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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거룩성 (고전 0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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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두 가지 면에서 생각했습니다. 그 하나는 교회라는 것은 하나이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했었죠. 또 교회는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교회는 누구나 들어올 수가 있어야 되고, 이 세상의 그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또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갓은 그 교회가 거룩하다는 갓입니다. 교회가 하나일 뿐이고 보편적이고 거룩하다, 이 세가지를 교회가 가지는 성격이라고 하는데 교회가 거룩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 거룩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거룩이라는 말을 듣기만 하면 그것은 우리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하는 성향들이었습니다. 나하고는 거리가 먼 어떤 독특한 몇몇 사람들을 떼어놓기 시작합니다. 자 목사님들은 거룩해 주십시오. 장로님들은 좀 거룩해지십시요 그리고 우리는 좀 안 그래도 되는 것으로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할 때 거룩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지가 아니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거룩 하자고 할 때는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가 거룩하다는 밀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기본적으로는 어디서부터 이 이야기가 출발되어야 하는가 하면 우리가 특별히 하나님 앞에 구별되었다는 것에서 이야기가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다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지 아니하고 워낙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 창조하셨지 않았습니까, 워낙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그 누구라도 관련 없는 사람이 없어야지요. 그런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그래도 불구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여러분들처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뽑아 내셨습니다. 구별해 내셨습니다. 그 구별해 낸 것이 거룩하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하게 구별해 내셨다, 그러니까 거룩하다는 말은 거기에 어떤 다른 생각을 넣지 마시고 그냥 하나님이 나를 특별하게 하나님과 관련된 자로 구별해 내셨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르쳐서 거룩한 무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다 그런 이야기를 하죠.
“주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된 백성들에게 내가 편지하노니” 바울이 그렇게 썼을 때 그 성도하고 하는 것은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거기엔 우리가 포함되어집니다. “나는 별로 거룩하지 않은데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으로 보신다는 말입니다. 나는 별로 거룩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구별되어진 존재로 본다는 것이 오늘 이야기의 출발점입니다. 주님이 나를 그렇게 구별된 존재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별해 놓으셨을 때 이제 그것은 나로 하여금 어떻게 하게끔 하는 것일까요주님께서 나를 구별해 놓으셨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종의 책임감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 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음행 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이렇게 사귀는 사람이 있고 사귀지 말아야 될 사람이 이렇게 구별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일종의 구별이라는 말이죠. 그럼 이 세상에서 사귀어야 될 사람이 있고 사귀지 말아야 될 사람이 있는가, 그게 일종의 책임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말을 오해할까 봐 바울이 분명히 말해주는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음행 하는 사람이나 토색하는 사람이나 나쁜 짓 하는 사람이나 불교를 믿는 사람들과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구별되었다는 것은 우리끼리만 사귀어 나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같이 사귀어 나가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1차적으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같이 사귀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약에 바울이 말하는 바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같이 사귀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 밖에 나가서 살아야지요. 거룩성이라고 하는 것을 옛날에 이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자, 거룩해지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될까, 이 세상에 있으면 내가 거룩해 지기가 어려우니까 이 세상 밖에 나가야지요. 그러니까 사람들과 접촉하기 어려운 곳으로, 없는 곳으로 자꾸 나갑니다. 그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 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없는데로 갑니다. 저 산중으로 간다든지 아니면 사람들이 없는 저 산골짜기로 간다든지 그래가지고는 자기들만 있으면 거룩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해서 거룩성이 유지되는게 아닙니다. 거룩성은 어디서 나타나는 것인가 하면 이 세상 안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모든 종류의 사람하고 사귀어 사는 데에서 우리의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한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내셔가지고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만 사귀도록 하신 것만 아니라 예수님과 사귀면서 또한 이 세상 가운데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서 먼 산중으로 갈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마음속 한 구석에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에 있는 한가지 구별된 것이 있다. 그 의식은 내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적어도 나는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의식을 내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성입니다. 다른 이상한데서 거룩성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이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평생 가야 나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거룩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똑같이 생활해 나가는데 마음 가운데 적어도 나는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이다 라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갓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으로써 마음속 깊은 곳에 의식이 있는가, 그것이 언제 드러나는가 하면 인생의 아주 어려운 문제를 결정할 때 그것이 드러납니다. 내가 무슨 문제를 결정하려고 할 때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데 그 때에도 똑같은 기준을 가지고 선택을 하고 판단해 나가느냐 아니면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으로서의 어떤 판단 기준이 나한테 작용해서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답게 일을 해 나가는가. 거기에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백성인가, 즉 거룩한 사람들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조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하고 같이 사귀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데서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특성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야 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그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빨리 그것이 찾아지길 바라다가는 우리가 지레짐작 미리 지쳐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그 구별된 의식이 내가 나의 친구들하고 뭔가 다르다는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이라고 하는 그 의식이 나의 삶을 좌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나의 생각하는 면에 영향을 미쳐서 생각을 고쳐 주고 나의 사는 구체적인 모습 속에 영향을 미쳐 주고 그것을 바꿔주고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에 영향을 미쳐 주고 그것을 바꿔주고 하는 것들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 이야기를 너무 천천히 하다 보면 그게 사람들로 하여금 타락하게 되는 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저도 가끔가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또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도 그런 두려움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생각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람들한테 너무 여유를 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 믿은지 한 5년쯤 되는 사람들한테는 그냥 이 세상에서 조금씩만 변화하는게 있으면 되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한 10년쯤 지났는데도 별로 의식이 없이 조금씩 조금씩 하면 정말 그러다가 10년, 20년, 다가고 우리 평생다 갈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아주 답답해서 우리가 이러한 방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자,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게 뭐가 있습니까,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뽑을 수 있습니다. 