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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아디라 교회 (계 0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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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두아디라 지역
1)보잘것없는 지역
저명한 저술가도 없고 어떤 분야에서도 두아디라를 자기 출생지라고 밝힌 유명인사는 없었다. 어떤 도시도 하나의 요새로서 위풍이나 그 견고함에 있어서 자연적으로 두아디라보다 못한 곳은 없었다. 두아디라는 앞이 훤히 트인 골짜기에 위치하며, 완만히 경사진 언덕과 접해 있었다. 그러나 그 골짜기를 그늘지게 하고도 남았다.‘그런 상황잉 주는 전체적 인상은 연약하고 종속적이며 의존적이다.’

2)수비대 주둔지역
두아디라가 존재하는 이유는 버가모에 이르는 카이쿠스 강 유역 입구를 방어하는 제일차방어선이라는 수비대 역할에 두고 있다. 그 도시에서 사용한 동전들은 군인처럼 무장한 여인이 새겨 있다.

3)자주 장사
두아디라산 자주 옷감과 의복을 파는 산업이 융성했다.
자주색 상품과 의복이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염료는 페니키아와 스파르타 해안 근해에서 잡히는 무렉스(Murex)라는 조개의 주둥이에서 취한 것이었고, 그 다음은 두아디라에서 나는 염료가 종종 ‘터기 레드(Turkey red)의 뿌리에서 채취되었는데, 그것은 담쟁이처럼 기어오르는 초록색 식물로서 두아디라 성 근처 여러 계곡에 무성히 자라는 식물이었다. 그리고 工業人組合이 있어서 활발한 연합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서로 상당한 영향을 주는 단체로서 종교에서 깊숙히 관여하였다.

Ⅱ.두아디라 교회의 모습

1.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1)사업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가 해야할 사업들 즉, 구제와 보사와 선교 등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길가에 누워있는 세 사람의 게으름뱅이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이 세 사람 중에서 가장 게으른 자에게 15센트짜리 동전을 주겠노라고 제안했습니다. 첫번째 게으름뱅이가 펄쩍 일어나더니 자기가 다른 두 사람보다도 더 게으른 자라고 하면서 동전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게으름뱅이는 끝내 동전을 얻지 못했습니다. 두번째 게으름뱅이는 누워있는 채--
로 몸을 돌리더니 자기가 제일 게으른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상을 달라고 했습니다. 두번째 게으름뱅이에게도 그 동전은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세번째 게으름쟁이는 그대로 움직이지도 않은채 그 동전을 내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가장 게으른 자였습니다.
여러분, 사업이나 스포츠나 어떤 회합이라면 그토록 부지런한 신자가 주님의 일이라면 솔직히 말씀드려 게으른 사람이 우리 교회 안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사교 장소가 아니었고, 서로 칭찬만 해대는 사람들의 모임도 아니고 병약한 종교인만 수용하는 병원도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는 능동적으로 일하는데 힘이 넘치는 교인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2)사랑과 믿음과 인내의 순서
“사랑”이 첫 머리에 놓은 것을 보면, 이 교회는 사랑에 부요한듯하다. 그러나 여기 나온 語順으로 보아 사랑 다음에 “믿음”이 놓였으니, 이 교회의 경건이 순리대로는 자라지 못했다는 의미가 포함된 듯하다(살전 1:3,3:6,5:8 참조) 사랑은 , 마땅히 믿음을 근본으로 하고 나와야 하나님 중심이다. 먼저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거기서 나타나는 결실로서 사랑이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소위 “사랑”을 앞 세우다가 “믿음”(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는 믿음)을 둘째로 여긴 듯하다. 따라서 그 교회는 진리를 기본으로 지키지 않고, 포옹주의 사랑만 위주하다가 비진리 곧, 이세벨 이단같은 것을 포용하게 된 듯하다. 그것은 우선순위를 바로 정립하지 못한 잘 못으로 생긴 결과이다.

3)일의 발전을 칭찬 받는 교회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훨씬 휼륭한 교회로 칭찬받았다. 쓸모있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을 넓어가고 깊어가는 교회였다. 교인 한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처음 구원을 얻었을 때 보다 더욱 신앙의 발전이 있는 교인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2.두아디라 교회의 문제이세벨 여인을 용납하는 잘못

①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행위가 알려진 작은 무리(19,26)
②자칭 선지라는 하는 이세벨에 의해 좌우되는 자들(20)
1)구약의이세벨과 두아디라교회의 이세벨의 관계성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우상숭배로 바꾸려고 끊임없이 시도한 여인이었다. 구약성경의 이세벨은 시돈 왕 옛바알의 딸이었고 바알의 철저한 추종자였다.(왕상16:31). 그냐는 바알의 여대제사장이었고 종교적 음행과 술수를 이스라엘에 들여오는 것을 책임졌던 인물이다. 결혼에 의해 성립된 시돈과의 거래로 이스라엘은 갑작스럽게 번영과 큰 富를 안게 되었다. 아합 왕과 그 백성이 이세벨에 의해 매료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강한 충동을 느끼게 하여 그들을 바알 우상 앞에 무릎을 끓게 하였다.
두아디라의 이세벨 또한 특권을 가진 위치에 있었다.아합 왕후는 이스라엘의 모든 일에 관계하였고, 새 이세벨은 두아디라 교회에 관계하였다. 우리는 이세벨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단한 매력과 정열을 가지고 교회를 배교의 길로 이끌었음을 알게 된다. 그 교회는 거룩성에 대한 감각을 잃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의 중심에서 떠나가셨고 영적생활의 붕괴가 일어났다.

