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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자와 나사로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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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처럼 가치관이 혼란되어 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때는 역사상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도 얼키고 설켜서 분간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기반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고민하며 지금이 우리가 무엇인가 해야 할 때인 것을 느끼고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1월에 있었던 제직수련회 때에 대내적인 사업과 대외적인 사업으로 구분하여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의논하고 토의했더니 대외적인 사업중에, 버림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일년이 다 가고있는 지금 우리가 구체적으로 한 일이 없음을 생각할 때 퍽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가슴 깊은 곳을 파헤치는 말씀인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어서 이 말씀에 스스로 응답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며 이 말씀을 드립니다.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연극으로 말하면 3막으로 된 내용입니다. 제1막은 서막이고 제2막은 지옥편이고 제3막은 천국편입니다.

먼저 제1막인 서막을 열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삶은 서막이요 노래의 서곡과 같습니다. 여기에 부자가 등장합니다. 자색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일평생 동안 일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부자의 모습입니다. 그만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축복받은 인생이었습니다. 또 한 장면이 나타나는데 부자의 집 대문 밖에 사는 거지 나사로의 모습이 보입니다. 주소도 없는 인간입니다. 헌데를 앓아 종기투성이의 몸을 개가 핥고 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도 개와 경쟁을 해야만 얻어 먹을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소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인간과 가장 비참한 인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장면이 바뀌어집니다. 거지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죽어 음부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거적데기에 나사로를 둘둘 말아서 지게에 지고 산 계곡에 내어 던졌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었을 때에 꽃상여에 실려 많은 깃발을 앞세우고 화려하게 장례를 치르고 양지 바른 명당에 가서 묻혔습니다. 거지도 죽었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노동자도 죽고 가진자도 죽었습니다. 인간은 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신 말씀속에 의미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의 끝남이 곧 시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땅의 삶이 서막이기에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중요합니다. 본문의 서론이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고 음악의 서곡이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고 음악의 서곡이 전체 곡의 흐름을 이끌어 갑니다. 연극의 서막이 전체 연극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 위에서의 인생이 서막이라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당에서의 인생이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7.80평생의 삶이 인생의 서막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래서 마음껏 획득하고 마음껏 누리고 마음껏 소비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위해서만 살려고 하는 것이 오늘의 세상 사람들이며 교회안의 대부분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서곡은 서곡일 뿐입니다. 이 땅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결코 삶의 결론이 아닙니다. 죽음이 인간의 모든 것의 결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때때로 머리 아픈 일이 생기거나 고민이나 답답한 일이 있으면 저는 시장에를 가 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물건들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땀 흘리며 고생하며 애쓰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의 고민이나 어려움이 도리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고 새로운 용기를 얻어서 돌아오고는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이렇듯 열심히 인생을 꾸려가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택해서 내 생애를 걸고 따라갈만한 사람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는 인생의 서막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으로 보면 훈련병이고 의사로 말하면 수련의와 같은데 같은 훈련병, 수년의끼리 누가 누구를 표준해서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자의 인생은 서론인 이 땅에서의 인생이 지옥이라는 본론으로 이어졌습니다. 거지의 인생의 서론은 천국이라는 본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제2막이 열립니다. 제2막은 본 연극의 무대입니다. 지옥편이 등장하는데 불속에서 고통당하는 부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소리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물 한방울을 손끝에 찍어서 내 혀에 대어주십시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말하는 이 부자는 아직도 자기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아직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며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면서도 아브라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입만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너는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좋은 것을 다 받아 버렸기에 너는 지금 더 받을 것이 없다"하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다 받았다]는 말의 원래의 의미는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모든 좋은 것과 자기가 일체가 되었다는 뜻이며 모든 좋은 것 즉 이 세상의 것에 자신을 붙들어 매었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은혜인 줄 모르고 건강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줄 모르고 진정한 청지기 역할을 하지 못했고 지식을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고 이 모든 것에 자기 인생을 붙들어매고
자기 인생을 바쳐 자기 소유로 만들어 버린 부자였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부자가 악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쫓아내지 않고 대문 밖에 앉아 있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부자는 식탁에서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못먹도록 저지하지도 않았고 오고 가면서 대문 밖에 엎드려 있는 나사로를 발로 찬 일도 없습니다. 부자는 나사로에게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음부에 떨어진 것은 그의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지옥이라는 것은 인생의 서막시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인 줄 모르고 그것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상태입니다. 세상에서 받은 것에 자신이 영원히 붙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부자의 죄는 그가 나사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있습니다. 단지 나사로를 경치의 한 부분으로 보았습니다. 자기가 사치 가운데 뒹굴며 세월을 보내고 연락하는 동안에 나사로가 굶주림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도 그것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 했습니다. 부자는 나사로에게 무엇인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이 부자는 인생의 서막시대에 이미 지옥의 삶이 결정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다가 자기를 동일화시키고 있습니까 거기에 우리의 영원한 삶이 결정되어집니다.