쉬운 예로, 그러면 우리를 쉽게 만들어 줍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른게 뭡니까 뭐 이런 식으로, 지금 이 이야기는 제가 좀 빈정거리는 투로 이야기합니다. 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서는 안되는 지를 여러분이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 시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게 쉽긴 쉽습니다. 첫번째 예수 믿는 사람들의 독특성은 뭡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주일날 나와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구별되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일날 빠지지 말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대개 교회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죠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독특성이 뭡니까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데 우리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힘써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독특성이 뭡니까 다른 사람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련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련되게끔 하기 위해서 힘쓰는 사람들여야 합니다. 즉 전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징이 뭡니까 다른 사람들하고 서로 사귀어 나가는데 있습니다. 또 한가지 덧붙인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징이 뭡니까 다른 사람들 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다운 영향력을 나타내 보여서 이 사회 속에 기도교적인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짚어 놓으면 이것은 쉽습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구별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이죠. 오히려 이게 다 쉬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 놓으면 어떤 일이 발생되기 쉬운가 하면 이것이 외적으로 우리 생각을 좌우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별 의식이 없이 주일날 예배 참석하고 성경 좀 읽고 기도하고 그리고 전도좀 하고 그러면 아! 나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써 구별된 생활을 다 했겠거니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그러나 이런 것 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죠.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그 핵심을 여러분이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안 들어도 여러분 마음 가운데 내가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이다 라고 하는 그 뚜렷한 의식 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 여러분 삶 가운데서의 모든 것, 그게 이 이야기 하나도 안해도 나타나게 될 순 없는가 봐요. 그게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교회의 거룩성이 있습니다. 교회가 거룩하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으로서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모두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그 특성이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 그런데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들어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어떤 성향이 있는가 하면 다른 건 좀 하는 것 같은데 여기에서 되어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듯한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단 말이죠. 그걸 어떻게 메꿀 수 있을는지 나는 아직 숙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는지를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 두 가지를 잘 종합해서 그런 이야기가 있든지 없든 지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런 특징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내가 구별된 사람이다 라고 하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내가 구별된 사람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너희가 하나님에게만 속한 독특한 백성이다 라는 의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다른 면을 사용해서 이 사람들은 아주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서 유대 사람들은 음식을 먹어도 어떤 특별한 음식만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아주 경건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에 식으로 잡은 음식만 먹지 다른 음식은 먹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게 뭘 가르치는 겁니까 우리를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친다는 말이죠 신약 시대에는 우리가 그렇게 외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을 다른 사람들하고 나눠 놓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 가운데서 다른 것이 나타나야 한단 말입니다. 거기에 거룩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적으로만 규제했다가는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되기가 쉽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유대인만으로도 그것은 분명하게 다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유대인한테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삶을 살아가면서 유대인들이 구체적으로 농경 생활을 하는 데에서라도 하나님께 구별된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너희가 밭에 나가 곡식을 뿌릴 때 두 종류에 곡식을 섞어 뿌리지 말아라” 그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그게 뭐 곡식 성장에 어떤 나쁜점이 있기 때문입니까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 이 백성들로 하여금 너희는 하나님께 속한 독특한 백성이다 라는 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심지어 그런 방식까지 사용해서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런 구절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제 그렇게 하지 않죠. 우리는 뭐 특별한 음식 먹는 것 아니죠. 우리는 어떤 특별한 규율을 따라가는 것 아니죠. 그럴지라도 마음속에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라는 그 의식을 가지고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특성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부디 말하기는 우리 가운데서 먼저 다른 모든 것보다 그 의식이 좀 분명해져야 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만되어진다면 다른 아무런 이야기 만해도 다되어질 수 있겠죠.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 마음 가운데 내가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이다 라고 하는 의식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거룩성은 우리의 거룩성은 우리한테 그것을 요구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오늘 본문 가운데 아주 어려운 요구에로 갑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들이 공동체로 모이는 이 교회에서는 그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들이 모이는 모습에 부합한 모습이 드러나야 된다. 하는 것이 오늘 이야기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 이상스런 말이 나타납니다. 마치 밀가루 반죽해서 빵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우리가 이스트를 집어넣죠. 누룩을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빵을 부풀게 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넣어도 그것이 전체를 부풀게 하죠. 그렇게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 그 이야기를 하십니다. 