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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반역과 다시 사신 예수님 (행 05: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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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승리의 날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신비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 처녀의 몸에서 잉태된 것부터 시작하여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시는 것 모두가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신비스럽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알거나 모르거나 사실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안 믿어진다고 사실이 거짓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모른다고 실재적인 일들이 없었던 일이 되겠습니까
맹인이 태양을 볼 수 없기에 태양이 없다 한들 태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참으로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는 이 부활을 믿지 못해서 내가 손가락으로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입니까 그 당시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부활을 어떻게 우리의 이성으로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인간의 이성으로 부활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게나 그러면 우리가 믿을께'라고 요구했어도 주님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통해서도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조용하고도 비참하게 죄인처럼 죽으셨습니다. 능력이 있으나 없는 자처럼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없어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능력이 있으시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고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도마의 입장에서 볼 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신 분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게 의심하다가 눈으로 목격하고야 믿고 신앙고백하는 도마를 주님은 칭찬하시지 않고 오히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1-29)
참으로 저나 여러분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져보거나, 보거나 한 일도 없는데 말씀을 통해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본문을 중심으로 '인간의 반역과 다시 사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인간의 반역

본문 30절에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자신들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렇게도 비굴했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후에는 저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했던 저들이 위협과 죽음의 협박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게 했던 대제사장의 그룹이나 사두개파 그룹들은 예수님을 죽인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제 사도들에게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12절 이하에 보면 사도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자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남녀의 큰 무리가 주께로 돌아오는 일이 생겼습니다.
병든 자들이 낫고, 귀신들린 자가 치료받으니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시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18절).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내어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미 사도들은 새벽부터 성전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데 반역의 무리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옥에서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옥에 가보니 옥을 지키는 사람도 서있고, 잠겨있는 옥문을 열어보니 그 안에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일은 저들에게 상당한 불안을 자극했음을 24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반역의 그룹들은 그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여기 '의혹하여'는 의아해 하다, 안절부절 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때 한사람이 와서 지금 사도들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백성을 두려워하여 강제로 연행하지는 못하고 임의 동행하여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금했는데도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 아니냐고 심문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는 말로 경멸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응수했습니다. 참으로 저들은 하나님중심으로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속에서 사람에게 순종할 것이냐,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냐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 사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은 이어서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저들의 완악함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지 못하고 끝까지 반역을 일삼는 저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복음을 증거 하는데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는 저들의 모습은 인간의 완악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인간의 반역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2. 다시 사신 예수님

본문 30절과 31절에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람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첫 열매가 되어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것을 보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한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복제 소와 양, 돼지를 만들어 과학의 위대함과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의 정자를 쥐에게 이식시켜 사람을 만들어 내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현대과학은 쾌재를 올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은 뭔가를 만들어내고, 복재 해내지만 죽은 것을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죽어 가는 것, 죽고 있는 것은 고치고, 얼마간 더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어도 죽은지 사흘이나 된 시체를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이전에 이미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자신이 부활의 주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이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하실 수 있습니까
기독교 잡지(Christian Century)의 편집장이었던 마티 목사는 젊었을 때 주일학교 3학년 교사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활절 때 아이들에게 부활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빈 상자 하나씩을 주면서 여기에 '새 생명을 담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아이는 꽃을 담아오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계란을 넣어오고, 어떤 아이는 나비를 가져오고, 많은 아이들이 이런 저런 것들을 가지고 와서 여기 새 생명을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티브라고 하는 아이는 빈 상자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너는 왜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았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스티브는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의 말에 마티 목사님은 젊었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마28:1-6,막16:1-6,눅24:1-6,요20:1-2).
바로 이것이 부활의 증거입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벌벌 떨던 제자들이 정신이 이상해서 생명을 내걸고 복음을 전했겠습니까 정신이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했겠습니까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 곧 부활신앙은 초대교회의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부활의 복음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하자 말씀을 듣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소리칩니다.
이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36-38절) 라고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우리의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렇게 높이 드신 것은 그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사함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오늘 본문 31절에서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성도의 구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의 구원의 완전 보증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죄인에게 들려지는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2절).
증인은 듣고 본 것을 사실대로 말해야 합니다. 위증을 해서도 안되고, 묵비권을 행사해도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완악한 인간은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우리의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으로서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을 믿는 다면 그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언해야 합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선언이요, 절망에 대한 소망의 선언입니다.
2001년 부활절을 맞아 이 부활의 소망을 만방에 알리는 능력 있는 성도 여러분들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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