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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몸 (고전 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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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우리가 교회에 관해서 생각을 하도록 그렇게 하도록 했었습니다.
이제 몇 주간이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교회에 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나가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교회를 잘 모를까 봐 어떻게 해 주셨느냐 하면, 국민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 주는 방식이 있는데, 그림을 그려 주면 됩니다. 그림을 그려 주면 그림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교회를 묘사하기 위해서 몇 가지 아름다운 그림들을 우리한테 그려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몇 주간 동안은 주님께서 교회를 묘사하기 위해서 그려 주신 그림을 보면서 그 그림을 통해서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작업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기가 쉬우냐 하면 그저 어깨 너머로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맨 처음 예배에 대해서 찬송, 기도 등을 하나하나 점검을 했듯이 그런 것들도 우리가 하나하나 점검하지 않으면 그저 교회에 나오면서 어깨 너머로 보면서 아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거죠.. 우리가 그렇게 하기가 쉽습니다.
이제 경험적으로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고 또 세상에 교회라고 이름하는 데가 많이 있으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아! 교회라는 데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옳은 경우가 많이 있겠지마는 우리는 교회에 관해서 생각할 때도 그것이 우리에게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해 오던 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는 이런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끔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관련된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모든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라도 성경에서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해 주는가 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고 우리의 공동체 가운데서는 그 모습이 구현될 수 있도록 힘을 써 나가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무시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늘 경험 속에 젖어 온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것과 맞지 않는 것은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기 때문에 성경에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해 주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과연 우리가 현재에 속해 있는 이 교회 모습이 성경이 말해 주는 교회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인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모습을 향해서 나가는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 성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즉 교회를 지칭하는 가장 멋있고 포괄적인 그림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그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그림이라고 하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이게 일종의 비유법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 때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와 같이 똑같은 몸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교회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셨을 때 그의 몸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우리가 말한바 와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하늘에 있으면서 또 이상스럽게도 예수께서는 그의 신령한 몸을 이 지상에 가지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의 몸이 둘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의 몸은 하나뿐입니다. 저 하늘에 계신 몸이죠. 이제 교회를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비유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이다라고 말합니다. 육체적인 몸은 하늘에 계시고 그 육체적인 몸 그러면 예수님은 육체만 있고 영은 없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하늘에 계신데 그 몸은 이 땅위에 계셨던 그 몸이죠. 영원토록 그는 그 몸을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시게 되면 또 하나님의 나라가 극치에 이르러서 예수님 앞에 서게 되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몸을 가지고 몸을 가지신 예수님을 만나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할는지 그의 발 밑에 엎드려서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하며 또 어떻게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할 수도 있겠지요. 그 몸은 계속 계십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가 그의 영적인 몸을 이 지상 가운데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몸을 지칭하는 우리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이후에 그 다음 비로소 소위 신약에 교회가 생겨진 것이고 신약의 교회를 가르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먼저 교회에 대해 생각할 때 마음 속에 생각해야 되는 것이 아!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 우리는 바로 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생각할 때 다른 것을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모이는 교회의 건물을 생각하시면 안되고 다른 것을 생각하시면 안되고 우리들을 주님께서 교회로 세우셨다. 우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이 공동체 가르쳐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묘상, 이 그림으로부터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 가운데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 우리를 모두 몸이라고 했으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무슨 이야기가 있느냐 하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은 한 몸인 것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말하는 것이죠. 우리가 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교회를 구성하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는 고린도 교회를 가르쳐서 말하는 것이니까 거기에는 유대인이었던 사람들,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사람들, 과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들 헬라인들이 다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온 세상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대개 이 세상의 사상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구약 성경과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어 온 헤브라이즘,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것이죠. 그리고 희랍 사람들, 헬라 사람들을 대표하는 헬레니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말하는데 그것을 대표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너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또 고대 사회에서는 종, 자유자 이것이 엄격하게 나뉘어져 있었단 말이죠. 그런 것 없이 이것을 현대식으로 말하면 너희들은 전라도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그런 것 상관없이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영국 사람이나 그런 것 상관없이 모두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우리가 한 몸이 되었다. 마음속에 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는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었는가. 우리 안에 한 성령님의 세례가 있다는 말은 우리가 모두 성령에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는 말이죠. 우리가 교회에 속해 있으면 우리가 모두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 우리한테 성령 세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여기에 보면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우리 안에 성령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 같은 성령님이 너희 안에 충만히 임하여 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우라는 바로 이런 일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한 부분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진 것입니다. 