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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이루었다! (마 27:62-28:6, 요 19:30)

첨부 1


마27장은 <십자가장>이라면, 마28장은 <부활장>입니다.
마27장은 <고난의 장>이라면, 28장은 <영광의 장>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27장을 통해서 예수님이 당하신 그 끔직한 십자가 고난의 과정을 심도 있게 상고해 보았습니다. 이제 드디어 6년의 긴 강해를 마무리하는 28장으로 들어섰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인 28장으로 들어섰다고 하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28장으로 넘어간 진짜 기쁜 이유는 그것이 아닙니다. 28장은 부활장이요 영광의 장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28장은 예수님의 부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마태복음이 27장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천국도 없습니다.
죄사함도 없습니다.
교회도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마태복음은 28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28장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이 생생하게 증언되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서른 세 살의 나이에 그냥 비참하게 죽으시고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서른 세 살이면 얼마나 아까운 나이입니까 그렇다고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못난 제자 가룟유다에게 배신당하시고, 악랄하고 잔인 무도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덜컥 세상을 끝냈다면 이런 억울한 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그러했다면 이런 하나님을 믿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신 거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어!" 분해서 하나님 믿을 사람 없을 것입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기고만장하고 제사장들은 우쭐대면서 의인인양 벌건 세상을 네 활개펴며 다니고, 예수님의 시신은 무덤에서 푹푹 썩어 없어 졌다면... 이런 무능력한 하나님을 도대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에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의 위선의 탈을 확-벗기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당시 교권주의자들의 못되고 악랄하고 치졸한 음모를 만천하에 폭로하시면서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원수들의 콧대는 납작해졌습니다.
당당했던 악랄한 무리들은 쥐구멍을 찾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온 인류의 숙원이었던 죄악의 문제를 정복하시고 마침내 부활하셨습니다.
온 인류를 협박하던 폭군인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28장에서 이러한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관념이 아니라, 상상이 아니라, 회고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확 부딪쳐오는 실제적 사건으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할 때 부활하신 주님이 내 죄에 있어서도, 내 죽음에 있어서도, 여전히 부활의 주님으로 역사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류 역사상 수백 수천 억의 사람들이 왔다 갔습니다. 그리고 그 중 인류에게 공헌을 끼친 사람은 많고 많습니다만 몇 사람의 예를 들면,
창공을 정복하는데 공헌한 라이트형제가 있고,
인간을 어둠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도록 전기를 발견한 에디슨도 있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리를 가르쳐 준 공자가 있고,
참선을 통하여 인간의 108번뇌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준 석가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고 안 되고는 별문제로 하고... 어째든 나름대로 인간사에 공헌을 한 분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인류에게 무슨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라이트 형제처럼 비행기를 만드신 것도 아니요, 에디슨처럼 전기를 발견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주지 못하는 것을, 공자가 주지 못한 것을, 석가가 주지 못한 것을 주셨으니...
죽음을 정복하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죄를 정복하고 영혼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절망을 해결하고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울음을 해결하고 웃음을 주셨습니다.
갈등을 정복하고 평화와 찬송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야말로 인간의 문제를 다 이루셨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요19장의 표현처럼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죽-나열했지만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다 이루었다!"는 말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1. "다 끝났다"는 뜻입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다 끝났다!"
"염려하지 말아라. 다 끝났다!"
"불안해하지 말아라. 다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 끝났다는 말입니까

