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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성을 유지하는 방법 (마 18: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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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가다가 성도들이 한 성도를 주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해서 아주 열심을 내는 모습을 바라볼 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거꾸로 되는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본문 14절에 보면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 말을 정말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형제들이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자매들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우리들의 마음이 벅차 오르게 됩니다. 이 본문에서는 이 형제들과 이 작은 자중의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이것을 적극적으로 실현한다고 하면 잃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사람들을 세워 놓기 위해서 아주 열심을 내는 것이겠죠. 사실상 교회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은 아주 독특한 공동체를 하나 세우셨습니다. 이 세상에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공동체를 세우셨는데 그 공동체는 사람들이 혼자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같이 더불어 있기를 원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세워 주는데 신경을 아주 많이 쓰는 공동체이다 라고 하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러낸 성격, 즉 하나님 앞에 뚜렷하게 다른 것과 구별되어서 하나님께 드려진 성격, 그것을 거룩하다라고 지난주에 우리가 이야기했는데 그 성격을 실현하는 방법이 바로 그와 같이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성을 드러낸다고 하는 것을 이 세상의 어떤 다른 특징들을 교회에 갖다 붙임으로써 되어지는 데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흔히 우리가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특성들을 드러낸다고 해서 어떤 외적인 것을 갖다 붙인다고 해서 거기에 교회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다운 어떤 특성들을 드러낸다고 해서 어떤 외적인 것을 갖다 붙인다고 해서 거기에 교회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두다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든지 십자가 뱄지를 하고 다닌다든지 해서 교회의
독특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상스런 말, 이 세상 사람들과는 좀 다른 말을 쓰는데서 교회의 독특성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똑같은 상황 가운데서 똑같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독특성을 어디서 드러나는가 하면 이렇게 주께서 이 공동체를 세우신 특성이 이 공동체 안에서 잘 드러날 때라야 비로소 우리가 거룩한 교회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좀 더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좀 쉬운 방식으로 우리의 독특성을 드러내기로 했더라면, 예를 들어서 어떠한 독특한 의복을 입는다든지 독특한 어떤 뱄지를 달고 다닌다든지 그럼으로써 우리의 독특성을 드러내기로 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깊이 있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쉬운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날이 되면 성경책을 들고 교회당으로 오는 사람들은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하는 것이 하나의 뱄지 수도 있겠죠. 그러나 거기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독특성, 그 거룩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교회의 거룩성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이 공동체가 같이 서 있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이 인간들과 관련하였을 때 어떤 한 사람들과만 어떤 특별한 관계를 가지신 적이 없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한 사람을 불러내셨을 때라도 예를 들어서 아브람을 불러내셨을 때라도 그 이유가 뭐냐면 그를 통하여서 결국은 온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관련하기 위해서 그 한사람을 불러내신 거란 말이죠. 따라서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 전체와 관련하여 서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이 공동체가 주님 앞에서 뚜렷하게 구별된 성격을 잘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것에 신경을 쓰시고 그것을 우리 가운데 있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 제대로 잘 주님의 백성 다운 노릇을 해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서로 마음을 써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마음쓰는 것이 어디까지 펼쳐 나가는가 하면 누군가가 우리 가운데서 같이 주 앞에 생활해 나간단 말이 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생활을 못해 나가요. 하나님 앞에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을 지니지 못해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대개 어떻게 하냐면 남의 일인데 내가 왜 간섭해 그냥 가만히 있지. 왜냐하면 간섭하면 문제만 생기잖아요.그러나 이 교회의 공동체라고 하는 것.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다고 하셨을 때 그 거룩성은 어디서 드러나는가 하면 그게 남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그게 신경이 쓰여지는 거예요. 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아가는가, 안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신경 쓰여지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안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는 교회로 세우신 그 모습 속에 아직 부합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나만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이 제일 좋으면 되지 그 정도로 하나님께서 생각하게 되어 있지 않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그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라 신앙이 나쁜거라는 말이 예요.신앙이 진짜 좋으면 어떻게 하게끔 되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나가는 모습도 신경이 되게끔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게 이 일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대개는 교회에서들도 이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그런 설교 많이 듣지요.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일이나 똑똑히 하세요.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왔죠. 