여기서 가끔가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이스트를 집어넣는 것을 좋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고 대개는 나쁜 의미로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나쁜 것을 이야기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같이 살아가는 가운데서 만일 그 중에서 몇몇 사람이 나쁜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것이 다른 성도들한테 영향을 미쳐준다. 그래서 7절에 보면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려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누룩이 없는 자인가 우리한테 나쁜 것이 왜 없는가 우리가 다 있는데 죄악이 왜 없는가, 다 있죠. 있는데 뒷부분에 해답이 있습니다. 왜 우리보고 누룩이 없는 자라고 했는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었느니라” 이 어려운 말, 이게 무슨 말인가 유월절 양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나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문설주와 임방에다가 양의 피를 갖다 발라 놓으라고 했습니다. 어느 한 날을 통해서 양의 피를 발라 놓아라. 그리고 그 잡은 양은 너희들이 구워서 또는 삶아서 먹어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에 따라서 그렇게 다했겠지요. 그렇게 안한 사람들, 이집트 사람들한테는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죽음의 천사를 보내셔 가지고는 그 첫번째 되는 아들들을 다 죽이셨습니다. 심지어 첫번째 낳은 생출__ 소나 양이나 개나 뭐 첫번째 낳은 것을 다 죽였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문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발라 놓은 집에 대해서는 그 죽음의 천사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넘어갔습니다. 넘어간다고 하는 말이 유월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날을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해 주신대로 피를 발라 놓은 집은 넘어간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겠는가 그런데 그 양의 피가 뭐 효력이 있어 가지고 죽음의 천사가 무서워서 넘어갔는가 그런게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 본문이 이야기한 대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었습니다. 되셨느니라. 옛날 이스라엘들 한테 그렇게 하라고 했던 이유는 뭐냐 하면 양의 피가 그들의 죄를 속하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오실 터인데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죄를 다 짊어지는 죽음을 죽으실 것인데 그 사건을 미리 바라보면서 그것을 칠해 놓으면 그것을 보고서 곧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 준다고 말해 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한테는 일종의 그림자가 있었던 셈입니다. 진짜가 아니죠. 양은 진짜죠 그러나 양의 피가 그들의 죄를 속하는 것이었습니까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진짜는 언제 일어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시면 여러분이 십자가의 어린양의 피, 그것을 찬송하는 노래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다 누룩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악한 사람, 나쁜사람 이었을 터인데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내가 암만 죄인이어도 내 모든 죄를 깨끗게 하셨다. 그 이야기가 되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깨끗하게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룩 없는 사람이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게 되면 나는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놓는 순간에 나에게는 아무런 이 세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이것이 너무 생소하고 이상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게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긴 하지만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받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깨끗하게 했습니다.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 공동체는 이제 그 다음서부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그 공동체의 특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잘못을 행하거든, 여기서 아주 구체적인 예가 하나 나오는데,“ 음행을 행하거든 너희가 내어쫓으리”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는데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용서해 줘야지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에 어떤 음행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과도 우리가 사귀어야 된단 말이죠. 그래야 그 사람들한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소개하고 그 사람의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제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내가 정식 교인이 되기로 하였으면 이제는 내가 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와진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으로서 의식을 가지고서 그것을 구현해 내려고 하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못하게 되었을 때 이 공동체 안에서 잘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는 일들이 따라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것은 이 공동체의 특성을 허물어뜨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아주 주시해서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은 아픈 일입니다. 아픈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어떻게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4절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라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끊어서 나가는 것을 뭐라고 묘사했냐면 사단에게 내어 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만일에 교회에서 권징을 하면 이 이 교회만 있나 내가 딴 교회에 나가지 이렇게 나간단 말이에요. 그렇게 되어지면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하는 것이 전혀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어느 교회에 회원이다라고 하는 의식에 대해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회원으로써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의 특징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물론 그것이 여러분이 처한 성격에 따라서 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아주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그런 모습을 드러내지 아니할 때 교회에서는 자꾸 그러나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자꾸 권면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자꾸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십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것을 나쁘게 생각 마시고 참 감사한 말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교회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게 계속되어 나가다가 전혀 그런 성격이 나타나지 않으면 심지어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대로 내어쫓는 일까지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어쫓는 이유가 뭡니까 결국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심지어 그렇게 까지라도 하는 겁니다.
아주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마는 심지어 이런 일까지 있을 수 있는 것이 어디에서 나오는 성격이냐 하면 교회의 거룩성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심지어는 이런 일까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교회 밖으로 어떤 사람을 내어쫓는 일을 경험한 사람이 별로 없어요. 오늘날 교회에 와서 옛날 교회에는 있었어요. 이것은 뭘 말해 주느냐 하면 교회가 그 거룩성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이 거룩성이라는 의식을 다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 주님과 속해 있는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이 이런 일이 행해지면 그것은 아주 이상스런 문제만을 일으켜질 것입니다. 이런 일이 행해질 수 있을 분위기는 뭐냐면 마음 가운데 정말 주님과 내가 하나로 되어 있는 그 내가 주님께 속해 있는 공동체이다라고 하는 그 의식이 있을 때라야 이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가운데 제가 강조 점을 두고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내어쫓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일이 가능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 이유가 뭐냐면이 공동체가 하나님과 독특하게 관련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가운데 내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분명한 의식이 있다면 이게 시행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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