첫째, "우리 구원을 위한 율법이 다 끝났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갈3:23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이 오기 전에(믿음으로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담 이후부터 예수님 때까지를 율법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해라 말아라. 가라 와라. 앉아라 서라... 안 하면 벌받습니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이 시대에는 철저한 법과 법의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어기면 벌이 따르고, 그래서 억지로라도 지키려했고, 정말로 살벌한 시대였습니다. 이 율법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보려고 한 것이 율법시대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제는 내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지켜주셨기에 나는 예수 안에만 있으면 율법을 다 지킨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키려면 죽어라고 지켜도 겨우 몇 개였는데,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있으니 예수님이 지킨 모든 율법이 다 내가 지킨 것이 되어 의인이 되더라 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최소한 "양심적으로 살아야지!" "도덕적으로 살아야지!" "계명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지!" 말 한마디 해놓고도 따지고, 행동하나 해놓고도 따지고... 양심과 도덕적으로만 살아보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힘듭니다. 피곤합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슴에 꽉 부딪쳐 옵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내 심령 속에 구주 예수님이 확 부딪쳐 옵니다. 그러니 내 속에 다른 힘이 넘칩니다. 다른 생명이 운동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달라집니다. 양심수준 도덕수준은 저 아래입니다. 이제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생명의 법칙대로 살다보니 선악의 법칙은 이제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돈은 많지만 자식이 없는 어느 노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죽으면 장사지내 줄 사람도 없고 설사 장사지낸들 무덤을 돌보아 줄 사람도 없는 쓸쓸한 노인들입니다. 그러한 노부부는 서로 의논하여 자기 집에서 30여년 동안이나 종으로 일해왔던 머슴을 양아들로 삼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는 구청에 가서 호적을 정리하여 아들로 입적시켰습니다. 그리고는 호적등본을 한 장 떼어 가지고 왔습니다. 호적등본에는 "백만장자 아무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는 철두철미하게 법적인 관계입니다. 안 하면 벌받고, 안 하면 야단맞고, 안 하면 혼납니다. 그러니 해도 짜증나고 신경질 나고... 억지로 하는 그런 관계입니다. 이 종도 주종관계니 틀림없이 그랬습니다.
이제 주인이 호적등본을 옆에 두고 종을 부릅니다. "아무개, 하던 일을 멈추고 좀 들어오게나!" 평소의 목소리와는 다른 인자한 목소리로 종을 부릅니다. 종이 듣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아따, 저놈의 영감 오늘따라 왜 저렇게 목소리가 간지러워! 또 뭔 일 시킬려구! " "알았어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투덜대며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주인이 비단 방석을 내어놓습니다. 종은 더욱 깜짝 놀랍니다. 세상에 주인이 종에게 비단방석을 권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 늙은이가 망령들었나 왜 이래"
이렇게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인이 종이 한 장을 내 놓으면서 "이것 좀 읽어보게." 주인이 호적등본을 종에게 줍니다. 종은 무심결에 그냥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주인의 아들로 입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다른 종이 한 장을 줍니다. 거기에는 유언이 적혀 있는데 "내 모든 재산을 내 아들 아무개한테 준다!"는 것인데 거기에도 자기 이름이 아들이라고 적혀 있는 것입니다. 종은 깜짝 놀랐습니다. 주인이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부부는 얼마 안 있으면 세상 뜰텐데 이 재산 맡길 자식도 없고, 나 장례 치뤄 줄 사람도 없고, 내 무덤에 풀 뜯어 줄 사람도 없고... 그래서 우리 노친네가 의논해서 자네를 아들로 삼기로 했네. 이제부터 자네는 내 아들일세. 이 재산 다 자네 것이네. 나 죽거들랑 무덤에 풀이나 뜯어주게나."

이렇게 얘기하는 가운데 종과 주인관계는 점점 박살이 납니다. 법적인 관계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관계가 강하게 강하게 형성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제 종이 아닌 아들에게 부탁합니다. "어디 아버지--하고 한번 불러봐!" 종은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이 핑 돕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콧등이 시큰합니다. 그리고는 "아버지--!"라고 불러 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순간, 그때는 이미 법은 끝났습니다. 노비문서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은혜의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에는 종과 주인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야단 맞고 벌받았습니다. 팔릴 수도 있고 심지어 주인이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관계가 박살이 났습니다. 다른 관계가 이 종의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바로 은혜의 관계요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제는 이미 법은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은혜와 사랑뿐입니다.

이러한 경우가 바로 주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이 내 경험으로 믿어질 때, 죄 값으로 인한 노비문서는 무력화되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제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단 은혜의 관계가 되면 율법과 법에 대해 벌벌 떨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은혜에 감격하여 살다보니 율법, 법대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아-이-구-율법대로 살아야지!" "법대로 살아야지!" 이렇게 벌벌 떨던 유치한 생활은 끝납니다. "오 주님!" 은혜에 감격되어, 사랑에 감격되어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은혜의 빛 아래 새 출발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 아래 새 출발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죽도록 충성이 나오는 것이요,
이럴 때 범사에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억지가 아닙니다.
전화해서 나오라 나오라 귀찮게 안 해도 기쁨으로 나와집니다. 교회가 가고 싶어 미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이제는 억지가 아닙니다. 십이조는 없나 성경을 뒤적이게 됩니다.
교회에서 충성하는 것도 억지가 아닙니다. 전에는 할 일도 안하고, 해도 벌받을까봐, 축복 못 받을까봐 했는데 이제는 내가 더 할 일 없나 찾게 됩니다.
억지는 끝났습니다.
의무는 끝났습니다.
율법은 끝났습니다.
오직 감격, 이 감격으로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예로 들었던 이 종이, 이제 밖에 나가서 하는 일이 전과 같겠습니까 전에는 안 하면 혼나고 벌받았기에 했었다면, 이제는 주인이, 아니 아버지가 시킨 일 자체가 즐겁고 기쁠 뿐입니다. 아버지가 시킨 양보다 더 많이 일할 겁니다.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은혜의 관계를 경험한 후에야 주일성수도 즐거운 것이고, 십일조도 기쁜 것이고 ,충성 봉사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억지가 아닙니다. 법은 끝났습니다. 의무감도 끝났습니다. 율법도 끝났습니다. 기쁨과 즐거움만 있을 뿐입니다. 오직 감격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다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둘째, "죄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롬8:1-4을 읽어보면 죄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죄와 굿바이 시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는 법이 있어야만 존재합니다. 법이 없으면 죄를 규정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법만이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법이 있으면 죄도 있고 법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것이 왜 죄입니까 따먹지 말라고 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법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죄도 없어졌습니다. 법이 없으면 죄를 규정할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간을 정죄하던 율법은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죄도 끝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양심의 가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어도 해결 할 수 없고, 입어도 해결할 수 없는 죄책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신사복 입고 멋있게 길거리를 나섰건만 그 속에는 죄책감에 억눌려 있습니다. 최신 유행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숙녀도 아무 것도 든 것도 없고, 머리에 인 것도 없고, 등에 짊어진 것도 없건만은 뭔가에 억눌리며 사는 까닭은 양심의 가책이라고 하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을 없애보려고 하루에 3번씩 참선도 해봅니다만 소용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신제가를 해봅니다만 소용없습니다.
목탁도 닳아 뚫어질 정도로 두드려 보았습니다만 몽땅 다 허사입니다.
금욕생활도 해보고, 고행도 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심도 해보고, 혈서도 써보고, 맹세도 해보지만... 여전히 죄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인류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벗어나려고 수 없는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바울도 이 고민했었습니다. 그래서 절구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기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의 못 박힌 손을 곡 붙잡고 고백하기만 하면 죄는 끝납니다. 죄는 봄기운에 눈 녹듯이 스스로 녹아질 것입니다.