그런데 그것은 이게 어려운 일이라서 하는 이야기지 실질적으로는 우리가 그렇게 해 나가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늘 같이 더불어서 하나님 앞에서 같이 있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가 같이 주님 앞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지 어떤 사람 한 사람 옛사람은 주님 앞에서 잘 성장해 나가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뒤에 쳐져 있고 그러면 그 앞에 나가는 사람들만 다 나가는 것이 아니고 전체가 다쳐져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교회는 늘 함께 있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만 엘리트가 되어 가지고 뛰어나게 성장하는법, 그런 법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만 제대로 이런 모습을 가지고 나간 다고 해서 다 되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몇몇 사람이 잘 해 나간다 그것으로 다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교회의 교회된 모습은 우리 모두 공동체가 같이 일을 힘써 나갈 때에야 비로소 되어지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 전체가 그런 방향으로 향해 나가야 되는 것이지 어떤 몇몇 교회는 제대로 해 나가고 나머지 교회는 다 뒤에 쳐져 있고 흔히 생각하는 종교적인 생활만 해 나간다고 해서 교회의 교회 됨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한가지 우리는 우리 혼자서 나가는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정말 마음을 깊이 쓰는 사람들이다, 어느 정도까지 깊이 써야 되는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에까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를 하거든 이것은 그냥 이런 일이 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일이 있다고 생각되거든 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못 살아간다고 생각되거든 혼자 가서, 개인적 먼저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첫번째 단계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으려면 내가 얼마나 심각하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전부 다 포기하고 이야기를 안한다는 것이죠. 뭐 나도 못했는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그리고 안한단 밀이죠. 그러면 교회가 세워질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을 갖는게 중요합니다. 이것은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집사님만 갖는 마음이 아니고 성도가 갖는 마음이에요. “너희 형제 중에 누가 범죄 하거든” 그 이야기 예요. 그러면 그것을 너무 안타깝게 여겨서 주님 앞에 깊이 있게 생각하면서 가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이야기하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하겠지요. 이것을 또 이상하게 생각해 가지고 자기 마음에 안드는것은 무조건 이야기하라는 말이 아니지요. 주님의 뜻을 잘 깨달아서 정말 이것은 주의 성도로써 마땅치 않은 바이다라고 생각하면 가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하라는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현저하게 주의 백성의 못된 모습을 해치는 것인가를 깊이 있게 생각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씀이 어디에까지 가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첫번째 단계는 마음씀이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겠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아보겠다 이런 마음에서 더 나아가서 우리가 같이 형제자매와 같이 함께 바로 서 보겠다 이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각자도 이게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고 이 세상에서 내게 고난이 찾아와도 나는 하나님 말씀만을 믿으면서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아가겠다 그런 마음이 내 속에 있지 아니하면 이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은 먼저 우리 마음 가운데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바로 서 보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 마음이 내 속에 넘쳐 나가지고서 이제 다른 사람한테까지 그것이 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한테까지 가서 혹시 형제가 잘못할 때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첫번째 단계는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런데도 이 사람이 말을 안 듣잖아요. 그러면 아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두세 사람을 가이 데리고 갑니다. 그게 형제들이 하는 방법이에요. 같은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같이 가서 그 말을 같이 권고합니다. 이 사람들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한편에서는 이 두 세 사람이 뭐하냐면 같이 공부하는 거예요.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같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해 나갑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같이 살아 나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더 설득력이 있겠죠. 그런데 이것은 좋은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게 무슨 의미도 있느냐 하면 증인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 두 세 사람을 데리고 나가느냐 성경에서 보면 증인은 언제나 한 사람이 되어지지 않고 두 세 사람이 됩니다. 내가 이 두 세 사람을 데리고 나가느냐 성경에서 보면 증인은 언제나 한 사람이 되어 있지 않고 두 세 증인이 됩니다. 내가 이 두 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이렇게 권고했는데도 이 사람이 듣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증인 역할을 하게끔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게 마련해 주신 것이 어떤 때는 우리를 정죄 하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게 무시무시한 이야기예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기 위해서 복음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든지 그 말씀이 전파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정말 간절하게 전파되는 거예요. 좋은 이야기죠. 누구든지 들어야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요 그 이야기가 우리가 잘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겠다 하나님과 관련되어서 살아야겠다 그러면 우리를 복주는 복된 이야기가 되지만 끝까지 그 이야기를 안 들으면 그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 줄 압니까 그 이야기가 우리를 심판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맨 마지막 우리를 심판하는 날에 우리를 정죄 하는 그 이야기가 됩니다. 왜 너의 친구가 그렇게 애달게도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그대 받아들이지 아니했느냐. 그 책임은 너한테 있다. 그 이야기로 우리를 정죄 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두 세 증인이 가는 길이 한편에서는 그 사람을 같이 설득하기 위해서 가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같은 심정 가운데 가는 일이 예요.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이 사람들이 증인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말로 듣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의 이야기는 사실을 그렇게 이야기하면 다 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정도로 했는데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겠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살아가겠습니다 그랬다 가도 그렇게 와서 이야기하면 더 열심히 살아야 하잖아요. 그렇게 되어야 된단 말이 예요.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도 안하면 어떻게 하느냐 그 다음에는 교회에 이야기하라고 했어요.