즉 교회의 회원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님과 신비한 연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을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과 신비한 연합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릴 수 있느냐. 나 한 사람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여기에 속한 한사람 한사람이 전부다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을 수 없고 우리는 교회가 아닙니다. 내가 내 마음 가운데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하는 의식이 있는가 하는 것이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내가 바르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바르지 않으면 내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나의 구주이시다. 그가 나를 위하여 죽어 주셨다. 그가 죽어 주셨을 때 2000년전 십자가에서 나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서 나도 같이 죽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데도 왜냐하면 이것이 영적인 사건이니까 내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서 나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끔 되어졌다. 예수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예수님이 죽고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 나와 같이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나도 그 사건 속에서 나도 죽고 살아났다라고 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한 하나 됨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지금 여기에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이렇게 죽고 살아났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라고 하는 의식이 없다면 나는 아직 교회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어떤 사람들의 모임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하게 하나 된 사람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우리 가운데 ‘나는 아직 그런 것이 잘 인식되지 않은데요’ 그런데도 괜찮습니다. 오늘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진 것을 통하여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을 구성하게 되어진다’ 그것이 여러분 오늘 마음속에 기억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는가, 하나라고 말씀하신 그 부분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신 그 일 속에 내가 들어 있다 늘 그 이야기를 해 주십시다.‘작은 무리지만 너희는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 이야기 들으면 여러분 마음이 좋잖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늘 멀찍이 떼어놓아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우리는 대개 어떤 사람이 되기가 쉬운가 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 예수님을 멀리서 따라가던 제자들과 같은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럼 하나가 아니죠. 예수께서 그 십자가의 고통을 당해 가실 때 제자들은 성경에 보면 멀리서 예수를 바라보았더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지면 예수님과 하나 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당시에 제자들은 그래도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완성하시고 그의 사역을 그들에게 적용시켜 줄 것이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루어진 이후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서 지금 여기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반드시 하셔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와 예수 그리스도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베드로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예수님! 저는 절대로 제 발은 씻어 주지 못합니다.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 발을 씻어 주시겠습니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그러면 안되지요. 그럼 발뿐만 아니라 네 온 몸을 씻어 주십시오” 그랬던 것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이미 깨끗함을 받은 자에게는 더 이상 씻을 것이 없다! 그 이야기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서 그 모든 죄를 씻음을 받았다라고 하는 말을 원칙적으로 선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 사건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얼마 뒤면 예수께서 십자가 지심을 생각하시고 다락방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님이 죽으실 것을 아시고 미리 적용해서 제자들한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지 않으면 성경에서 아름다운 것들에게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 되어집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성경에서는 “너희가 온 천하를 얻고도 너희의 생명을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구구절절이 옳은 이야기라도 이것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되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 모두는 내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인가 질문을 하고 이것이 정말 내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주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은 만일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현실 가운데 되어지지 않는다면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그 모든 아름다운 것 속에 우리가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모든 저주 가운데 우리가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고 무섭게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런 두려운 마음과 무서운 마음을 우리 가운데 품어 나가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만 내가 정말 이게 신통한 일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나 자신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었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 자매들은 아직 그러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가 아주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히 나타납니까 우리 마음 가운데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혁 교회에서는 그 신조 중에 하나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는 이런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생사간에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죽으나 사나 나에게 있는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내가 죽으나 사나 나에게 있는 유일한 위로가 뭘까 내 아들 중에 하나가 잘 자라나고 공부도 잘 하는데 이 아들이 서울 대학교 들어가서 나중에 박사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가! 뭐가 유일한 소망인가. 과거에 개혁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그 문서가 1563년도에 작성되었는데 400년전에 우리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던 그 그리스도인들은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나 자신이 나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으로서의 정으로서의 나가 사나 죽으나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 얼마나 멋진 신앙입니까
