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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문을 여는 부활신앙 (막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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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독교에 가장 큰 명절을 두 가지만 말하라면 성탄절과 부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절기들은 가장 기쁘고 즐거운 교회의 명절들이기도 합니다. 이 두 절기에는 두 가지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선물과 카드입니다. 그리고 성탄절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럼 부활절엔 어떻게 인사를 합니까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활짝 웃으시면서 양옆에 앉으신 분들과 반갑게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가지 간절한 바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식을 듣게 하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할지라도 오늘 나와의 개인적인 만남이 없는 부활의 예수님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만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신앙이 아닙니다. 믿고 경험하는 신앙입니다. 그 신앙을 한마디로 저는 부활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주님을 만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부활의 권세가 우리들의 권세가 될 줄로 믿습니다. 모든 얽어매고 있는 삶의 결박들이 풀러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처럼 복되고 귀한 부활주일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돌문을 여는 부활신앙'이란 제목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Ⅰ. 사망에서 생명의 문을 여는 부활신앙
첫째로, 주님의 부활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셨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이 준비한 무덤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입구를 관습대로 큰 돌을 굴려서 막아놓았습니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 27:59-60) 마태는 "큰 돌"이라고 기록했는데 마가는 이 돌문을 "심히 큰돌"이라고 더욱 주의 깊게 보고 기록했습니다. 더구나 이 큰 돌문으로 막은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서 보초를 세웠습니다.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마 27:66) 그들이 이처럼 이미 운명하신 예수님의 시신을 철저히 지킨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마 27:62-64) 큰 돌을 굴려 막아놓은 무덤에 인봉을 하고 파수꾼들까지 지키고 섰으니 그 누구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큰 돌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안식 후 첫날 즉, 오늘의 주일 새벽에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하여 향예수임의 시신을 만지기는커녕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는 품을 사 가지고 주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여인들은 그 돌문을 굴려낼 힘이 없는 연약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대책도 없이 주님의 몸에 향품을 발라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지고 걱정하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여인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여러분! 무덤 문을 막고 있는 이 돌문은 사망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없는 한계를 상징합니다. 이 여인들의 한숨소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상한 영혼들의 탄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여러분! 인생의 한계를 경험하실 때가 오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한계의 돌문을 하나님의 천사가 열어 놓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마 28:1) 여인들이 주님을 만나볼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었던 엄청난 돌문이 열려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이라고 하는 장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종교는 인간의 소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랑할 수 있는 화려한 예수님의 무덤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때 그 무덤은 예수께서 계시지 않는 비어 있는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망을 영원히 정복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이 거대한 돌문을 열 수 있는 어떤 대책도 없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야한다는 사랑과 믿음으로 무조건 달려나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듣게 되는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주님 앞에서 기도해 놓고도 두려워서 나가지 못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면 확신을 주시는데 눈을 떠서 현실을 보면 큰 돌문이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믿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을 가로 막고 있는 사망의 권세와 같은 엄청난 돌문도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고 믿고 나아가면 반드시 길이 열려질 줄로 믿습니다. 이 돌은 하나님의 이적을 가로막고 있는 불신의 돌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었던 큰 돌문보다 더욱 큰 돌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었던 큰 돌문보다 더욱 큰 돌문이 있습니다. 그 돌문은 다름 아니라 위의 두 돌문이 다 열린 것을 알고있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의심의 돌문인 것입니다. 불신앙의 돌문인 것입니다. 이 돌문을 열지 못하면 우린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귀한 부활주일에 이 의심의 돌문, 불신앙의 돌문들이 있으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예수님의 무덤문을 열어 주셨듯이 우리들의 마음의 돌문도 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뜨겁게 다가올 때 그 말씀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 말씀대로 믿고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살전2:13)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제 절망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Ⅱ. 의심에서 믿음의 문을 여는 부활신앙
둘째로, 주님의 부활은 의심하여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셨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이 계신 곳은 무덤이 아니라 성도들의 믿음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부활의 능력은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여인들은 너무 기뻐서 곧 사도들에게 달려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어떻게 한 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느냐면서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4:11-12절을 보면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보고 기이히 여기면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른 사도들은 전혀 믿을 생각도 않고 않았고 베드로는 확인하는 열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도 역시 부활을 믿고 기뻐하지 못하고 단지 신기하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두 제자는 낙향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성경에는 그 이유를 "그들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소식을 전해듣고도 믿지 않는 이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제자들은 주님과 3년이나 같이 있었고 수많은 기적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소식을 여러차례 듣고도 믿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은 의심하여 더디게 믿는 자가 되지 마시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심으로 부활의 믿음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두 제자는 주님께서 음식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제자는 너무나 놀랐고 기뻐서 엠마오로 가던 길을 멈추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보니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제자 중 한 사람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그 때에 없었으므로 나중에 들어와 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도마는 부활의 소식보다 자기의 눈과 자신의 손가락을 더 의지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바로 이러한 육신의 눈이 문제인 것입니다. 육신적인 이 손가락이 문제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는 자에게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드레 후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으면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복 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다녀서 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복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연결고리가 바로 '믿음'입니다. 부활의 사실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나도 부활할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그 믿음으로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Ⅲ. 불안에서 평강의 문을 여는 부활신앙
마지막 셋째로, 주님의 부활은 두려움과 불안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강의 문을 열어주셨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그 어떤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서도 본능적으로 희망을 찾기 위하여 몸부림칩니다. 사람은 가슴속에 희망이 있으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이 지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희망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요 인류 역사는 깊은 어둠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외치신 후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후 순식간에 예수님의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기가 막힌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제자들은 여기에서 꿈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앞날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깥 출입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의 절망은 처참한 절망이었습니다.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안식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20)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이었습니다. 오늘도 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계시는 성도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삶에 평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적인 불안과 두려움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강이 찾아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만이 우리에게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신앙이야말로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로하는 평강의 멧세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부활의 첫 멧세지가 평강을 위한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들이 부활신앙을 든든히 가지면 어떤 풍파와 시련을 겪어도 결코 이 평강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려워 떠는 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만나 주셔서 두려움과 공포를 평강으로 바꾸어주신 이유는 굳게 닫았던 문을 열고 나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은 죽음을 이기는 신앙입니다. 죽음을 이긴 신앙은 모든 것을 이기는 신앙입니다. 부활에서 이어지는 천국본향이 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이 땅에 집착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의 신앙은 어디서든 정의로울 수 있으며, 어느 상황에서도 담대하고, 무슨 일을 만나도 소망을 잃지 않으며, 언제나 이 세상으로부터 초연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믿음으로 만나고 느끼고 감격하는 체험적인 부활 신앙을 가지셔서 늘 기쁨과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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