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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좋은 믿음의 경주 (히 11:3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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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 아닌 일반 마라톤 축제로 세계에서 가장 큰 마라톤 축제는 매년 11월 첫째 일요일에 열리는 32년의 역사를 가진 뉴욕 마라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마라톤의 특성은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와 일반 시민이 함께 뛰는 것인데 작년에는 무려 3만2천명이 함께 뛰었다고 합니다. 이 마라톤의 초창기인 1970년대 말에 뉴욕 주립대학에 재학 중이던 린다 다운스라는 다리를 절며 목발을 의지하고 걷는 여학생이 이 마라톤에 신청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힘든 경주에 지원한 동기를 물었을 때 그녀는 "제가 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어서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강해의 결론을 맺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로 구약시대를 살아간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는가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이 히브리서 11장의 말미에서 구약시대가 아닌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오늘의 신약성도들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에 비하여 얼마나 더 좋은 조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열악한 믿음의 조건에서 구약성도들이 그만한 믿음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면 더 좋은 조건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을 가지고 분발해야 할 것인가를 권면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그들이 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결론을 위해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그 첫째는, 왜 어떤 의미에서 신약시대 성도들의 믿음의 경주가 구약시대의 성도들에 비해 더 좋은 조건의 믿음의 경주인가라는 물음과 둘째로, 어떻게 신약시대 성도들인 우리가 더 좋은 믿음의 경주를 승리롭게 완주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1. 왜 우리의 믿음의 경주가 더 좋은 경주인가요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가. 보다 확실한 기독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본문 39절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약속이라는 단어 앞에는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정관사가 붙어 있어서 특정한 약속, 가장 중요한 한 약속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의의 여지없이 오실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많은 증거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언된 메시야가 이 땅에 어떻게 오시는가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3:23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세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증언함으로 예수께서 바로 그 약속의 성취임을 선언하지 않습니까 또한 같은 사도행전 13:32-33에 보면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신약성도들은 이제 이 역사의 시간과 공간 안에 찾아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기록과 증언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확실한 기독관-그리스도관을 갖고 살게 된 것입니다.

나. 보다 확실한 구원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장차 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는 아무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 이전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 사함과 새 생명의 삶이 확실히 이해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살아감을 경험하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신약성도들은 구약성도들보다 더 확실한 구원관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신약성도들은 구약성도들이 희미하게 바라보았던 모든 것을 이제 실제로 경험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40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다. 보다 확실한 신앙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을 비교할 때 신약성도들의 또 다른 이점은 보다 확실한 신앙생활의 지침들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컨대 오늘의 우리 신약성도들은 신앙생활의 근거인 성경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믿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안내하는 성경을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권인지요 성경 때문에 우리는 보다 확실한 신앙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거기다가 구약시대처럼 일시적으로 성도들에게 사역하시고 떠나가시던 성령님이 성도들 안에 영원히 내주하고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은 또 얼마나 특권인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께서는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하여 주일마다 날마다 그 교제가운데 살게 하신 것도 얼마나 특권인지요 그런 의미에서 신약성도들은 구약 성도들보다 더 확실한 신앙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좋은 믿음의 조건들인 이런 보다 확실한 기독관, 구원관, 신앙관을 가진 오늘의 성도들인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보다 더 좋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2. 어떻게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승리로 완주할 수 있을까요

가. 경주의 목표를 주시하고 달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경주의 목표는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믿음의 출발점이시며 동시에 믿음의 목표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히12:2에서 그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라고 했습니다. 현대역 성경에는 "그는 믿음의 근원이요 완성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어 번역에는 "그는 믿음을 시작하게 하신 분이요, 끝내 주시는 분"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로 우리의 믿음의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시선은 그분에게 머물러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주자가 골인 지점을 바라보지 않고 달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아도 예수, 죽어도 예수--일해도 예수, 놀아도 예수--잠자도 예수, 깨어나도 예수--그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기쁨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삶의 이유요, 목표가 되십니다. 그분을 바라보고 우리 모두 달려야 합니다.

나. 경주의 장애를 극복하고 달려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의 장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힘든 환경이나 상황이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이나 질병도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하게 경계할 장애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입니다. 죄를 향한 내적인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작가인 톨키엔이 "반지의 제왕"이라는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유혹은 "내 안에 도사린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2: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4절에서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다"고 경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욕심과 죄는 아무리 경계해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에 빠지면 죄는 우리를 얽어매고 우리의 발걸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죄의 장애를 극복하고 우리 모두 달려야 합니다. 행여나 넘어진 일이 있었다면 죄를 자백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자백은 우리를 다시 일어서서 달리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처방입니다.

다. 경주의 상급을 바라보고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면서 장애를 극복해야 할 중요성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장애의 극복과정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어려운 환경을 견디어 내는 고통 혹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기 위한 욕심을 절제하는 고통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 12:1에서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인내하는 가장 훌륭한 처방은 이런 인내의 골짜기 저 너머에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주님의 상급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승리한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4) 거룩한 상급의 열망이 사도로 하여금 모든 장애물을 인내로서 극복하게 한 것입니다. 올림픽 스타들이 월계관의 영광과 상급을 바라보며 바치는 피나는 훈련과 절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보다 더 우리의 본이 되신 예수께서도 이런 거룩한 상급을 바라보심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인내하고 승리하시지 않았습니까 본문 히브리서12:2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받게 될 무수한 영혼의 열매들을 보셨을 때 그는 인내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시고 그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인 구원의 계획을 이루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그 모습을 보셨을 때 그는 어떤 고통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 고통의 절정에서 하늘 아버지를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참아야 합니다. 참고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인생의 경주장에서 달리다가 지치시거든 응원단석을 올려다보십시오. 히브리서11:1의 말씀처럼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스탠드에서 당신을 지켜보며 손을 흔들고 응원의 함성을 지르며 호소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 중에는 라합도 끼어 있을 것입니다. "나 같이 험한 인생을 살아온 여인도 승리했는데 당신이 왜 주저 앉아 있느냐"고. 그러면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일어나 믿음의 경주를 승리로 완주하십시다. 그날 주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선배들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하여 후회함이 없도록 말입니다.

저는 오늘의 메시지를 린다 다운스라는 뉴욕 주립대학 여학생의 뉴욕 마라톤 참가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결과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두 시간 반이 지나며 대부분의 승리자들이 결정되고 네 시간이 지나자 늦게 들어오던 모든 경주자들도 완주를 마치고 있었습니다. 취재기자들도 다 철수한 후였습니다. 마라톤 시작 10시간이 경과된 초저녁 누군가가 CBS 텔레비전 방송국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방송국이지요, 한 장애인 여인이 지금 맨하탄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마라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방송국은 갑자기 회의를 열어 메인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다시 이 광경을 취재하러 스태디엄으로 향했습니다. 린다 다운스는 11시간을 넘기면서 목표지점을 골인했습니다.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녀는 다시 동일하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을 따름입니다."
라합이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사라가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기드온이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설교 적용 질문>

1. 39절에서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2. 40절에 의하면 신약의 성도들(우리)에게 구약의 성도들(저희)보다 더 좋은 것이 예비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요

3. 성도의 믿음의 경주의 목표는 무엇이며 왜 그런지 나누어 보십시오(히 12:2).

4. 이 믿음의 경주의 장애물은 무엇이며 어떠한 자세로 승리해야 하는지를 나누어 보십시오.(히 12:1,4)

5. 히 12:2에 의하면 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한 처방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우리의 삶의 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지 나누어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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