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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은 참된 행복의 근거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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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행복이 무엇일까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 곧, 부활의 삶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역설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 기독교 복음사역이 헛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 기독교인의 믿음도 헛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는 부활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처럼 불쌍한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인처럼 행복한 자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부활은 생명의 승리를 가져다 주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에 제자들은 매우 깊은 절망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보았을 때, 생명의 위대한 승리를 느끼는 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패배가 아니라 승리를,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느끼는 그런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1967년 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최초의 심장 이식 수술을 하여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심장 이식 수술은 찰스 버나드(C.Bernad)박사가 담당하였고, 이를 성공한 기쁨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18일만에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던 자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두 번째로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자가 19개월 동안 살다가 폐렴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인간이 죽지 않도록 하는데 연구가 많이 되고 있습니다만은 그러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죽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의학이 발달되기 전 수 천년 전에 벌써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어도 영원히 사는 확신을 주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행복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도에서 선교사로 힘쓴 스텔리 존슨 선교사가 전도를 하고 있을 때 이슬람 교인이 나서서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못 가진 것 한가지를 가지고 있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메디나에 가면 마호메트 시체가 들어있는 관이 있어서 역사적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빈 무덤 밖에 없지 않소, 그러니 무슨 역사적 증거가 됩니까" 그 때 스텐리 존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빈 무덤은 죽은 자가 부활하였다는 것이요, 부활은 생명을 의미한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시체가 있고 아직도 관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무덤이 비어있고 시체가 없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요,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생명과 승리의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렇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깨뜨려지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빛을 던졌습니다. 생명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런즉 이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우리의 생명과 승리입니다.

둘째로, 부활은 감동과 기쁨을 주는 삶입니다. 부활을 두고 감동과 기쁨의 감정이 표현된 곳 몇 군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0절에 제자들의 감정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돌아가시자 한 곳에 숨어서 불안과 초조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셔서 못 박혔던 손과 창을 받았던 옆구리를 보여 주면서 부활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는 어둠이 걷히고, 밝은 날이 찾아왔습니다.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쳐왔습니다. 그 마음의 감정은 기쁨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쁨이 터져 나왔습니다. 또 누가복음 24장 32절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실의와 허탈감의 두 제자가 부활의 주를 만났을 때 그들의 감정은 뜨거워지고 말았습니다. 감격입니다. 감동입니다. 마태복음 28장 8절에 막달라 마리아의 감정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새벽, 무덤을 찾았던 그는 찹찹하고 불안하고, 무섭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소식을 전해주자 무서움에서 큰 기쁨으로 전이가 생겼습니다. 무서움에서 큰 기쁨으로, 공포에서 희열로 전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갈 때에 문득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때 그 여인의 감동과 기쁨은 이로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으나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해주는 마리아의 발걸음은 얼마나 기뻤던지 하늘을 날 것처럼 뛰어갔습니다. 그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이 기쁨을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 다시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다. 여보시오, 제자들이여, 주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이 한마디 소리에는 그의 기쁨이 얼마나 충천되어 있는 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박윤선 목사의 "부활과 소망"이란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내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막연한 삶이 아니라 확실한 삶을 주었습니다. 애매한 삶이 아니라 뚜렷한 삶을 주었으며, 흐지부지한 삶이 아니라 알찬 삶을 주었으며, 불행한 삶의 연속이 아니라 행복한 삶의 연속이며, 그것이 가난하던, 병들던, 어떤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행복한 삶이 될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박윤선 목사님의 삶을 보면 고백한 대로 부활 신앙에 근거하여 행복한 삶을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얼굴은 평생에 근심을 본 일이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도 얼굴에 근심이 없었습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생애에서 살다가 주님 앞으로 갔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하여 뜨겁고, 감동이 있고, 기쁨이 있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가난하던, 병들던, 어떤 시련에서라도 내 영적 심령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기쁨이 충만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울 세종교회 이종덕 장로는 49세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장로 된지 만 7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크지 않는 벤처 사업을 해서 제법 잘 되고 있는데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니 온 식구들은 애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교회도 충성스런 젊은 장로를 잃게 되었으니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임종 때 슬퍼하는 가족들과 목사님께 마지막 말씀을 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절대 슬퍼하지 마십시오! 