심판의 하나님은 나를 보고 싱긋이 웃으십니다.
진노하시던 하나님은 날 보시고 괜찮다. 이제 죄가 끝났다. 위로해주십니다.
죄에 대한 해방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할 때 내 영혼 깊은 곳에서 행복감이 솟아오르게 되고,
이 행복감이 머리와 가슴에 가득 차게 됩니다.
이 행복감이 내 영혼에 가득 찰 때 죄책감 같은 것은 사라집니다.
형벌의식은 사라집니다.
심지어 죄지을 욕심까지 사라지게 됩니다.
전에는 불안해하면서도 죄를 지었지만 이제는 죄라면 몸서리가 쳐지고 지긋지긋해 집니다.

이것이 바로 죄는 끝났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은혜 안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행복해질 때에 "양심아, 네가 뭐냐" "십계명아, 네가 뭐냐" "모세야, 네가 뭐냐" "마귀야, 네가 뭐냐" "우리 주님이 괜찮다고 하셨다!" 이 행복감으로 죄를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가 고개를 들고 일어나겠죠.
시기심이 일어나겠죠.
때로는 교만한 마음이 일어날 수 있겠죠.
때로는 욕심이 일어날 수 있겠죠.
그러나 이제는 전과 다릅니다. 전에는 싫다고 하면서도 헛손질하면서 무참히 패했지만 이제는 능히 죄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죄라면 이제 구질구질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다는 이 행복감이 이를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죄는 끝났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죄는 끝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셋째, "심판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요3:16-18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사람은 한번 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나면 한번 죽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육신으로만 나면 육신도 죽고 나중에 영도 죽습니다만 두 번 나면, 즉 육신의 출생과 거듭남의 경험이 있으면 육신 한번 죽지만 영은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번 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나면 한번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육체의 죽음과 지옥이라는 영원한 죽음, 두 번 죽지만 거듭난 사람에게는 지옥 사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심판이 이미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죄 때문에 심판이 있는 것인데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법이 있어야 죄가 있고, 죄가 있어야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해결됐으니 죄가 해결되고, 죄가 해결됐으니 당연히 심판은 없습니다. 과거의 죄든 미래의 죄든 모든 죄는 십자가의 보혈로 씻김 받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심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마음대로 지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이렇게 "다 이루었다!"는 말속에서는 율법과 죄와 심판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2. "다 됐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하다가 하다가 안되던 것, 공자가 하다가 실패하고 안된 것, 석가가 하다 하다 실패하고 안된 것, 성인 현자들이 하다 하다 안된 것... 그것이 다 됐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구원이 다 됐다"는 말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함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를 신자(信者)라고 부르는데 비록 인간은 못돼먹었다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불신자(不信者)라고 부르는데 그가 비록 성인군자와 같더라도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이기에 이 사람에게는 구원 못 받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선하냐 악하냐이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차이입니다.
윤리의 차이가 아닙니다.
도덕의 차이가 아닙니다.
종교 훈련의 차이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아무 못돼먹은 왕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아버지 왕은 아주 인자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 왕자는 아무 못돼먹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 같지 않다고 왕자가 아닙니까 왕이 李씨면 왕자도 李씨오, 왕이 金씨면 왕자도 金씨입니다. 이는 생명, 혈통의 문제이지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느냐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자녀다우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혀 왕자답지 않아도 왕자일 수 있듯이 전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도 예수님 영접했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염소생명 다르고 양 생명이 다릅니다. 제아무리 착한 염소라 할지라도 염소는 염소입니다. 아무리 못된 양이라도 양은 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양 생명을 가졌으면 양다운 행동을 하게 되 있습니다. 염소생명 가졌으면 염소다운 행동이 나오게 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생명 가진 자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신자란 예수 생명을 나누어 가진 자들인즉, 따라서 비록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그 속에는 예수 냄새가 나야하고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처음에는 형식적인 종교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후, 예수님처럼 되고자 했습니다. 나중에는 분명히 예수님은 아니건만 저들이 가는 곳마다 예수 냄새를 풍기며 마치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예수를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인격이 예수 성품 닮아갑니다.
그 인격이 예수 성품 닮아갑니다.
가치 판단의 기준이 예수화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진들이 어떻게 그리 위대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특별하게 태어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분들입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예수의 생명을 <많이> 가졌다는 사실뿐입니다.
예수의 생명 공급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 다를 뿐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그들을 그렇게 변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베드로를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어거스틴을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성 다미엔을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리빙스톤을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슈바이처를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앉은 우리, 절망할 것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부합되면 생명이 달라져 앞서간 신앙인과 같은 걸음을 우리도 걸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말씀을 많이 행하라"가 아니요 "내 생명을 많이 소유하라" 입니다.
말씀을 많이 안다고 행해지던가요
결심으로 행해지던 가요
금식과 철야로 행해지던 가요
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 생명 소유했을 때 내 안에 계신 그분의 생명만이 말씀을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을 가진 만큼 말씀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쁨으로 말입니다.

