖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 떠날 수 없는 삶의 터전을 잡은 곳이었다.
버가모에 분위기는 ‘지식은 힘이다’는 것이었다. 버가모 도서관은 20만 권이 넘는 장서를 소장했다. 세계 굴지의 도서관 중 하나로 간주되었고 유메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사서를 설득하여 버가모로 어떻게든 데려왔다. 그는 송아지 가죽을 이용하여 부드럽고 품위있게 가공처리 하여 요지를 만들었는데 내구력이 아주 좋아 ‘버가모 紙’하면 최고의 상품이었다. 영어에서 쓰고 있는 ‘양피지(파피루스)’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버가모 사람들은 도서관을 자랑했고 그것을 모든 지식의 보고로 생각했다. 버가모 시민들은 기독교의 계시 진리관을 반대하고 그들의 도서관을 내세웠을 것이다.

2.신앙을 지킨 버가모교회
1)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지성을 사로 잡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히는 것이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13절)라는 구절에서 그러한 표지를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관해 계시하셨던 모든 것과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을 내포한다. 우리는 규칙적으로 성경을 공부하여 계시의 부요함을 캐니야만 한다. 처음 성경을 대할 때는 그 보화의 풍부함을 살피기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2)지성에서 마음으로
이기는 자에게 필요한 진리는, 냉랭한 추상적 개념으로 지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즉시 삶에 적용된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13절)라고 계속 말씀한 이유이다. 진리는 우리의 지성만을 사로잡아서는 안 되고 우리의 삶을 사로잡는 데로 나아가야만 한다. 버가모와 같은 어려운 곳이든 또는 이에 상응하는 현대의 어려운 곳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3)충성된 증인
충성된 증인은 전하는 일을 성실히 한다. 예수님은 ’너희 성에서 죽임을 당했던‘(13절 NIV) 안디바의 날에도 일어났다고 말씀한다. 버가모에서 사는 충성된 자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14절)자들도 있었다. 여기에서 타협에 대한 고전적인 상황이 나타난다. 발람의 교활한 계획은 이방 음식과 이방 여인으로써 온 이스라엘의 온 정신을 침식시키는 것이었다(민 31:16). 발락에게 발람이 있었던 것처럼 버가모 사람들을 꾀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또 한 행음하게 하여 범죄케 한‘(14절) 거짓 교사들이 있었다. 니골라당의 교훈이 사실상 그와 같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15절)
대부분이 가장 무서운 이교 철학에 반대하여 굳게 서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도덕적 표준을 낮게 잡는 것을 관용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그들 가운데서 발전하도록 방치하여 두었다. 한편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 세상의 표준을 용인하는 것은 타협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그것을 마주 대하고 때때로 타협의 원리는 논쟁점만 바꾸고 있다.
믿는 자들은 악이 너무 많아서 ‘사단의 위가 있는’곳으로 묘사될 수 있는 여러 도시에 살고 있다. 그래서 적당히 이해하고 눈 감고 살려는 방법을 택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버가모 교인들은 그들의 환경을 받아들이기는 하되 동시에 그들은 예수를 ‘굳게 잡아야’만 하는 것이다(13절). 우리는 부패된 사회의 소금으로,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불리는 자들이다.

3.타협하는 현대

우리가 삶에서 이중적 표준을 허용하면 타협으로 빠지고 만다. 우리가 하나님 과 안식일과 이웃에 관한 표준을 쉽게 타협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만약 우리가 도적질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지출 액수를 속인다거나 늦게 출근한다거나 점심 시간을 길게 갖는다면 고용주에게 훔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어떤 것을 도적질한다것-누군가 다른이에게 가야 할 시간, 소유권, 사랑, 또는 칭찬-은 미끄러운 타협의 비탈길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율법의 문자뿐만 아니라 율법의 정신에 복종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발람 당이나 니골라 당보나 나을 것이 없다. 이런 차원에서 도움을 줄 실질적인 일차 단계는 각자가 오늘 순종해야 할 바로 느끼는 점을 적어 둘 노트를 가지고서 십계명(출 20:1-17)을 공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화) 1952년 7월 3일 한국에 출전한 미국의 공군대령 데오도어 헤리스는 비 29
기가 추락하여 벼밭으로 낙하했습니다. 벼밭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는 곧 중공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중공군은 의약품의 투여도 없이 땅굴 속에 그를 가두어 두었습니다. 영하의 강추위를 막아주는 것이라곤 소량의 붕대밖에 없었습니다. 14개월동안 중공군은 무자비하게 그를 고문했습니다. 그가 강요받은 것은 미국이 한국전역에 세균을 퍼뜨렸다는 서류에 서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문은 1953년 9월, 포로교환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해리스 대령이 굳게 믿었던 것은 사실은 사실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핍박을 겪었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 처럼 우리의 신앙의 절개를 지켜 하나님의 일을 빛나게하는 사람이 되자.

