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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베소 교회의 책망 (계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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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말씀을 읽고 먼저 깊이 생각해 볼 것은 이 땅위에 있는 교회 나 교역자나 신자는 하나님같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일면 칭찬받 을 만한 조건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면으로 책망받을 것이 있는 것이 지상의 교회요 교역자요 신자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같 은 신앙위인들도 그렇습니다. 흠모할 만한 부러운 면이 있는가 하면 우리에 게 경종을 주는 잘못된 면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넘어지고 일어서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하는 반복을 통해서 성숙해 나가는 것입니다. 잘못했다는 것, 물론 좋은 것은 아닙니다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 다. 잘못했기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 는데도 거절하면 죽게 됩니다. 어느 사람이 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의사가 약을 처방해 주었는데도 약을 먹지 않고 죽었다면 그 사람은 병때문 에 죽은 것이 아니라 약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 죽은 겁니다. 회개하지 않 는 자가 바로 이러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잘못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 나님이 주시는 회개의 기회를 잘 받아들이면 살 수 있습니다. 에배소 교회 는 몇가지 칭찬을 받았는가 하면 또한 책망도 받았습니다. 오늘은 책망에 대해서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먼저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내가 안다."고 여러번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돌부처가 아닙니다. 보는 눈이 있고,듣는 귀가 있어 우리 한가운데 서 계셔서 우리의 범사를 다 아시고 보시고 듣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두가지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행동이 절제가 됩니다. 주님이 보고 듣고 알고 계신데 어떻게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보고 듣고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 여전히 떳떳하게()죄를 범합니다. 둘째로 나를 알아주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사니 행복하고 기쁩니다. 어려운일을 당했을 때도 주님 내 형편 아시니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애매한 누명을 써도 주님 아시니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만나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이 알아주시니 기쁘고 즐겁습니다. 성도 여러분, 에배 소 교회에게 안다고 말씀하신 주님을 모시고 살기 바랍니다. 칭찬할 것도 아시고 책망할 것도 아시고 누가 잘한 것도 아시고 누가 잘못한 것도 아십 니다. 에배소 교회의 행위(수고, 인내, 악을 용납지 아니함)를 아신 주님이 바로 이 가운데 서 계십니다.

 2. 또한 예수님은 책망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성경의 신앙위인들을 보면 비록 잘못했더라도 책망받았을 때 주저하지 아니 하고 회개함으로 버림받지 아니하고 계속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 리를 칭찬하시지만 때로는 책망도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책망의 이유가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데 있지 않고 흥하게 하려는데 있다는 점입니 다.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칭찬하는 말씀도 들으려니와 책망의 말씀도 들 어야 합니다.

 3. 그러면 책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와 용서는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중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도 죄를 반복해서 지으니까 "벼룩도 낮짝이 있지 더 이상은 회개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핏 보아서 꽤 양심있는 사 람같습니다만 실은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과연 하나님께 용서의 한 계가 있겠습니까 일흔번을 일곱번까지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이는 490번만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무제한적인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천만번 죄를 지어도 주님앞에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무제한의 용서 를 가지고 계신 주님께 용서 못받을 죄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할것 없 는 천사보다 회개할 것 있는 우리를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회 개하는 영혼을 가장 긍휼하신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럼 용서하시되 어디 까지 용서하십니까 1/100, 1/10, 아니면 1/2인가요 하나님의 용서는 100% 전부입니다. 뿐만아니라 사1:18 말씀을 보니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을 지라 도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일순간의 용서가 아니요 근본적인 용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속 성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회개합니가 5절에 보니 어디서 떨어졌나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회개는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생각하고 현재 를 생각하고 그래서 비교하여 반성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 는데 내가 왜 이모양이 되었나!" "전에는 감격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감격 이 사라졌나!" "전에는 경건의 모양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없나!" 하고 생 각하는 것이 회개의 출발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원인이 발견되어집니다.