엘리야가 이여자를 두고 예언하기를,
(1)개가 그 죽은 시체를 핥으리라고 하였는데(왕상 21:23), 과연 그대로 성취
되어 예후로 말미암아 창문에서 내려 던지움이 되어 떨어져 죽었고(왕하 9:33),
(2)그 자녀들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멸망시키리라고 하였
는데(왕상21:21), 과연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9:6-37).
(3)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 선지 450인을 죽였다(왕상 19:40)위의 세 큰 사건은
계 2:22,23의 세 큰 위협과 부합한다.

계시록에 이세벨에게 대하여 보이신 세 큰 위협은
①그 여자 자신을 병상에 던져 죽일 것(22절),
②그와 음행하는 자, 그의 교훈과 타협하면서 교역하는 자들을 환난 중에 던점,
③그의 자년 곧, 완전히 그에게로 귀속한 자들을 죽임이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은 외래의 이교 인물로서 자기의 사상을 가지고 복음을 변경시킨 자이다.

2)교회에성의 여성의 위치
이세벨이 여인이기 때문에 정죄받는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배교의 길로 이끌었던 그 사역의 마귀적 성질에 있다.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에 관해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여성에 대한 태도에서 혁명적이었다. 예수께서는 유대 랍비적 전통에 따라 여성에게 부가된 제한성을 인정하셨지만 여성의 신분에 어던 훼손이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시고, 그를 따르는 제자가 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초대 교회는 여인들의 사역을 통해서(롬 16:13-5,6,12,15) 대단한 유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행 16:13;고전 11:13)와 손 접대 및 교회의 모임 장소와 가르침을 위해 그들의 집을 내어 준 사실을 통해서(행 16:15, 40;18:1-3, 24-26; 롬16:3-5; 고전16:19) 적지않은 유익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영적은사가 인정받게 되었고(행 21:9) 심지어 공적 예배에서 까지 발휘되였다.(고전11:5) 우리는 적어도 뵈뵈가 집사라는 공적 칭호를 받은 것으로 안다 (롬 16:1). 우리 임의대로 그들이 활약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신약성경에서 방치할 수 없는 것은, 두 구절(고전 14:34, 딤전 2:12)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3)교우들의 자기 진단
초기 주석가들 중에서 되풀이된 한 주제는 이세벨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루디아(행16:14)와 일치하는 여인이라고 한 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어떤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 한다면, 그것은 초기의 영적 생활에 아주 큰 위험을 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리고는 성경적 진리로부터 떠내려 간 것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족히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의 주요한 요점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다.

Ⅲ.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1.주님은 그 마음을 보신다

’마음을 아는 자‘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사용된 칭호이다(행1:24;15:8).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이다‘(23절)라고 하기 때문에 족히 예수를 가리킬 수 없는 칭호이다. 사람은 외모에 너무나 쉽게 속을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예수는 마음을 아는 분이시다. 그는 항상 사물의 단순한 외모보다는 더 깊은 데를 들여다 보신다.
(예화) 한 사진작가 아름답고 젊은 여성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녀의 얼굴빛은 분명한 것처럼 보였지만 필름을 현상해 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 선명하면서도 이상한 반점이 나타나 보였습니다. 이 사진작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행여 카메라에 무슨 이상이 없는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여성의 어머니를 만났는데 딸이 어렸을 때 홍역을 앓았다고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을 카메라의 면밀한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 보실때, 누구도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들을 망치게 하는 것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2.내가 너희 각 사람에게 갚아 주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23절)는 말씀은 이세벨을 따른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최종적인 말씀이다. 결국 그들에게 갑자기 임한 형벌은 그들의 죄와 그 추문만큼이나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교회‘(23절)가 드디어, 예수의 감찰하시는 눈은 마음을 속속들이 들어다볼 수 있는 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짧은 구절은 심판이 개개인에게 내려질 것이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두아디라에 일어났던 사건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것은 대단히 관심을 끌 만한 것이지만, 성경이나 역사 모두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에게 갑자기 내린 형벌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타협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예화)
어떤 아프리카 선교사가 원주민들에게 주께서는 빛 가운데서나 어두움 가운데서나 우리를 보시는 도다라는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를 보실 수 있다고 그들에게 설명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웃으면서 웃기지 마시요, 우리가 밤에 방안에 있으면 얼마나 컴컴한테 누가 들여다 볼 수 있단 말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불쌍한 아프리카 토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우리처럼 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두아디라교회의 죄인을 보셨듯이 오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3.현재의 심판과 장차 임할 심판

예수께서는 그의 교회를 감독하시기도 하고 심판도 게을리하지 않으신다. 성경이 말하는 심판이란 계속되는 과정으로서의 심판과 최종적 사건으로서의 심판 양자를 말한다. 우리가 이미 에베소 교회에 대한 보고에서 살펴본 대로 ‘촛대’는 회중에게서 다른데로 옮겨질 수도 있다(계2:5). 촛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에 대해 완고하게 불순종하면 옮겨지고 만다. 만일 우리가 습관적으로 불순종하지만 않는다면 전혀 두려울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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