4.검으로 심판함

’내 입의 검‘이라는 묘사로 인해 우리는 다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신 예수에게로 초점을 돌리게 된다. 그런데 검은 이제 의례상의 용도로서가 아니라 심판하는 데 휘둘러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요한을 통하여 이런 주제를 말씀하신 바 있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만일 교회가 말씀하신 바를 주의하지 않는다면, 일찍이 오래전 타협자 발람이 그러했듯이 심판의 검에 의해 죽임당할 것이다.

▣맺는말

1.많은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

현대 세계는 버가모의 상황과 아주 비슷하다.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용이한 곳이 없다. 주님은 현대의 교회들이 비록 사단의 힘이 있는 곳에 자리잡게 될 수도 있으나, 신앙의 표준을 지켜나가는 충성된 증인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신앙과 행동 모든 면에서 견해를 분명히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버가모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 치켜 들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을 하는 방법으로서 세상이 우리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고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한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임을 죄인이 알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메시아의 삶을 닮아가는 생을 살므로써 죄인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에 유해한 불의에 관하여서는자기가 지지하거나 거절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라.

예화) 어느날 어린 소년이 아버지가 지붕을 고치기 위해서 집 꼭대기에 계신 것
을 보았습니다. 소년은 자기도 지붕에 올려 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습니다. 좋아, 그럼 사다리를 타고 올라 오너라. 나만 똑바로 쳐다보면서 올라와야 된다. 그러면 잘 될거다라고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어린 소년은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반쯤 올라 왔을 때 얼마큼이나 올라왔나 보려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소년은 무서워서 그만 울음 을 터뜨렸습니다. 애야, 아래를 내려다 보아선 안돼, 그냥 위만 쳐다보고 올라와야지! 아버지가 이렇게 소리치자 소년은 아버지의 얼굴만 똑바로 쳐다보며 기어 올랐습니다. 마침내 소년은 무사히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우리는 마치 이 어린 아이와 같지 않습니까 어려움들이 우리를 휩쌀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난만을 내려다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는 우리의 모든 고난보다도 훨씬 크십니다. 그러므로 위만 쳐다보고 올라 가십시요. 그러면 여러분과 예수님은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2.교회에게 주시는 말씀

‘그러므로 회개하라!’(16절) 온 교회는 이 힘찬 명령의 말씀을 진해 듣는다. 그들이 기꺼이 거짓 교사를 관대하게 묵인한 사실에 대해 그들 모두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경계심 이상의 어던 것이 필요하였다. 즉 오직 회개해야 했다. 그들은 진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낮은 표준들을 받아들였던 점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교회는 즉각 이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하지 아니하면‘예수께서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절)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다 결국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민 22:31)’ 까닭에 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던 발람의 경우보다 한층 더한 말씀이다. 한편, 문제의 결과이었을 회개가 있었으면 하였는데 발람은 경고를 받고도 그만두지 않았으므로 그의 비극적 종말은 이렇게 전해진다.‘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민 31:8)’

3.이기는 자에게 주는 약속

예수께서는 신속히 그의 말씀을 모든 사람이 유의해야 한다고 경고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17절)’ 그리고 그는 이 편지를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들로써 결론 짓는다. 승리자들은 만족게 될 것이다. 17절에서 우리는 백성을 배교의 길로 인도하려 했던 발람의 시도와 연관시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이스라엘 광야 여행의 시기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시기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만나를 예비하신 데 있다.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를 언약궤 속에 둠으로써(출 16:33;히 9:4)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사막에서라도 그들을 만족게 하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을 것이다. 이기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약속은, 만약 그들이 스스로 우상에게 바쳤었던 달콤한 것들을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다면 그가 숨겨 두신 만나로써 그들을 만족게 하실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다윗이 ‘하늘 양식’또는 ‘천사의 떡’(한글 개역 성경은 ‘권세 있는 자의 떡’; 시 7:24-25)이라고 칭한 것을 먹게 되었다. 분명히 그들은 참 만나이신 예수님 그분으로써 만족하게 되었다(참 요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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