겁장이 베드로가 제2의 예수가 된 것도, 고집장이 사울이 바울 된 것도... 예수의 생명을 충만이 충만이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예수의 생명이 슈바이처를, 어거스틴을, 무디를, 웨슬레를, 김익두를...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만이 내 생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 변화의 축복이 28장에 들어선 여러분께 충만히 임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고속도로 공사가 다 됐다"는 말입니다.
"길 다 닦아놓았으니 서울 가거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고속도로 다 됐다는 것입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나님께 가는 길을 다 뚫어 놓았으니 그 길로 달려가라"는 말입니다.

실제적으로 구약시대 내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전 휘장이 예수님 십자가 돌아가실 때 어떻게 됐습니까 쫙찢어졌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고속도로가 그 동안 죄 때문에 막혀있었는데, 그래서 휘장이 쳐저 있었는데 이제 죄 덩어리가 치워지니 이제는 무제한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라도 이 아우토반을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녀야 이 길 달려가거라.
강도야 이 길 달려가거라.
살인범아 이 길 달려가거라.
횡령범도 이 길 달려가거라.
그저 이 길을 달리기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누구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절대자를 만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현상인데 이것이 잘 나타날 때에는 종교로, 잘못 나타날 때에는 미신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절대자를 만나는 길을 모릅니다. 그러니 엉뚱한데 가서 만나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러니 점점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바로 하나님 만나는 고속도로로 연결되니 이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천국 건설이 다 됐다"는 말입니다.

벧전1:3-4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천국 다 됐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이미 다 됐으니 너희들이 만들려고 애쓸 필요 없다. 그저 너희들은 나하고만 교제해라. 그러면 천국은 땅 집고 헤엄치기요, 누워서 떡먹기다. 그런 말입니다.

저는 가끔 주안에서 먼저 가신 분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분들의 육신이 지금쯤 무덤 속에 있을 텐데 그 시신을 생각해보면 구더기가 들끓을 것이요, 그 몸은 썩어 진물이 질질 나서 문들어 졌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합니다. 그러나 고개를 위로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먼저 가신 분이 나를 보고 싱긋 웃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나 천국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하고...

그렇습니다. 이 땅에 있는 육신은 비록 썩어 문들어지고 냄새가 나지만 천국의 영혼은 영원히 쇠하지도 않고 썩지도 않습니다. 이 천국, 썩지도 아니하고 쇠하지도 아니할 그 천국을 누가 만들어 주셨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다 됐다!"고 선언하신 주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만드신 천국에서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천국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27-28장) "다 이루었다!"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율법은 끝났습니다. 우리들은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는 율법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죄는 끝났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행복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죄 때문에 벌벌 떨지 마십시오.
심판은 끝났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다 됐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께 심어 졌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충만이 충만이 채우십시오.
고속도로가 끝났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십시오.
천국이 다 됐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마음 천국, 가정 천국, 교회 천국, 지상 천국, 그리고 영원 천국을 누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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