이제 제3막이 열립니다. 천국편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거지 나사로가 보입니다. 4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많은 비유로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비유의 말씀중에 주인공의 이름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어떤 청년이],[어떤 부자가],[어떤 친구가]등 그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본문의 비유에는 거지[나사로]라고 이름을 구체적으로 말씀 하셨습니
다.

[나사로]라는 말은 히브리말의 [엘리아잘]이라는 말의 라틴말 표현입니다.
[엘리아잘]이라는 뜻은 [하나님은 나를 도우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이지요.

거지 나사로는 병들고 가난하고 도와주는 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그의 헌데를 핥는 개가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나사로에게는 아무 것도 없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거지의 이름을 나사로라고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유한 사람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절대적인 청빈의 소유자였습니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소유함으로 그것을 삶의 보장으로 삼을만한, 그 무엇하나 없는 절대 가난의 소유자였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우심만 믿고 하나님의 은혜에만 자기를 맡기는 삶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삶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아브라함과는 무관한 삶이었습니다. 물 한방울을 얻어 먹지 못한 부자, 이미 부자가 아닙니다만 이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또 간청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우리집에 보내어 내 형제 다섯에게 타일러서 그들이 나와 같은 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죽었던 나사로가 찾아 가면 그들이 들을터이니 아버지시여! 나사로를 좀 보내 주소서." 했습니다. 아직도 이 부자는 부자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나사로를 종 부리듯이 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명확하게 대답하기를 "그들에게는 모세가 있고 예언자가 있고 또한 말씀이 있으니 그들이 그 말씀을 들으면 된다."고 하자 부자는 "아닙니다. 저들이 말씀으로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선지자의 말로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예언자
의 말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말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찾아가서 말하가 저들이 회개하고 인생을 올바로 살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했습니다. "저들이 예언자의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살아서 찾아 간다고 해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이미 세상에서 좋은 것에 집착해 버리면 죽은 자가 살아가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들이나 우리의 형제 자녀들이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지금 죽은 사람이 살아서 찾아와 말을 한다면 우리의 형제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으며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가도 강단에서 많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온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가졌든지 못가졌든지 우리가 [나사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놓여있는 상태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있는 상태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삶이었으며 이웃을 위한, 타자(他者)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버림받고 죄인으로 낙인 찍힌 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사셨던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주셨던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 가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6말씀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자나 무할례자가 효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 유식하냐 무식하냐, 건강하냐 병들었느냐, 부자냐 가난하냐가 아무런 효력을 나타낼 수 없고 다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나 갑니다. 우리가 영원히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하나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인생의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그 어떤 위치에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하지 말고 나사로가 되어야 합니다.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받아야만 사는 그러한 겸손과 절대적인 은총속에 사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내어 놓고 봉사하고 섬기며 자신을 바치는 삶만이 영원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깨달으시고 진정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을 사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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