저는 부활의 주님을 곧 뵈옵게 될 것이고, 부활하여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저는 결코 이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여 슬퍼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이여 슬퍼하지 마십시오. 저는 부활의 주님을 곧 뵈옵게 될 것입니다. 저는 결코 이 순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를 끝내고 그는 주님 앞에 안겼습니다. 우리도 여기 이종덕 장로처럼 이런 삶을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 그리 근심이 많고, 왜 그리 불안하고, 왜 그리 우리에게 수심이 차 있는지,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오늘 내가 죽을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의 손에 잡힌 바 될 것이거늘 아직도 이 감격과 기쁨이 우리 안에 체험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부활절은 무슨 의미입니까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근심을 버리게 하고 이 놀라운 감격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부활은 평안과 위로의 삶입니다. 요한복음 20:19-20에 부활의 예수님이 불안의 침을 삼키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처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성탄의 소식도 천사가 평화를 선포하였습니다. 부활의 소식도 직접 주님께서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이 1965년 "부활의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국가마다 분쟁과 당쟁의 소리, 가정마다 분쟁의 소리, 개인마다 감정의 소용돌이, 어디서나 어느 누구에게도 평안을 찾을 길 없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은 평안의 선포요, 평화의 소식이었다." 사실 국가마다 분쟁입니다. 나라마다 분쟁입니다. 그리고 당쟁의 소리는 끝이 없이 시끄럽고 정치 불안을 자꾸만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가정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분쟁의 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개인마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찢어질 듯이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고 있습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평안을 찾을 길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과 평안의 선포는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그럴 수 없는 영적 평안이 되는 것이니 이 은혜를 체험하는 자마다 진실로 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어떤 종교 잡지에 이런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3형제가 각각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 가정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큰형이 트럭을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어 두 팔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둘째가 오토바이를 타고 직장에 가다가 사고를 당하여 한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셋째가 가정의 책임을 져야 하는 불행을 맞이했습니다. 이때 교구 목사가 찾아와서 첫마디의 말이 "형제들에게 주의 평안이 계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셋째가 화를 벌컥 내면서 "목사님, 우리 집 형편을 잘 알면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형이 오늘 두 팔을 잃어버리고, 둘째 형은 다리를 잃어버린 이런 집안 형편을 알면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때 둘째가 동생을 책망하면서, "지금 우리에게는 목사님의 그 말씀 외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느냐! 동생아, 아서라, 오늘 형이 두 팔을 잃어버리고 내가 다리를 잃어버리고 이렇게 풍지박산 우리 가정에 목사님 하신 말씀 외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느냐!" 한 여 성도가 오래되고 헤진 전도지 한 장을 보배처럼 간직하여 가지고 다니면서 순간순간 사람들에게 그 헤진 전도지를 보이곤 했습니다. 그 전도지의 제목은 "당신의 삶이 만족하십니까"라는 것입니다. 참된 삶의 만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소개한 작은 전도지 입니다. 그 여 성도는 좋은 아파트에서 남부럽지 않게 고급스럽게 살았다고 합니다. 좋은 가구 다 들여보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보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삶의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국 우울증에 걸려 자꾸만 죽고 싶은 충동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신문지에 끼워진 전도지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참된 삶"을 이 작은 쪽지의 전도지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로써 그리스도에게 나간 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전도지를 가장 소중한 보배로 지니고 일생을 살아왔다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그 전도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삶이 참으로 만족한가 말이지요. 세상에서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있는가를 한번 살펴봅시다. 현대 그룹 정주영씨도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나 돈이 많은 재벌가지만은 90여생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삶은 일장춘몽입니다. 그의 후예들이 지금 현대 그룹을 이끌고 있습니다 만은 과연 그들에게 평안이 있을 것인가 한번 여러분 진단해 보십시오. 그래도 이 여인은 작은 쪽지의 전도지 하나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삶의 보람을 찾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더 만족한 사람이었습니까 오직 부활하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아니고는 참된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22장:9절에는 일개 인간 솔로몬 왕도 평강의 왕으로서 나라를 평화롭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으로서 그의 백성에게 평강을 끼치지 못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 평화의 왕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이 평강을 주지 못하겠습니까 에스겔 34:23-25을 보면 "오실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한 짐승을 땅에서 그치게 하고 자기의 백성들을 빈들에서 평안히 거하도록 할 것이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빈들과 같은 이 거친 세상에서도, 악령이 휘두르는 이 거친 세상, 죄악이 관영하는 이 세상, 아픔이 있고 악한자가 설치는 이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평안을 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놀라운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어찌 우리가 믿지 못하겠으며, 이 평안을 깨닫는 사람들은 참된 행복의 사람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의 근거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생명의 승리를 가지게 하는 부활, 감동과 기쁨을 가지게 하는 부활, 참된 평안을 가지게 하는 부활, 이 부활의 역사가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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