"아하. 내가 돈을 사랑하다가 이렇게 되었구나. 세상을 사랑하다가, 자식을 사랑하다가, 남편을 사랑하다가 이렇게 되었구나,"발견하게 됩니다. 발견하 면 이제 전처럼 바꾸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탕자가 돼지 우리안에서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이라는 원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가니 전처럼 다시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4. 그러면 무엇을 회개하라고 하셨습니까 우리야 회개할 것 많이 있지만 에배소 교회는 처음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회 개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치명적 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모든 계명중에 첫째되는 것이라 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모든 신앙 생활의 동기가 되는 것이요 사랑은 모든 신앙 생활의 완성이 된다는 말입니 다. 고전 13장의 말씀을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사랑의 중요성을 잘 아실 것 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랑에서부터 출발되어지지 아니하면 그 어떤 신앙생활도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사랑은 주님을 사랑 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그 어떤 신앙생활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사실 에배소 교회가 칭찬받았던 앞의 몇가지 일은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랑이 없이 도 얼마든지 습관적으로 의무감으로 책임감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러한 신앙생활은 인정받는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동기에서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 자기 만족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견뎌 합니다. 그래서 주일을 고박꼬박 지킵니다. 십일조를 안 하면 꼭 무슨일이 터질것만 같습니다. 얼마나 귀한 신앙입니까 주일에 빠 지지 않고 십일조하는 신앙, 그러나 사랑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인정받 지 못하는 신앙일 뿐입니다. 둘째,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 습니다. 신앙생활하는 것이 요즘의 시간예약이 되는 가전제품처럼 자동입 니다. 교회가는 날,교회가는 시간, 주보 순서를 자동적으로 따라합니다. 과 연 이런 사람의 예배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드리는 예배가 되겠습니 까 셋째, 그런가 하면 책임감때문에 신앙생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직, 교사,성가대,각부임원들...책임때문에 열심히 봉사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세상 직장에서는 좋겠지만 주님은 한가지를 더 물어보십니다. "그래 너의 충성안에 사랑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사랑없 는 행위는 형식과 의식이라는 껍데기만 남깁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가 있을 리 없고 힘써 신앙생활을 하지만 우리에게 남 는 것은 피곤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인내는 짜증만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 런 인내는 화목하게 하는 힘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예배, 지루 할 뿐입니다. 설교도 찬송도 길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 지 겨울 뿐입니다. 예배니 인내니 봉사니 충성이니..얼마나 중요한 신앙행위들 입니까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신앙행위가 될 뿐입니 다. 사랑이 없으면 겉보기에는 그럴듯 해도 그 안에 들어가 보면 형식과 원망과 피곤과 짜증과 불평뿐이요 피차의 저주와 정죄와 아집과 교만만 남 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사랑이 있는가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큰 에배소 교회가 어떻게 하다가 그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까 바울이 목회했었고 디모데, 아볼로, 사도요한을 목회자로 두었었기에 가장 복음적인 교육을 받으며 훈련된 이 교회가 왜 이렇게 가장 소중한 사랑을 상실했을까요 에배소 교회는 창립한지 40년이 지난 교회입니다. 이 40년이 라는 세월이 에배소 교회에 사랑을 빼앗아 버리고 타성만 남게 했던 것입 니다. 이 자랑스러운 전통때문에 처음 사랑은 상실한 채 습관과 형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40년만 되면 다 이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역사와 전통을 주님 사랑하는 일보다 우선할 때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말 입니다. 또한 에배소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의 많은 교회가 여기에서 개척 하여 나갔기에 소아시아의 모체와도 같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명성이 자자 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 명성만을 유자하다보니 주님게 대한 감사와 감격과 사랑은 사라진 채 무거운 책임감만 남게 된것입니다. 이것이 에배 소 교회에 사랑을 잃게한 이유들이요 형식과 껍데기만 남게 한 이유들입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에배소 교회에게 지적하신 이 모습들이 나와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닌지 살펴봅시다. 이 가운데는 신앙생활 시작한지 얼 마 안된 분도 있을 것이고 수십년 된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된 신앙 연륜이 여러분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굳건 한 신앙 골격 위에 세워놓았습니까, 아니면 사랑은 빠져 버린채 형식과 습 관만 남게 했습니까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신앙이 아니라 완전히 자동계약 된 기계처럼 습관적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신앙이 아닙니까 여 러분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구원에 대한 감사 감격을 이기지 못해 주 님의 교회를 내몸처럼 사랑하는 충성을 보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책임감과 의무감과 싫은 소리 듣기 싫어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충성하고 있습 니까

우리 교회는 이제 만2년이 되었습니다. 물론 2년이란 세월은 대단히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을 형식적으로 만드는데는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우리안에 사랑을 뽑아내는데 충분한 기간입니다. 과연 우리교회가 에배소 교회와 같이 책망들을 교회는 아닌가 생각해 봅시다. 신앙 연륜이 오래지 않아도 그 속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예수 믿은지 1년도 안된 사람이 열심히 충 성합니다. 어떻게 신앙의 연수도 짧은 사람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성경의 순서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단지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 과 내가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창립 2주년을 맞은 우리 그물교회 가 에배소 교회가 칭찬받은 것처럼 우리교회도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 라며 한걸음 더 나가 에배소 교회에는 없었던 사랑의 칭찬이 여러분과 우리 교회에 더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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