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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신앙 (고전 15:50-58, 왕하 04: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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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기독교 교회력에 있어 가장 극적인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이라 고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곧 우리들의 부활이 됨을 믿어야 합니다. 온 세계가 우리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의미에 대하여 몇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 니다.

 (1) 죽음에 대한 승리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죽음에 대한 영원한 삶의 승 리였습니다.

 나이 50이 채 넘지 않은 젊은 실업가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실업에만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 때는 외국 유학도 갔다 왔고, 많은 고생도 하고 학위도 땄습니다. 국내에 들어와 서도 회사에 취직하여 정열적으로 일을 했고, 나름대로 성공을 했습니다. 1년의 1/3은 해외 에 나가 있을 정도로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감기에 걸렸습니다. 두 주일이 지나도 영 몸이 개운치 않아서 오랜 만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그 결과는 뜻밖에도 암이었습니다.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은 그가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러한 시간이 내게 올 줄 알았더라면, 이 러한 일이 내게 닥칠 줄 알았더라면 결코 지난 날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이 너무나 애절하고 충격적인 말로 들려왔습니다.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칠 줄 알았더면 이렇게는 살지 않았을 텐데' 사실 다시 한번 생 각하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이런 일이 나에게는 닥치지 않을 줄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내 차례는 오지 않을 줄로 생각하며 살아 갑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돈을 추구하고 명예를 추구하고 성공을 열심히 추구했는데, 이제 바짝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도대체 이게 뭐냐 이렇게 끝이 난다면 나는 무엇이냐" 하고 깊은 허무와 무상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기 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죽음과 삶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 죽음이 닥쳐오더라도 이런 후회와 한탄을 하며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부활의 문제는 곧 바로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입 니다.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지 않겠다는 생각, 죽지 않으려는 생각 때문에 인생은 불행하다." 사람은 죽게 되어 있는데 안 죽으려 하고 안 죽을 것이라는 이런 생각이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 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불안과 두려움이 죽음인데, 예수님은 곧 바로 죽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 그 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 신 것을 직접 보여주셨고, 죽음을 정복하셨고, 죽음을 극복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 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죽어도 다시 사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고 부활한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삶과 죽음의 문제가 잘 해결된 사람이라면, 남들과는 전혀 다른 삶 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당시에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많 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총독 빌라도는 정치가로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는 데, 예수님을 보고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사람입니다. 바로 눈앞에 진리를 두고서, 그 리고 생명과 우주의 왕이 되시는 주님을 앞에 두고서 인생의 진리를 물었습니다. 그는 우둔 한 정치가요, 자기 권력을 지키려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또 그 자리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대에 최고 지성이요,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진리요 영생을 주시 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장본인들입니다. 그들은 세속의 물욕과 이 세상의 탐욕에 깊이 빠져있던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씻지 못할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참과 거 짓을 분별하지 못했기에, 그 마음 속에 욕심과 정욕이 가득 차 있었기에 죽음과 삶의 문제 에서 생명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양편에는 두 사람의 강도가 함께 못박히게 되었습니 다. 그들은 사형받아 마땅한 살인 강도들입니다. 죽음과 삶의 순간에서 한편 강도는 예수님 을 저주하고 욕하였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리와 생명의 주님을 앞에 두고도 자기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도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또 한편의 강도는 예수님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간절히 부탁 하였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정말 아슬아 슬한 순간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 은 사람들은 그 문제를 먼 훗날의 문제로 생각하고 접어두고 묻어두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 기 다급하게 처리하려고 합니다. 이미 그 때는 늦어버린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순교자로서 주기철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목사님이 평양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한 감방에서 주영하라고 하는 공산주의자가 함께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함께 지내도록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기철, 주영하 공교롭게도 성이 같아서인지 서로 툭 터놓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주영하라는 사람은 모스코바대학을 나온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상당한 고관으로 지내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주영하가 주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형님을 만났더라면 예수쟁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주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던가 봅니다. 이에 주기철 목사님도 "내가 예수 믿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나도 틀림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하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또 주영하가 이런 말을 하였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땅에 평등을 이루고, 이 땅에 자유를 이루고, 모든 사람이 잘 살게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런데 내가 놀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 은 죽음 앞에서도 아주 희색이 만면하여 하나님 앞에 간다면서 죽더군요. 그 모습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여러분 죽지 않는다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죽음을 생명의 단계로 받아들인다는 것 이 놀라운 진리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저쪽 너 머에 부활의 신세계가 있음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 수 있 음을 믿기에 죽음은 또 다른 나라의 시작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 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이긴 여러분들에게 영원한 삶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약속입니다. 해마다 자연은 옷을 새롭게 갈아입습니다.