내가 나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는 사나 죽으나 예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한테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서의 모든 문제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니까 그게 두렵겠습니까 예수는 마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강한 성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게 내게 유일한 위로란 말입니다. 죽었을 때도 그게 두려움이 안되는게 내가 예수께 속해 있으니까 예수께서 승리하신 그 승리가 나의 것이니까 그게 문제가 안된다는 말이죠. 마음속에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아! 나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고백하렵니다. 마음속에 고백하려는 마음에도, 그 중에 나는 아직 그렇지 않은데 하는 마음도 있죠. 그럴 때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 자기 아이를 데려왔던 어떤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예수께 이 간질병으로 고통 하는 이 아이를 고쳐 주시도록 데려 왔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못 고친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다시 오시니까 “예수님, 이 아이를 좀 고쳐 주십시오.” “네가 이 아이를 내가 고칠 줄 믿느냐” 이 아버지가 믿는다고 할 수도 없고 안 믿는다고 할 수도 없고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그 비슷한 마음일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교회에서 몇 번 나와 봤으니까, 또 오랫동안 생활하였으니까 믿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도 확신이 없기도 하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말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십시오.” 그 아주 멋있는 대답입니다. 한편으로는 믿는 부분도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 안 믿는 부분도 있다는 것인데 그 부분을 주님께서 도와주십시오. 그것은 적어도 신앙의 고백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이야기할 때 아! 그럼 아직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의식이 별로 없는데 그럼 나는 어떻게 되나, 나는 교회의 일부분이 아닌가 그럴까 봐 저는 지금 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최소한 할 수 있는 게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으면 그렇게 한 사람답게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죠. 그저 내가 몇 가지 기본적인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것, 최소한 하는 것만 하고 말게 아니라 정말 내가 그와 하나가 된다는 그 의식을 내 가운데 누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힘써 하시면 된다는 것이죠. 최소한 우리가 올 해 공예배에 전체적으로 참여한다 그런 의식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일을 우리가 힘써 나간단 말예요. 그 일은 교회가 전체적으로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 같이 세운 목표라 하는 것이죠. 그랬으면 우리가 그렇게 같이 나간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이렇게 모임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제 서양 그리스도인들처럼 주일 아침에 딱 한 번만 모이면 될거예요. 그게 제대로 교회가 나가는 방식이라면 그렇게 해 보시는 것도 좋을 거예요. 그러나 그 누구도 다 인정하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풍성하게 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노력들을 해 나간단 말이죠.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되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하나이십니까 그리스도와 신비한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마땅히 물어야 할 첫째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또 하나의 질문을 묻도록 합니다. 우리 한 그리스도를 향하여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고 하지 아니하고 우리 모두를 향하여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 이야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바울은 무슨 예를 드느냐 하면 우리의 구체적인 몸 예를 듭니다. 야! 너의 몸 중에서 귀가 하나는 몸 안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몸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도 귀도 몸에 속해 있지 않느냐, 발이 손처럼 몸에 가깝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런다 할지라도 그게 말이 되느냐 다 몸의 한 부분이 아니냐 우리가 모두 몸의 한 부분이란 말이죠.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예수와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정말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일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될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성도들과 하나 되어진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한테 이야기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성도들이 그렇게 고귀한 것입니다. 그분들이 나와 한 몸의 한 부분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한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한 몸이라고 표현된 것이 딱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혼인을 하시면 남편과 아내를 한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와 신비하게 비슷한 것이 교회의 하나됨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이 둘을 서로 연결시키면서 이야기하기를 신비하도다, 그 비밀이 크도다 하시면서 마치 부부가 하나 된 것처럼, 온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우리한테 그냥 선언으로만 그쳐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한 몸이다 아 하나구나 그리고서는 우리가 예배 끝난 후에 다 나가 버리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 되려면 우리가 애써 노력하는 데로 서로 알아야죠. 하난데 어떻게 모르고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알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을 서로 알고 정말 우리가 하나라는 의식을 가지고 일종의 최소한 어떤 분의 표현대로 공범 의식은 가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치과 의사 하시는 분이 저한테 이야기하시기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최소한 공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의식, 그런 의식을 가지는 공범 의식, 최소한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지요. 아, 살아보니까 신앙생활을 이렇게 해야 되는데 이게 안됩니다. 서로 이야기할 수 있고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그게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안된단 말이죠. 바울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머리가 발한테 아 너는 쓸데없다 그러면 그게 몸이 아니란 말이죠 그럴 수 없는 거란 말이죠 우리 가운데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고 다같이 주님께서 골고루 모두를 위해서 모두를 필요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해 놓고나서 우리가 그저 이 이야기를 “아! 오늘 그런 설교를 들었다” 그렇게 해 버리고 나면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교회하고는 상관없는 모습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우리가 알아 왔던 옛날에 방황해 왔던 그런 모습으로 그냥 돌아갑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도전한다면 “야, 그럼 내가 하나님과 일체일 뿐만 아니라 내가 성도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을 여러분들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움직여 나가게끔 해야지만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소용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해 버리고 “아, 성경에는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가 있죠” 그러고 말아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럼 주위에서는 마치 어떤 일이 있게 되면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좀 더 안타까운 현실은 여기서 이야기되는거 하고 저기 앉아 있을 때 우리 머리 속에서 생각되는거 하고 전혀 다른 것이든지 그게 좀 비극적인 것이 되죠. 또 하나는 마치 이런 이야기입니다. 주일날 아침이 되면 거위로 예를 든다면 거위 중에 목사님이 나오셔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저 창공을 날아갈 수 있도록 날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날아갈 수 있습니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면 거위들은 날아가지 못하잖아요. 그런다고 라고 못 날아가고 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 또 나와서 우리가 못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서는 다시 목사님은 열을 내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날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교인들은 그냥 끄덕끄덕하고 말아 버리면,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되어 버리면 안된단 말이 예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한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몸이면 우리가 서로 정말 이것이 몸인 것을 구현해 내려고 하는 노력들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이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인가, 그리스도와 신비한 일체를 이루고 있는가 두번째, 우리는 우리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한 몸인가, 그분들을 알려고 하고 그분들을 위해서 나의 삶을 나눠주려고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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