교회에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는 우리가 교회에 모일 때 공적으로 이야기해라 그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도 하나는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 교회의 대표자로서 하시는 분들한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분들이 책임을 가지고서 전적으로 이야기해 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죠. 그러니까 목사님, 장로님들이 하시는 일들이, 특별히 장로님들이 하시는 일들이 주의 말씀이 주일마다 선포되어지고 있는데 그 말씀에 다라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역할을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로님들이 하시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 예요. 옛날에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잘 세워져 나가자 종교개혁 시대에 그렇게 해 놓은 다음에 장로님들한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장로님들이 매일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돌아다닙니다. 또는 정탐하러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정말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가, 아닌가를 살펴보는 거예요. 그런데 보면 그렇게 못살아 가잖아요. 그럼 데려다가 당회에서 사람들을 야단을 치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별도 주기도 하고 옛날에는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느 집에 가면 이 집은 매일 부부 싸움만 하고 있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제대로 살아야 되는데 이 사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는 커녕 싸움만 하고 있더라, 그러면 그것을 그냥 넘어가는게 아니 예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교회에 불러다 놓고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예요. 오늘날 그렇게 하면 기분 나빠서 내가 교회에 나갈까 말까 그럴 거예요. 이게 뭔가가 제대로 안되어 나가는 형편들이에요. 교회에 거룩성, 교회의 특성 같은 것이 우리하고는 거리가 먼거에요. 성경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모습이 우리에께서는 실현되기를 기대하기조차 어려운 형편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만 나와 있는게 아니고 종교개혁 시대에 그 교회에만 실현되었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들의 교회 가운데 실현되어져야 할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제 신경을 써야 된다는 말이 예요. 그렇게 했는데도 그 말을 안 듣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을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고난입니까, “교회에서 출교해내다” 그런 이야기에요. 더 이상 교제도 하지 말고 사귀지도 말라는 거예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회 성도들이 이런 일에까지 가기 전에 미리 주님 앞에서 이런 일이 있지 아니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살펴 주고 세워 주는 역할을 해야 돼요. 그래서 이 본문을 읽을 때 아! 이 본문을 보면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성경 가운데 있구나 라고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배후의 의도를 우리가 짐작해 내야 합니다. 왜 그런 것까지 있어져야 하는가, 결국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그 성도가 주 앞에서 제대로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온 신경을 다 쓰라는 이야기지요. 결국에는 왜 바깥으로 내어 쫓느냐 하면 지난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결국은 그 형제가 되돌아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전혀 주님 앞에 제대로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그러한 비상조치를 취해서 까지라도 주님 앞에 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해 먹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 아주 놓은 위치를 가진 사람들, 옛날에 교황이 황제가 말을 안 듣잖아요. 그러면 내가 너를 출교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런 식으로 나갔단 말이 예요. 그렇게 세력을 부리면서 사용하라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당시에는 어수룩해서 그렸는지 1개국의 왕인데도 교황이 너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안 살면 출교 한다고 하면 그게 무서워서 “그럼 어떡할까” 어떤 사람이 출교 한다고 했더니 눈오는데 일국의 황제가 눈위에다 맨발로 와서 3일동안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했어요.왜냐하면 그게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하는 건데 황제가 교황 앞에 와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를 출교해버리면 나는 이 세상에 소망도 없고 죽은 다음에도 소망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결국 자기의 세력을 확대해 버리죠. 그러나 적어도 그런 이야기를 심각하게 생각했다고 하는 옛날의 상황들이 우리로 하여금 이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우리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정말 옆에 있는 성도들을 세우는 일에 까지 우리의 마음이 쓰여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본문 가운데 제일 중요한 구절이 14절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우리 공동체에 같이 나오는 성도들이 있잖아요. 이 성도들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라도 잃어지는 것은 그 잃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저 예배만 참석 안하고 그 정도가 아닙니다. 잃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서 끊어짐을 당하는 것은 주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거죠. 주님의 마음을 알면 우리도 주님의 그 마음을 따라서 옆에 있는 성도들에 대하여 우리 마음을 쓰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가게끔 되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 여러분을 맨 처음 전도해 준 사람들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 사람들이 나한테 귀찮게 찾아와서 예수 믿자고 그랬는가, 그것 이해할 수 없죠. 나 바뿐일 있어서 귀찮은데 왜 나한테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고 살자고 하는가, 그러나 주님의 이 마음을 이해하고 나면 왜 그렇게 했는지가 이해됩니다. 아! 