이 세상 만물은 해가 바뀌면서 다시 살아가는 생물체가 많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식물들은 겨우내 잠잠히 있다가 봄이 되면 새싹을 피우게 됩니다. 때가 되면 뱀같은 동물은 허물을 벗고 새로운 피부를 입게 되지요. 그리고 개구리 같은 양서류는 땅속에서 겨울잠을 깊이 자 다가 봄이 되면 다시 깨어나서 알을 낳게 됩니다. 우주 만물들도 가만히 보면 자기 나름대 로 다시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봄은 부활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변화되고 승화된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 재미를 모 두 포기한 성도로 살아가면서 다시 부활함이 없다면 무엇을 기대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성 경이 말씀하는 부활이란 단순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까 작년에 죽었던 새싹이 다시 돋 아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작년에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는 새싹은 겨울이 되면 또 죽게 됩니다. 이것은 죽었다가 살았다가 또 죽었다가 또 살아나는 것이 반복됩니다. 우리 기 독교에서 말씀하는 부활은 그런 부활은 아닙니다. 육신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때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변화되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은 한번 죽음을 경험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2000년이 지나도록 다시 죽음 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장차 주님같은 부활을 하게 됩니다.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지만, 다시 살게 되고, 그리고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 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겨운 세상을 단순히 똑같은 모습을 다시 산다면 얼마나 지겹고 답답하겠습니까 변 화된 모습으로 영원히 살게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변화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세 속의 탈을 벗어버리고 영원한 가치로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사는 풀이나 나무들은 반복적인 환경에서, 똑같은 삶을 반복할 뿐입니다. 과거와 같은 날씨, 같은 기후 조건, 같은 생명력, 같은 시간대를 계속해서 반복적 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부활은 죽음 이전의 경 험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먼저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죽음의 가치관, 일편적인 가치관에서, 영속적인 가치관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인식이 달라집니다. 영원 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부활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사람들은 한번 죽음이 이제 영원과 이어지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래 서 마태복음 22장 30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가 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부활의 몸을 바울 사도는 신령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육체적인 몸은 시간의 제한을 받아야 합니다. 모두가 수명이 있 습니다. 어떤 사람은 50세, 어떤 사람은 80세라는 수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신 령한 몸이기 때문에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승화된 삶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연 미물들의 예를 들 수 있습 니다. 곤충을 볼 때 유충 시절에는 이것이 땅 속에서 더럽고 추한 것을 먹고 삽니다. 땅 속 에 기어다녀야 합니다. 다른 짐승이나 새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나방이 되고 고치 속에서 깨어나면 허물을 벗고 날개를 달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을 완전히 잊어버 리고 하늘을 천사처럼 훨훨 날아다닙니다. 날아다니면서 꽃에 앉아 꿀을 먹기도 하고 자유 를 만끽합니다.

 이런 모습은 곧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땅에서는 온갖 어려움을 다 겪지만 부활한 몸 이 되면 날개 달린 나비처럼 자유와 기쁨의 새 삶을 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 활 신앙이란 오늘의 아픔과 고난을 미래의 소망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인내하는 것이 요청 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부활의 산 소망을 가슴 에 꿈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희망의 내일이 있습니다. 변화된 새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 니다. 날마다 소망을 잊지 말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에 환희와 기쁨을 줍니다. 기독교 신앙에 십자가와 부활이 없 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아픔이요,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라 면, 부활은 환희와 소망과 새 생명을 보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부활 신 앙은 가장 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해 줍니다.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이나,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귀한 향유를 주님 발에 부었던 여인이나, 예수님을 사랑했던 주변의 많은 인물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을 보고 얼마나 실망이 컸습니까 이들은 사실 부활에 대하여 특별히 믿 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누누이 말씀하셨는데도 정작 돌아가셨을 때는 실망과 낙 담이 컸지 부활을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 마음 속에 받은 상처는 상상할 수 없 으리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잃어버린 두 제자는 이제 희망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삶의 의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 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삶 의 환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정말 최고의 환희요 기쁨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때때로 낙심한 두 제자같이 절망의 그늘에 파묻힐 때가 있습니다. 십자 가를 지고 가야 할 시간처럼, 힘들고 어려움만 닥칠 때가 있습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조금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부활 신앙을 마음속에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환희와 기쁨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합니 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주의 백성들로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삶을 살 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변화를 통하여 더욱 성숙된 부활 신앙을 이루시 길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내일을 노래할 수 있는 기쁨과 환희의 부활 신앙을 가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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