그분이 날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과 같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나를 이렇게 품어다 드려 가면서 그렇게 했는가 그게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죠. 그게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죠. 그게 여러분한테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끝나겠습니까. 아니에요. 그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있어서 우리가 이제 나 한 사람이 뭐가 중요해서 자기 시간을 다 바쳐가면서 자기 제물을 다 드려 가면서 그렇게 했는가 그게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죠. 그게 여러분한테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한테 열심히 신경써 주던 우리 선생님들의 마음들이 이해가 되요. 그러면 아! 이해된다, 감사하다 그러고 끝나겠습니까 아니 예요. 그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있어서 우리가 이제 나 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서는게 아니라 내가 설 뿐더러 내 형제가 내 자매가 주 앞에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그 역할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어떤 다른 사람한테 교회에 오래 나온 사람한테 맡긴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 예요. 주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사용하셔서 우리들을 움직여 나가십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무력적인 힘이 발생하지가 않아요. 뭐 어떤 강력한 힘이 발생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교회는 어떤 힘이 있습니까 힘이 없어요. 이 세상 적인 식으로 따지면 힘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교회는 아주 강력한데 뭐가 강력하나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으므로 해서 강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려면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해서 그 말씀이 강력하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다 무시하고 그냥 주일날 아침에 가면 그런 이야기듣는거야, 그렇게 덮어놓고 살면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지 않아요. 그러면 그 교회는 무력한 거예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무력한 존재로 남아있는거예요. 그게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살아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이 설교 말씀 듣는게 그 설교 말씀이 우리를 강제해 가는게 하나도 없쟎아요. 그게 안되게끔 되어 있어요. 그러나 각자가 그 말씀을 듣고 아! 하나님의 듯이 이것이구나 오늘 우리한테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잖아요.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려지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 내 마음속에 닿아 졌으면 그 다음에는 아! 그런가 하고 엎어놓으면 그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이 나의 손발을 통해서 내 행동을 통해서 내 말을 통해서 나의 표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하면 저 소자가 잊어버려지지 아니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세워질까, 이렇게 되어야 해요. 그게 안되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살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심각하게 이 이야기를 우리한테 한 번 해 주셨어요. 어떤 때는 어떤 식으로 해서 사람들이 너희 가운데서 끊어져 질 수 있는가 그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결정하는 그 일에 혹시 두 세 사람이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럴 때에 내가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는니라, 그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여기서는 핵심적인 문제가 뭐냐 하면 내 마음을 열어서 그렇게 펴 주는 것입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꾸어주는게 문제가 아니 예요. 지금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이야기를 하고 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용서해 줘라, 그래 그러면 좋지 그러면 몇번이나 용서해 줄까요 그런 이야기를 한단 말이 예요. 그런데 그 말 배후에 있는 동기가 더 나쁜 것입니다. 몇번이나 용서해 줄까요 하는 것은 용서하다, 용서하다 안되면 맨 끝에 내가 용서 안해도 되겠죠 그런 것 있죠 벌써 그 말 자체에 그런게 있는거죠.
주님께서는 그 말을 아주 불쾌하게 여기셨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어떤 식으로 대답해 주셨는가 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씩이라도 해라.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이게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7”이라는 숫자를 쓴 것은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그것은 “7”이라고 하는 것은 용서해 주면 완전한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하는 것은 용서의 끝이 없어야 되는 것이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그렇게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우리 공동체를 특징 지우는 한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끊임없이 용서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용서하는 것, 그게 없으면 복잡한 문제 때문에 우리가 뭘 잘못해 나갑니다. 늘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어요. 이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이냐 하면 무조건 용서하는 공동체 예요. 그러나 그 무조건 용서하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우리 가운데서 죄악이 마음대로 저질러져도 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님을 여러분이 더 잘 아시죠. 왜냐하면 이 본문 가운데 누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못 서 나가면 그것에 대해서 우리 개인적으로는 용서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노력들을 계속해 나간다는 거죠. 용서하는 마음 때문에 그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가운데 오늘 아침에 이 공동체의 특징을 드러내는 어떤 모습을 여러분 마음 가운데 세우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서 제대로 된 성도의 모습을 드러낼 뿐더러 다른 성도들을 향하여서 우리의 마음들을 펴서 우리 마음 가운데도 있는 그런 마음이 실현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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